[2027 WORLD YOUTH DAY IN SEOUL OF COREA]
[2027년 세계 젊은이의 날] 한국 서울서]
Holy Father, The Pope Francise proclaimed,
[2027 World Youth Day in Seoul of Corea],
<2023년 8월 6일 PM.17:30 in ending the Holy Mass in Lisbon after pilgrim in Fatima of Portugal>
오늘의 우리 한국천주교회 젊은이들은 현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가르치심을 따라,
옛날로 잠시나마 돌아가서,우리 선조, 우리 선배님들의 발자취를 우선 따라갑시다,!
오늘의 우리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위대한 영웅들은 어제만의 우리 선배 성현들이 아니니,
오늘의 우리가 본받을 수는 없어도, 배우고 존경하며 후대에 알리면서 같이 찬미할 수는 있읍니다 !
[우리 한국천주교회 창립선조들을 기억하라] (Memory Guard ) -교황 프란치스코
한국천주교회는 성직자나 수도자나 선교사 없이, 15세 전후와 20세 초반의 영세 전 젊은 한국인 예비신자 선비들에 의해서, 당시, '천학'이라고 부르던, 천주교 진리 탐구의 자발적인 강학으로 시작되었읍니다. 조선교구 제5대 교구장 St. Antonio Daveluy 주교의'조선 순교자 비망록'(Pour Histoire de Martyres de COREE (IV) 1850)과, 영국 주일대사관에서 20여년 이상 기거하며 일본과 조선을 넘나들며 조선 문화사를 연구하던 영국황실 소속의 William H. Longford 교수의 '[조선 문화사](The Story of Korea)'에서 비교적 간결히 잘 기록하고 있읍니다마는, 국내외의 공식 문헌에서도 이를 밝히고 있읍니다.
한국천주교회는 1777년 부터 진리 탐구에 집중하던 10대 중반~20대 초반의 천학 동호인회(Coterie) 젊은이들이 엄동설한에 심산궁곡 천진암 부근의 이벽 독서처에 모여, 각자 앞에 촛불을 밝히고 밤을 지새우며, 처음 10 여일간 강학하던 이 소년들의 모임의 중심적인 주인공 이벽은 1783년 이 모임과 자신의 대리자(Delegate)를 북경에 보낼 때까지, 약 13 년정도 천주교 교리 탐구와 실천에 전념하며, 이른 바, 천진암의 [이벽 독서처 강학]에서 출발하였읍니다.
각자 자기 앞에 촛불 켜놓고 자발적으로 10여일 간 개최한 진리탐구 연구회 기록,,,-
昔在己亥冬, 講學于天眞菴, 走魚寺雪中, 李檗夜至, 張燭談經…. 權哲身嘗於冬月, 寓居走魚寺, 講學會者 金源星, 權相學, 李寵億, 等 數人, 鹿菴自授規程, 令晨起掬氷泉盥潄, 誦夙夜箴, 日出誦敬齊箴, 正午誦四勿箴, 日入誦西銘, 莊嚴恪恭不失規度, 當此時, 李承薰亦淬礪自强, 權日身嘗從李檗.李檗首宣西敎, 日身熱心從檗,,,(墓誌銘,丁若鏞,1816),1797, 端午日陪二兄 游天眞菴, 李檗讀書猶有處, 苑公棲跡杳難尋, 風流文采須靈境, 半日行杯半日吟 !
1801년의 黃嗣永 帛書, [主恩之於東國,可謂廻越尋常, 初未嘗有傳敎者來, 而主特擧斯道, 而親舁之繼, 又以授聖事者預之, 種種特恩指不勝屈,],,,罪人等, 以此自慰而慰人,忍死延生], -
사실 한국천주교회가 외국의 선교사들 없이,국내에서 한국인들에 의해서 자발적으로 처음 시작되었다고 최초로 알리는 문헌은 바로,위의 黃嗣永 帛書다. 하느님의 종 순교자 알렉시오 황사영 진사의 백서 후미 위 문장으로, 북경과 한양, Macau와 Lisbon과 Paris, 또, Roma에까지 선교사들의 손을 거쳐 번역된 한국 선교지 현장의 이 소식이 처음으로 알려지기 시작하여 마침내 교황청 Propaganda Fidei 까지 놀라게 하였고, 바로 훗날 교황 Gregorius XVI 세가 된, 일찌기 포교성성 장관이었던 Capellari 대주교와 포교성 직원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고 전하고 있다.
<교황님, [2027 세계 젊은이의 날] 한국 서울서 합니다. - 2027 WYD SEOUL COREA>
2023년 8월 6일, 파티마 성지 참배 순례 후, 교황님은 리스본 대미사 후에 다음 번 [세계 젊은이의 날]은 한국 서울서 한다고 선포하셨읍니다. [하늘과 땅도 화답례 하듯, 광난의 태풍 카-눈 (Typhoon Kahnoon)이 갑자기 상륙하여, 아산만 새만금 쟴보리 광장에서 열리던 [세계 청소년 잼보리 대회]가 갑작스런 기후급변으로 진행이 극난하게 되도록 만들었으나, 바로 뒤이어서, 그래도 하늘은 우리가 난생 처음 보는 너무나 황홀하고 장중한 쌍겹 무지개가 한강 상류의, 양여지간에, 양안 하늘을 채우며 신비롭게 출현하여 [하늘과 땅도 화답례 하듯 ! ] A double very gigantic-ecstasy rainbow appeared just like for blessing !
Holy Father, The Pope Francise proclaimed, [2027 World Youth Day in Seoul of Corea],
<2023년 8월 6일 PM. 17:30 at the end after the last Solemn Holy Mass in Lisbon of Portugal>
All the Korean catholics welcomed it thanks giving and praying for 3 days after, [A Double very
Gigantic-Ecstasy Rainbow appeared on the sky of the eastern part area 50 km upper stream far
from Seoul of Han River], <2023년 8월 9일 PM.19:20 in upper stream of Han River Seoul Corea>
All the Korean catholics welcomed it, thanks giving praying, and for 3 days after,
<2023년 8월 9일, PM. 19:20 in Seoul of Han River> ! <2023년 8월 9일, 오후 7시 20분>
2023년 8월 6일, Fatima 성지 순례 참배 후 Lisbon에 오셔서 대미사 봉헌 끝에,[2027년 세계 젊은이의 날]은, 대한민국 서울서 한다고 발표하셨습니다. [하늘과 땅도 화답례 하듯, 광난의 태풍 카-눈(Typhoon Kahnoon)이 갑자기 상륙하여, 아산만 새만금 쟴보리 대 광장에서 진행중이던 세계 잼보리 대회가 기후급변으로 진행 계속이 불가능한 조치 직후였으나, 한국천주교회는 교황님의 선포를 받고, 존경과 감사를 다하며, 은총을 받들어 모시며, 굳세고 바르고 용감히 즉시 [2027년 세계 젊은이의 날]을, 대한민국 서울에서 준비하라는 교황님의 말씀에 모든 교우들이 마음과 뜻을 합하여 우리 모두가 난생 처음보는 너무나 황홀하고 장중한 쌍겹 무지개가 한강 상류의 양여지간에, 양안 하늘을 채우며 신비롭게 떠서 우리를 격려하는 천상의 목소릴 듣게 하는듯, 하늘과 땅이 화답례 하듯, 이미 [2027 세계 젊은이의 날] 서울 대회 준비를 마음으로는 전국 신자들이 이미 힘차게 시작하면서, 현 교황님의 한국 첫 방문 때 우선 먼저 방문 당일 한국 주교님들에게 하신, [기억 지킴이-Memory Guard] 주제의 강론 교훈을 따라, 250여 년 전 당시 10대 전후반의 우리나라 젊은 선비들의 자발적인 한국천주교회 창립정신과 불같이 뜨거운 그 신앙의 순교 열성을 계승하며 완성하기로 다짐하였습니다 !
[어린이 날]에 우리는 어린이들을 위하여 관심과 애정을 다합니다. 또한 [어버이 날]에 우리는 아무리 돈이 궁해도 어른들 가슴에 꽃 한 송이라도 달아드리며 하루만이라도 기쁘시게 해 드리고자 마음을 다합니다. 그러나 보편적인 세계 천주교회가 제정하여 교황께서 선포하시는 [2027년 세계 젊은이의 날]을, 한국 서울에서 한다는 이 거룩한 [2027년 세계 젊은이의 날]에 우리는 교황님의 말씀 명심하고, 역사가 숨쉬며 살아나는 계기가 되게 해야만 하겠습니다.
250여 년 전 한국에 천주교 신앙이 전파되기 전에, 자발적으로 진리를 탐구하고 신앙을 실천하여, 성직자나 수도자나 선교사 없이, 우리나라 천주교회를 세운 10대 전후의 우리 선조 청소년들의, [우리 한국천주교회 창립선조들을 기억하라] (Memory Guard)는 현 교황 성하께서 처음 한국을 방문하시면서, 강조하시며, 첫 방한 당일부터 한국 주교님들에게 하신 첫 강론으로, 주교님들 뿐 아니라 전국 모든 사제들과 수도자들과 평신도들도 잊지 말고 기억해야만 하겠습니다.세례성사를 받기 전의 12사도들과 성모 마리아, 등 사도시대 신자들처럼, 한국천주교회 창립 초기 신자들은,성사생활 하기 전부터 천주교를 신앙하는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읍니다.천주교회는 천주교신자들의 단체이며,세례를 받아야 천주교 신자가 된다고 흔히 생각하지만,사실은 천주교 신앙인,즉 신자라야 세례를 받는데(망부활 부활찬송), 12사도들과 성모 마리아가 세례성사 받았다는 기록은 없읍니다.
특히, 우리 모두가 명심할 것은 오는 [2027 세계 젊은이의 날]을 준비하면서, 지난 250 여년전 당시 [한국의 젊은이들]은 15세 전후의 소년들로부터 20대 초반의 젊은이들로서, 그 시절, 우리나라에는 천주교 신자가 1명도 없었고, 성당 하나도 없었으며, 성직자도, 수도자도, 어떤 선교사도 전혀 없던 때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자발적인 진리 탐구의 강학을 계기로, 심산궁곡에서 천주공경가와 십계명가를 지어서 부르고, 달력의 양력과 요일이 전해지지 않아 아직 음력만 알고 쓰며 살던 그 시절,음력으로 매월 첫 7일, 14일, 21일, 28일을 천주공경하는 천주의 날로 정하여, 주일을 만들어 지키며, 힘든 일을 피하고 쉬면서 기도와 묵상으로 천주님만을 찾고자 신앙을 실천하던 우리 [선조 젊은이들은 신앙의 공동체]를 이루게 되자, 광암 이벽은 자신의 대리자(delegate)로 이승훈 진사를 북경에 파견하여 세례도 받고 귀국하였음을 격찬하시는 현 교황님의 말씀에 감사드리며, 명심하고, 기억하면서, Memory Guard를 실천하도록 합시다.
한국 천주교회를 출발시킨 젊은 창립선조들은 아마 당시 50여세 전후의 대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천주교 신앙을 시작하였을 것으로 잘못 짐작하고 있는 오늘의 지성인들이 허다하나, 사실은 당시 모두 10대 후반의 [젊은이들]이 하는 새 종교를 막지 않고, 극소수 한두명 부모 벌 되는 어른들의 심려와 우려에도 불고하고, 주로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 한국천주교회 창립의 [주인공들]이었으니, 이 젊은이들이 대내외 온갖 난관을 극복하면서 성령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에 힘입어, 한국천주교회는 성직자나 수도자나 선교사 없이 기적적으로 창립되었읍니다.
조선 교구 제5대 교구장으로 순교하신 성 Antoine Daveluy 주교가 그의 [한국 순교자 비망록]에서 밝히는 바를 소개하면, 천진암 계곡의 이벽 독서처에서 첫 강학 모임이 시작되던 정유년(1777년), 당시, 중심적인 주동 중심인물 이벽은 23세, 정약용 15세, 정약종 17세, 정약전 19세, 이승훈 21세, 권상문 22세, 이총억 13세, 등이었는데, 모두 그 당시 조혼 관습으로 이미 11세 전후에 결혼하였거나 양반가에서 크게 약혼한 젊은 신랑 선비들이었습니다.
10대 후반~20대 초반의 갖 결혼하였거나 거창하게 약혼한 양반집 젊은 선비 신랑들이,엄동설한에 모두 자발적으로 평균 서울서부터 주로 100 여리씩 되는 눈길 산고개와 얼음 강 위를 걸어서, 심산 궁곡에서,불교 암자의 불상을 모신 대웅전이나 스님들이 거하시는 같은 한 방에서 새로운 도를 닦으면서 찾기 시작하며 심신을 연마하는 젊은이들과 함께 숙식하며 강학을 며칠씩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니, 다만 학자다운 선비들 한 둘이 거하며 책 속에 파묻혀서 촛불 아래 밤을 지새우며 과거준비나 강학대비 글을 읽던, 이벽 독서처 같은 별동 가옥을 사용하며 10여일 간씩이나 강학회를 하였다고 볼 수 있는 각종 문헌 기록을 보면, 李檗讀書猶有處라는 훗날의 문장에서도 보듯이, 이 모임에 함께했다는 정약용 형제들의 기록은 비교적 매우 구체적이며 상세한 편이라고 볼 수 있는데, 우리는 이러한 기록들을 차분히 읽으면, 마치 베들레헴 주막거리 주막집 마구간의 말구유에서 시작하셨던, 매우 청빈낙도한 성가정 식구들이 거룩히 기도하며 매우 소박하게 살아가던 성가정 생활의 한 단면을 연상하게 됩니다.
그러나 진리탐구에 굶주린 이 젊은 한국인들이 성현군자들이 아니라면 사실 누가 시성되어야 할까 하는 생각도 누를 수가 없으니,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알라는 주님의 말씀을 되새겨 봅니다.오늘의 한국천주교회는 저 위대한 젊은이들을 뿌리와 줄기와 가지로 삼아 잎을 내고, 꽃을 피워, 마침내 보기 드문 열매까지 맺게 한 열매들입니다. 우리나라 한국 젊은이들은 천주께로부터 부여하시는 선천적인(apriori) 자질도 없지 않았다고 할 수 있으니, 천주교회가 우리나라에 알려지기 전의 삼국시대 초기에, 특히, 신라 때 불교에 처음으로 접하던 18세에 입문한 이차돈 대선사는 입교 후 3년을 전후한, 21세(?) 경에, 신라에서 불교 신앙의 자유를 위하여 자원치명으로 순교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차돈 대선사는 운명 전 자신의 말대로, 칼에 목이 떨어지자 목에서는 젖빛 백혈이 높히 솟구쳤다고 전하며, 또한 훗날 그 시대 신라의 17세 소년 혜초는 당시 위험한 적국 고구려와 당나라를 거처 흔히 '서천축국'이라고 부르며 말로만 듣던 동인도부터 시작하여, 남인도,서인도,북인도,인도 중앙지역, 등 5개 인도국과 중앙 아시아의 여러나라를 한국인으로서는 물론이고 세계적으로도 흔치 않게 처음으로 순례하고나서,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남겼습니다. 인도의 중앙과 동서남북 5개 인도국 전역을 10여 년간 천신만고를 다 겪으며 순례하면서 쓴, [왕오천축국전]은 당시 젊은 한국 순례승이 기록한 인류 역사상 보기드문 최상의 보배로운 수도순례 기록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통일신라 후기의 대 학자로 파한집에까지 많은 명문장을 남긴, 당시로서는 유교, 불교, 도교에 매우 드물게 박학다식하였던 젊은 최치원이 12세의 젊다기보다 어린 나이에(결혼 직후?) 망망대해 서해를 건너 남송 지역(?)의 당나라를 거쳐 유학하여, 거기서 10 여년 유학한 후, 그곳 당나라 과거에 급제하고, 지방 고위 관직을 받아 근무하다가 24세에는 모국 신라로 귀국하여, 신라 조정에서 임금을 보필하며 당나라에 보내던 임금명의로 된 국서도 집필하여 오늘날까지 양국 역사서에 남아서 전해지고 있습니다.
조선교구 설정의 주역이었던 젊은 정하상 회장의 제자들로서, 15세의 김대건 안드레아와 14세의 최과출 방지거와 15세의 최양업 토마는 1836년 한양에서 의주와 북경을 거쳐 마카오까지, 엄동 설한에 스승 정하상 회장과 여항덕 중국인 신부와 함께,1836년 말,12월 6일에 한양을 출발하여, 6개월 후 다음 해 6월 6일에 마카오에까지 걸어서 갔으니, 거의 2만리가 넘는 먼 길을 걸어간 우리 어린이들은, 급기야 마카오 토착병 말라리아에 걸려, 함께 간 나이 어린 동료 최과출 방지거가 말라리아로 병사하는 고통과 충격을 받은, 김대건과 최양업 두 소년들은 굳세게 공부하여,10 여년 후 사제가 되어 귀국하고 엄청난 전도활동을 하였으니, 일일히 이루 다 열거하기 어려운, [한국 젊은이들]이 이룩한 국가와 민족과 종교를 위한 놀라운 위업은 [전 세계 젊은이들의 본보기로 인류의 귀감]이 아닐 수 없으며. 바로 오늘의 [전세계 젊은이들의 본보기]가 되는, 자랑스러운 바로 [한국의 젊은이들]입니다.
오는 [2027 세계 젊은이의 날] 한국을 찾는 전 세계 젊은이들은 한국에 와서, 반듯이 만나 보고 가야 할 전 세계 젊은이들의 선배들이오, 스승들이며, 거울이고, 교과서적인 한국젊은이들이 있으니,한국의 이 젊은이들을 만나보지 않고, 어디 다른데 가서 무엇을 먹고 마시며 누구를 만나보고 구경이나 하다가 각자 자기네 나라로 돌아가게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2027년 세계 젊은이의 날], 실로 역사적인 대축제의 모범적 기원이 되는,10 여 일 간의 자발적인 엄동설한 앵자산의 촛불 아래 추운 밤을 지새우던 우리 젊은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젊은 신랑 선비들]은 자신들이 시작하여 10여 년 이상 지속하며 실천한 새로운 종교, 천주교를 받아들이기 위하여 자신들의 대리자(Delegate) 이승훈 진사를 북경 천주교회로 파견하여 세례를 받고 귀국하게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최초의 천진암 산골 이벽 독서처의 촛불 강학의 의미와 가치와 교훈을,전 세계에서 이번에 한국에 모이는 젊은이들에게 모두 알게 하고, 배우게 하고, 본받게 하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세계 모든 젊은이들이 개인과 가정과 마을과 나라와 세계 안에서 매사에 천주를 찾는 힘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천진암 강학이라고 흔히 부르는 앵자산의 [이벽 독서처 강학]은 1784년 봄, 광암 공의 천학 독서처가 천진암 계곡에서 우선 서울 수표동 자택으로, 몇달 후, 명례방 김범우 토마스의 집으로, 재차, 또, 제3차 옮길 때까지, 광암 공이 1770년 약 15세 경에 입산한 산골에서 한양과 마재와 포천으로 출타하는 길목 마재로 출가한 누님댁 강건너 두미에 향저를 마련하고 거치며, 1770년부터 1784년까지, 약 15년간은 [독서처]가 기록상으로도 천진암 계곡에 있었습니다.<1797년정사년, 端午日陪二兄游天眞菴, 李檗讀書猶有處- 2분 형님들과 천진암에 와보니,[이벽의 독서처]는 아직도 그대로 있네 !>
그 후, 이승훈 진사의 북경파견이 성공을 거두자 수도 서울로 이전하여 전국 8도를 대상으로 포교활동 계획을 세우던 우리선조 [한국의 위대한 젊은 신앙인들]의 발걸음에 내리시는 주님의 풍성한 축복의 첫 걸음으로, 1785년 을사년 봄에,성직자 없이, 목자 없이 갖 태어난 평신도 교회가, 한국최초의 천주교 박해, 즉 [을사년 박해]를 목자없이 당하고 견디며,가정을 이용하고, 문중을 악용하며, 장안 선비 사회의 우정과 이웃을 선동하는, 정권이 총 동원된 사회 다방면에서 총체적으로 전력 집중하던 박해를 맞았으나, 이를 용감한 우리 [한국의 젊은 순교선조들]은 신앙의 젊은 피를 뿌리며 극복하고, 목숨을 바쳐가며 살아남아, 우리 한국의 위대한 젊은 신앙인들은 오늘의 한국 천주교회 주인공으로서 뿐 아니라, 내일의 세계 천주교회를 지키고, 아끼며, 키우는, 천상천하의 선조들과 후손들과 함께,주님 앞에서 거룩히 발전시키도록, 엄숙히 기약하고 있읍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 아멘 !- Msgr. Peter Byon of Corea -
A double very gigantic-ecstasy rainbow appeared just like for blessing !
Holy Father, The Pope Francise proclaimed,
[2027 World Youth Day in Seoul of Corea] <2023년 8월 6일 PM. 17:30 at the end after the last Solemn Holy Mass in Lisbon of Portugal>
All the Korean catholics welcomed it thanks giving praying and for 3 days after, [A Double very Gigantic-Ecstasy Rainbow appeared on the sky of the eastern part area 50 km upper stream far from Seoul of Han River],
<2023년 8월 6일 PM. 17:30 in Fatima of Portugal> All the Korean catholics welcomed it thanks giving praying and for 3 days after, <2023년 8월 9일, PM. 19:20 in Seoul of Han River> ! 2023년 8월 9일, 오후 7시 20분/-사진은 변기영몬시뇰사랑방홈페이지 [우리겨레가 나아갈 길] 269번 참조-한국천주교회창립사 관계 문헌 용어 이해 위한 참고 주해 -<무지개 사진 촬영 고옥자, 허관순>
<한국천주교회 창립사 관계 문헌 용어 이해 참조용 해설>
Notes de Monseigneur A. Daveluy, Pour Histoire de Martyres de COREE (IV) 1850) - L'histoire proprement dite commence aux conférences de Ni Pieki, nous en avons la suite à vue de clocher, et nous pensons que les lacunes ne seront jamais comblées, toutefois si on veut continuer les recherches, peu à peu on gagnera quelque chose. Il n'y a plus qu'à puiser dans les manuscrits qu'ont certain nombre de grandes maisons et surtout dans les archives des tribunaux criminels.
조선 천주교회 창립의 진정한 역사는 [이벽의 강학]으로 시작되었다.
Notes de Monseigneur A. Daveluy, Pour Histoire de Martyres de COREE (IV) 1850) - Tieng Jean, dit iak-iong, ditque la religion était connue en Corée près de 200 ans avant les conférences de Ni Pieki.
정약용 요한은 말하기를 천주교에 관한 이야기는 이벽의 강학 200여년 전에 이미 조선에 알려져 있었다고 하였다. 즉, 임진왜란 때 스페인의 세스페데스 군종신부가 왜병들과 함께 남해안 진주성에 들어와 곰내(웅천)에 주둔하던 왜병 부대 안에 거주하며 약 6개월 가량 성사를 거행한 소식을 전해들은 이야기로 보인다.
Notes de Monseigneur A. Daveluy, Pour Histoire de Martyres de COREE (IV) 1850)- L'instrument dont Dieu se servit pour donner le premier branle à la Religion dans le royaume de Corée fut Ni Pieki appelé Tektso et surnommé par lui-même Koang am.
천주께서 조선왕국에 천주교를 알려주기 위하여, 마치 [새 벽시계의 시계추]를 맨 처음 좌우로 흔들어 시계를 움직이게 하려고, [최초로 선택한 천주님의 도구]는 경주이씨 가문의 [덕조 이벽]이라는 인물로, 스스로 지은 자신의 호는 [광암]이라고 하였다.
Notes de Monseigneur A. Daveluy, Pour Histoire de Martyres de COREE (IV) 1850))- Pieki descendait de la famille des Ni des Kieng Tsiou et parmi ses ancêtres qui étaient déjà dans les dignités sous la dynastie Korie on comptait plusieurs membres distingués dans les lettres et par les dignités civiles qu'ils avaient obtenues.
(이벽은 경주이씨 가문의 후예로서, 그 집안에는 저명한 인물들과 고관대작들이 많았다.(예,세자를 모시고 청나라에 다녀온 서장관 이경상, 그 앞에는 이정형, 및 임진왜란 시기 오성과 한음, 등.,,)
天眞菴記(端午日陪二兄游, 副護軍 丁若鏞, 1797년)
-李檗讀書猶有處, 苑公棲跡杳難尋, 風流文采須靈境, 半日行杯半日吟(정약용 승지를 반대하는 상소문이 극심하던 정사년 봄(1797년), 정조는 정약용 승지를 당분간 황해도 곡산군 부군수 급으로 좌천시키자, 떠나기 전 정약용은 이른 새벽 서울을 떠나, 먼저 연락해 놓은 고향 마재에 와서 2 형, 정약전과 정약종과 함께, 노젖는 작은 배로 마재 앞강의 쪽풀섬에 가서, 때마침 산란기를 맞은 큰 암잉어들이 강가로 나오는 것을 긴 나무가지로 때려서 그물로 몰기도 하여 150여 마리나 아주 많이 잡아, 섬에서 여럿이 천렵국을 끓여 점심을 먹은 후, 형들과 모두 뜻이 같아, 천진암에나 가기로 하고 떠나서, 귀여리 골짜기로 들어가 고개길을 넘어, 퇴촌의 화랑방 주막거리에 들려, 술을 한두병 더 사가지고, 천진암에 오니 해가 뉘였 뉘였 넘어가고 있었다. 천진암에는 광암 공이 머물던 이벽 독서처가 아직 그대로 있었으나, 광암 공의 흔적은 사라져 없는데, 10여년 전 광암 공의 풍류와 문채는 신비로운 경지에 이르렀었지 ! 20 여수의 시를 더 지으며, 3일을 더 묵은 후 돌아왔다.
闢衛編, 李基慶, 1801 - 李檗之最先溺邪一世之也共知也(사특한 천주교에 맨 처음 빠진 [이벽은, 조선 천주교의 최초 1세 시조]라는 것을 만인이 모두 다 알고 있지 않는가 !? 벽위편의 이 기록은 왕조실록에도 그대로 나온다)
朝鮮王朝實錄, 1801 - 被李檗者最是邪黨中巨魁諸賊之招狼…. 若論邪黨之渠魁則李檗…
(저 이벽이란 자는 이 사특한 무리 중의 가장 큰 괴수이며, 다른 예하 두목들 중 으뜸이며, 조선 천주교의 시조 1세다)
墓誌銘, 丁若鏞, 1816 - 昔在己亥冬, 講學于天眞菴, 走魚寺雪中, 李檗夜至, 張燭談經,,權哲身嘗於冬月, 寓居走魚寺, 講學會者 金源星, 權相學, 李寵億, 等 數人, 鹿菴自授規程, 令晨起掬氷泉盥潄, 誦夙夜箴, 日出誦敬齊箴, 正午誦四勿箴, 日入誦西銘, 莊嚴恪恭不失規度, 當此時, 李承薰亦淬礪自强,,,權日身嘗從李檗, 李檗首宣西敎, 日身熱心從檗.,,
(일찌기 기해년(1779년 겨울에 천진암에서 강학할 때, 주어사는 설중인데도 불고하고 이벽이 밤에 와서, 촛불을 밝히고 경서를 담론하였는데, 그 후, 일찌기 한 때나마 잠시 권철신이 우거하였으며, 강학에 모인 사람들은 김원성 권상학 이총억 등 몇몇이었으며, 녹암 공이 직접 규칙을 만들어 주어, 새벽이면 일어나 빙천으로 세수하고나서 숙야잠을 외우고, 해솟으면, 경제잠을, 정오가 되면, 사물잠을, 해가 지면 서명을 외웠다. 모두가 엄숙하고 경건한 자세로 임하였다.)
天眞消搖集,丁若鏞, 1827 - 天眞菴, 余蓋三十年重到也, 石徑細如線, 昔我童時游, 豪士昔講讀, 暗泉劣一線, 重來愴客心, 入山非喜佛, 寅緣慙講德, 書帙見隨陰, 禪燈廢少林, 尙書此燒鍊, 寺破無舊觀, 芬芳旣沈歇, 禪房無處舊人求, 前躅凄迷不可求, 樓前寮舍半墟丘, 粥鼓斜陽念舊游, 三十年來重到客, 猶然苦海一孤舟, 我欲來此住, 無人示方便
(1827년). 정해년에 지나간 정사년(1797년) 이후,30년만에 천진암에 와서 보니, ,돌무더기 길을 거쳐 천진암에 오르는 길은 가느다란 실같은 오솔길인데, 일찌기 내가 어려서 아이 때 놀던 길이다. 호걸다운 선비들은 여기서 강독하고 독서하였었지 ! 그런데 땅속으로 숨어나오는 샘물은 한줄기 물줄기를 이루고 졸졸 흐르는데, 오랜 만에 찾아온 객의 마음만 서글프게 하는구나 ! 昔我童時游, 여기서, 정약용 승지가,"童時" 라고 말하는데, 그 당시 10세 미만은 童時(아이 때) 라고 말하고, 11세부터는 [소년]이라고 부르며, 장가를 들게 하고,15세 이상은 호패를 차게 하기도 하였다.이 시문을 보면 정약용 승지는 10세 미만, 즉, 7세, 8세 때부터 자신의 형 약종과 약전 등과 함께 광암 공이 가르치는 이벽 독서처에 자주 놀러왔던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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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입산한 것은 부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 함이 아니니, 지금 우리는 새벽부터 덕닦는 주문을 외웠으며(조과?), 산그늘 내려오면 책을 펴기 시작하고 읽으니(만과?), 참선하던 등불을 꺼서, 젊은 열사들을 막았나보다, 상서는 여기서 약을 다려 환을 만들고, 절은 다 무너져 옛 모습 없어졌구나.,, 저 쪽 선방 터에서 참선하던 벗들은 다 사라져서, 이 세상 어디를 간들 그런 훌륭하던 옛 벗들을 구해 올 수 있으랴? 그 옛날 소시적 우리의 학업과 수도의 삶은 아련한 옛 일이라 다시는 그 생활 또 해볼 수 없네 그려! 누각 앞에 있던 객사도 반이나 무너져버렸구나! 그 시절 저녁 죽 먹으라고 치던 북소리에 해질력에 같이놀던 옛 동무 그리워지네 ! 30년만에 다시 찾아온 이 나그네는, 그 때나 지금이나 괴로은 바다 위에 떠 있는 한 조각 배의 신세로구나 ! 아주 여기 와서 머물고 싶은 맘이야 간절하지만, 오고 가고 머무는 일을 챙기며 보살펴줄 사람이 보이지 않네 !
李檗傳, 丁學術, 1830 - 戊戌, 己亥, 曠菴 李檗周遊天下, 一到廣州, 鴛鴦山寺(앵자산 天眞菴)隱居, 丁氏李氏 賢友賢士勉學, 天文, 地理, 醫學, 曆學, 數學, 幾何, 新敎之說, 等, 奇學多博, 道友衆徒 如叢林爲上, 聖敎要旨下筆
(무술년-1778- 기해년-1779-에 광암 이벽은 주유 천하하다가 광주 땅에 이르러, 원앙산사(앵자산 천진암)에 은거하시니, 정씨 이씨네들과 현우현사들과 더불어 학문에 힘썼으며, 천문, 지리, 의학, 달력, 수학, 기하, 신교의 가르침(천주교) 등과, 또, 기묘한 학문에도 박학다식하여, 도를 닦는 벗들이 무리를 지어 모여들어, 웃어른으로 모시며, 총림을 이루자 공이 [성교요지]를 하필하여 받아쓰게 하시였다.)
丁學淵, 1850 - 天眞山 寺之遊, 等….(정약용 승지 문도공의 아들 정학연이, 천진산에 있는 절에 모여, 절놀이라도 하고자하는 알림 서한문이 강진지역에 발견되어 여기 소개한다.)
Lettre du P. Maubant, 1838
- Il (Ni-Pieki) embrassa la religion Chretinne et de concert avec quelques autres prosélytes il envoya en 1783 à Peking un autre déléguéégalemant nommé Y(YiSeung-Huni), mais d'une autre famille, pour prendre de plus amples informations sur cette religion sainte. Y s'adressa aux Missres. frainçais et en fevrier 1784 fut baptisé, sous le nom de Pierre….
(이벽은 천주교라는 새 종교를 진심으로 품에 모시고, 몇몇 새 입교자들과 함께 힘을 모아, 자신을 [대리-Delegate]하는 대표자를 1783년에 북경에 보내어, 1984년 2월에 프랑스인 파리외방전교회원 신부 한테서 베드로 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고 귀국하게 하였다.)
Notes de Monseigneur A. Daveluy, Pour Histoire de Martyres de COREE (IV) 1850)- "C'était en l'année 1777(tieng iou). Le fameux docteur Kouen T'siel sin-i, accompagné de Tieng Jak Tsien-i et plusieurs autres nobles studieux et amateurs de la science, se rendit dans une pagode pour s'y livrer ensemble à des études profondes…. Une arrivée si étrange répandit la frayeur parmi les habitants de cet édifice isolé et perdu dans le sein des montagnes….
"L'histoire proprement dité commence aux conférences de Ni Pieki. Les grandes conférences de Ni Pieki.”
이벽의 저 위대한 강학이 조선 천주교회의 출발이었다.
(Compend. Histr. Pulo-Pinang, 1881) - In illo tempore, non nulli Doctores Coreani secesseerant in solitudinem…. inter eos eminebant Ni-Tek-Tso, cognominatus Pieki, Kuen-Tsiel-Sin-i, Tieng-Jak-Tsien et Tieng Jak Iong…. ut statim suos mores divinis praeceptis conformare decreverint(1770).
동남아 지역, 마카오, 홍콩,대만, 등의 천주교 신학교에서는 이미 1801년 신유박해 후로, 조선 천주교회 창립사를 사실대로 전해 듣고, 신학교 교회역사 교과서에 증보판으로 첨가하여 가르치고 있었으니, 광암 이벽이라는 출중한 선비가 양반층의 젊은이들을 모아,천주교 교리 탐구 동호인회Coterie)를 만들어 교회를 시작하였음을 전하고 있었다.-동남아지역 천주교신학교 교회역사교과서)
Story of Korea (Joseph H. Longford, 1911) -
In 1720…. The Korean Ambassador in Peking…. For fifty years(1770) after their importation of the books. Then they were studied and debated by a small coterie of noble Koreans. For thirteen years he pondered over them…. At last, in 1783, Pieki…. to go on in Peking…. to confer with the priests…. and learn the ceremonies of their religion.
조선사신으로 북경에 갔던 이이명이 서양책들을 많이 사가지고 1720년에 귀국하여 국내에 전파하고 50여년간 1770년경까지 경기 광주 지역과 호남 전주 지역에서도 젊은 학동들이 천주교를 알고 실천하게 하였다고 전하나,적어도, 13년 후, 즉 1783년에는 이벽 독서처의 젊은 양반 동호인들 스승 이벽이 자신의 대리자(il envoya en 1783 à Peking un autre délégué)를 북경에 보내어 영세하고 오게 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黃嗣永 帛書
- 主恩之於東國,可謂廻越尋常,初未嘗有傳敎者來,而主特擧斯道,而親舁之繼,又以授聖事者預之,種種特恩指不勝屈,罪人等,以此自慰而慰人,忍死延生,(주은지어동국,가위회월심상,초미상유전교자래,이주특거사도,이친여지계,우이수성사자예지,종종특은지불승굴,죄인 등, 이차자위이위인,인사연생,,) -
순교자 황사영 진사는 백서 후미에서, 조선천주교회는 주님의 특은으로, 다른 어떤 나라에서도 같은 예를 볼 수 없는, 선교사의 발자국이 나기 전에, 주님 친히 이 천주교를 드높히 보이시고 가르쳐주시어,성사를 줄 성직자까지 미리 안배하여 마련하시었으니, 그 모든 은혜 일일히 세기에는 열손가락도 모자랍니다.(1801) 黃嗣永 帛書
李德懋(1741~1793)와 羅東善의 광암 이벽 言及
-1778년 戊戌年 11월 26일, 李德懋(1741~1793)의 言及, 李德懋言 近日京中 以西學數理專門者 徐命膚及子浩修 而又有李檗 卽武人格之弟也 廢擧不出 偉人高潔 方居紵洞 又有鄭厚祚 卽文官喆祚之弟也 專意於天下輿圖之學 嘗言 大淸一統志輿圖固精 而猶不如大淸會典所載者云(頤齊亂藁) 27책 戊戌 1778, 정조 2년, 十一月 二十六日壬子 -
정조와 함께 인재를 찾던 이덕무 등 북학파의 지도자들이, 이벽의 인품과 자격과 천재적 학식을 듣고 찾아보고자 하였으나, 1785년 을사년 박해로 광암공이 집안에 감금되어, 달포이상 갖은 시련을 당하여 극복한 후에 최종적으로, 10여일간의 아사벌을 받고나서 계속된 음독사벌을 받고, 그래도 숨이 끊어지지 않자, 최후의 질식사벌로 순교하신 후였다.
黃胤錫의 질문에 羅東善의 대답, 1786년 丙午年 5월 5일-
余問 羅君曰
今世都氏 亦有聽明特達之士乎 曰有李蘗者 月川君廷馣之後 兵史鐽之子格之兄也 看苦十行俱下繙閱如飛 目能一上視一下視 一左視一右視甓骨不雙 而單能三次回斡 能上跳二丈平生酷好西洋之天主實義 爲一時其徒之冠 年三十而夭 近年上命西洋文學 自律曆數學三種以外 其爲天主實義之學者 自刑曹聚其書焚之 嚴禁中外 李君時入桂坊別薦 上疏自列天主之說云(頤齊亂藁)38책
병오(1786, 正祖 10), 5월5일 丁未. 광암 이벽의 형제들, 이격과 이석도 모두 20대 초반에 무과에 급제하였으나, 이벽은 아버지 명도 거스르며, 무과에 응시하지는 않았으나, 이벽의 무술은 초인적 수준으로, 길을 가다가 훌쩍 공중으로 뛰어 공중에서 두세바퀴 돌아서 사뿐히 지상에 내려 서기도 하고, 장정 한두명의 키를 뛰어 넘기도 하며, 독서역시 한눈으로는 윗칸 글들을 읽으면서 동시에 다른 눈으로는 아랫칸 글들을 읽고, 한쪽 눈으로는 한쪽 글을 읽고, 다른 쪽 눈으로는 동시에 다른 쪽 글을 읽는 초인적인 재주를 가졌다고 전하고 있는데, 이러한 무술실력을 알게 하는 글은 최근에 와서야 알려진 서종태 박사의 발굴 공헌이다.
-Msgr. Byon
<醒言> 백두산의 緯度-
成大中과 徐命膺이 이벽의 白頭山 北極高度(=緯度) 언급 기록-北極出地 漢陽則三十七度十五分 滑原則四十度五十一分 舊聞諸李檗 白頭山則四十二度强 徐奉朝賀命膺云<靑城雜記> 권5.
북극고도가 한양은 37도15분이 지나가고, 백두산은 42도가 좀 넘는다는 이야기를 이벽한테서 들었다고 서명준, 서봉조한테서 들었노라고 하니, 이벽선생은 당시에 벌써 천문학, 지리학을 지금의 우리보다 더 알고 있었다.
오늘의 우리 한국천주교회 젊은이들은 현 교황님의 가르치심을 따라,
옛날로 돌아가,우리 선조, 우리 선배님들 발자취를 우선 따라갑시다,!
오늘의 우리가 자랑스러운 위대한 영웅, 어제의 우리 선배 성현들을
본받을 수는 없어도, 배우고 존경하며 후대에 알리면서
같이 찬미할 수는 있읍니다 ! - Msgr. Peter Byon -
….
FR0M CONVERSATION WITH GOD, THEN, INTO CONVERSION WITHIN GOD !
Prima di tutto, il fare una conversazione con Dio,cioe, un dialogare collo Santo Spirito il nostro Signore,
e poi, noi possiamo incominciare venire gradualmente alla conversione in Dio, l'unire con Dio, cioe, Deificazione !
Bisogna per noi, per l'unire con Dio, prima di tutto, il fare una conversazione con Dio, cioe,un dialogare collo Santo Spirito il nostro Signore, e poi, noi possiamo incominciare venire gradualmente poco a poco , alla conversione in Dio, e poi,finalmente, come il grande Teologo Maestro S.Tomaso d'Acqino aveva parlato degia, l'unire con Dio, cioe, Deificazione nella sua Summa Teologia ! - Msgr.Peter Byon in Core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