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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낳아서 신부 보낼거가 아녀!"하는 소리 들으며, 96세, 天壽를 하신, 김순옥 마리아, 우리 동창 김정원 몬시뇰의 어머님이 살아오신 길은!

글 : Msgr. By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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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낳아서 신부 보낼거가 아녀!"하는 소리 들으며, 

96세, 天壽를 하신, 김순옥 마리아, 우리 동창 김정원 몬시뇰의 어머님이 살아오신 모습을 되새기며! 


우리 동창 김정원 신부님 어머님께서 96세의 天壽를 하시고, 선종하실 수 있도록, 효성을 다하신 자녀되시는 가족들과, 특히, 김신부님께 마음으로나마 머리숙여 진심으로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가 없읍니다. 나는 마음이 부드럽지 못하고 냉엄한 편이고, 성격도 너무 무뚝뚝한 편이어서 눈물에 인색한 사람이라서인지, 장례 미사, 특히, 거관하면서, 나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금치 못하고 울어본 것은, 내 일생에 1985년 내 친 어머님(80세) 돌아가셨을 때와, 2017년 이번에  96세 천수를 하시고 가시는 김순옥 마리아, 우리 동창 김정원 몬시뇰 어머님이 돌아가셨을 때가 꼭 두번째입니다! 지난 번 어머님 장례식 후에, 동창 허신부가, "변신부 우는 것 생전 처음 보았어!" 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눈물이 너무나 부족하고 인색한 사제로구나 하는 반성을 하였었읍니다!

1971년 8월 말에 우리들 4명이 신품을 받고, 2명이 바로 여주본당과 신장본당 주임으로 임명되었는데, 김신부님을 보러 9월 초에 신장 성당에 갔다가 사제관에서 김신부님 어머님을 뵈웠을 때, 눈물이 글썽하여, 양 눈가에 핑그르 돌고 있는데도, 내색을 하지 않으시려고 무척 참고 인내하시면서, 그래도 명랑하고 자상하신 모습으로 반가와 하시며 과묵하시게 몇 말씀을 조용히 하시던 모습은 오래오래 내 머리에 남아있었읍니다. “새 본당, 이곳 사정이 이렇게까지 어려울 줄은 몰랐어요. 문득, 몇몇 친지 교우들이 함께 와서 보고는, 아들 낳아서, 신부 보낼 것이 아녀!,,,,!하는 소리를 몇번 들을 때마다, 신부님의 어머님이시라는 존경과 영광의 인사는 아주 멀리 있는 남의 일같이만 생각이 들다가도,,,!”. 신심깊은 구교우 집안들의 신덕을 풍기는,,,!

아들 예수님의 조반 마련하시느라, 맷돌에 밀을 갈아, 양가죽 주머니로 담아온 물로 반죽하여 빵을 굽던 성모님을 연상케 하는 김신부님의 어머님은 기도와 신심으로, 연탄 갈고 밥 냄비를 올려놓는 부뚜막에, 설거지 그릇 물에 텀벙텀벙 떨어지는 눈물도 아들 신부에게 보이지 않으시려고, 일체 내색을 하지 않고,,,비포장 도로 위를 시속 40km로만 달리게 되어 있는 당시 시외 뻐쓰를 몇차례 갈아 타시고, 갓등이 농가집에 가고 오시며, 살림도구와 식자재를 조금씩 나누어 날라다가,,,!(훗날 잠시 식복사하던 자매가 필자에게 전하던 이야기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한국천주교회 역사상 최초로 설립된 갓등이 본당 구교우들의 눈에는 당시 교우들이 하늘같이 모시던 본당신부님들의 사제관 사정이 이럴 줄이야,,,!

신장본당 초대 전임 신부님은, 외짝 교우 한 두집 외에는 신자들이 거의 없던 불모지 시골 마을 신장 석바대에, 삼화페인트회사 김복교 사장님의 봉헌으로 야산 2천여평을 매입, 구산 공소 교우들을 동원하여 벌목, 개간하며, 작은 성당(50여평?)과 사제관(20여평?)과 뒤쪽에 식당(15평 내외?), 모두 쓰레트 지붕으로, 물이 새는 구석도 없지 않은데다가, 주방이라고는, 구멍탄을 한 개씩 2개를 얹어 피우며, 흙 부뚜막에 찬장도 없이, 고생하시며 지내던 곳이었습니다.

본래 살림살이도 거의 없던 가난한 사제관이었지만, 그나마, 초대 신부님이 불시에 이사를 하게 되어, 이삿짐 일꾼들도 일반 가정집 이사처럼, 그나마도 장독도 없고(?), 주방에도 그 흔한, 장 3형제(간장, 된장, 고추장,)도 모두 함께 이사갔는지 없어지고, 우선 먹을 쌀도 겨우 한 두 말 정도(?) 밖에 남아 있었는지, 기억이 확실치 않지만, 김신부님 어머님이 우선 갓등이 집에 가셔서, 당장 아들 신부 먹을 쌀 자루와 작은 빈 소주병에 참 기름 조금 담고, 된장 서너 사발 빈 밥통에 담고, 간장과 고추장도 한 두 사발씩 담아가지고,,,,와서 보니, 당장 새 신부님이 잡수시도록 무엇이라도 끌여드려야 할텐데,,,!

오죽하면, "이제 그만하시고, 빨리 집에 가보세요"하며, 재촉하는 김신부님만 남겨 두고, 갓등이 집으로 돌아오려고 나서니, 차마, 발자욱이, 흘러내리는 눈물 속에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서,,,! 도저히 하루 이틀만이라도 더 있다가 가야지,,,! 이러한 고통은 하루 이틀이 아니라, 여러 달이 지나도록,,,!지나도록, 또 지나도록,,, 앞이 여전히 막연하여, 원래 신자들이 적고 가난하던 시골이라, 고향 갓등이 한 동네 살고 있는 김화태 신학생(몸이 약해서 휴학 중이었는데, 지금 수원교구 내 대리구장 ?)까지 신장 본당에 오라고 하여, 신학생이니, 임시 불가피한 자원 식복사(?) 겸무를 하게 하도록, 봉사하게 하면서, 내 기억에, 함께, 아마 2년(?) 가까이를, 신장성당에만 깃들어있던 깨끗한 가난의 맛을 함께 즐기며,,,!

같이 신품을 받고나서, 주교 비서였던 필자가 이듬해 봄에 교구장 윤주교님 안 계실 때, 교구장 주교님이 타시는 교구의 유일한 검은 신진 찝차를 타고, 김신부가 어떻게 살고 있나 궁금해서, 신장본당을 갔었는데, 남부 지방에서만 자라는 금잔디를 구해다가 뿌리를 찢어서 성당 마당에 이식하느라고 호미들고 일하고 있던 김신부가 일어나지도 않고, 풀밭에 철퍼덕이 앉아서 나를 쳐다보면서, 고닲으고 피곤한 모습으로,,,“변신부는 주교댁에 근무하니까, 살림을 해주는 수녀님들과 당가신부님(관리국장)도 계시니, 참 일하기가 좋겠어,,,!”.

신장성당 사제관의 김신부님이 고생을 많이 하는 것을 옆에서 보던 어느 신문 교우가, “육사 졸업하고 장교로 임관되면, 국비로 대학 공부를 마쳤기에, 7년간은 장교로 의무복무 기간을 채워야만 대위로 제대할 수 있는데, 천주교 사제들도, 의무복무기간이 있습니까?” 하는 소리도 들을 수 있던 시대였습니다.

아들 신부를 위하여 피할 수 없는 온갖 구진 일을 마다하지 않으시며, 그렇다고 본당 사목에는 앞에 나서지 않으시고, 고요히 뒤에서 과묵하게, 기도와 희생만 바치시며, 마치 가나 촌 잔치 집에서, 예수님께만, “술이 떨어졌단다” 하시던 성모님의 모습을 남기고 먼저 가시는 반세기 전 우리 수원교구 사제들의 어머님께, 성모님께서는 영생의 천상복락을 함께하여 주시리라 믿습니다. (실로 오늘의 수원교구는, 반세기 전, 못난 우리 젊은 새 신부들이 모르는 이상한 나라가 된 사회의 천주교회가 아닌가 하고, 어리둥절해질 때가,,,!)  

수원교구에서 30여개 본당 중에, 신도 수가 가장 적고 가난하던 신장본당에서 생존  자체가 그리 쉽지 않을 정도의 어려움을 겪으며 살며 일하다가 5년 후, 김신부는 1976년 3월 3일 자로 용문본당 주임으로 전근이 되었고, 동시에 신장본당 주임 후임으로는 필자가 임명되었는데, 필자역시 자전거 한 대를 살 돈이 없어서, 주일이면 오후에 신장 성당에서 구산공소까지 미사 드리러 걸어서 갔다와야 했으며, 김신부는 신장본당 주임 재직시에 성당 재정사정이 너무 삭막해서, 사제 침실 유리창에 카튼을 하나도 설치하지 못하여, 밤에는 창 밖에서 키큰 사람이 발돋음하면, 방 안에서 방바닥에 누어서 사제가 잠자는 모습을 그대로 다 볼수 있는 처지였는데, 커튼없이 5년을 살며, 일하다가 용문본당으로 갔는데, 필자가 후임으로 부임하였을 때도 마찬가지여서,,,!  

그래도, 김신부는, 자기 후임으로 가는 나를 위하여, 용문본당으로 갈 때, 신장 성당 사제관에 장독 3개에 맛있는 장 3형제를 가득히 남겼고, 쌀도 2 가마니(?)나 남겨서, 우선 1년 먹고 살 것을 준비해 주고 갔었기에, 무척 고마웠읍니다. 후임 사제 생활을 미리 챙기는 것을 보며 그 어머님의 입김을 느낄 수가 있었읍니다. 본당 경리 인수인계를 떠나서, 그냥 1년간 먹을 사제관 식량을 마련해 주고가니, 우선 굶지는 않을거야! 하며, 용문산 더 깊은 산골로 떠나 가려고 차를 타러 가던 김신부의 뒷 모습을 바라보며, 당시 신장본당 총회장 이원호 미카엘 교수와 몇명 안되던 가난한 외짝 교우들은 흐르는 눈물을 씻어도 자꾸 흘러내려서, 눈에 어릿어릿하며 사라지던 김신부님의 모습이 오래오래 잊혀지지 않는다고, 오 마리안나(총회장 사모님) 자매님과 몇몇 교우들은 판공 때가 되면, 그 전에 고생만 엄청나게 하고 가신 김신부님 이야기를 내게 몇차레나씩이나,,,! 

시골 교구 작은 신장본당 신부로 무능한 시골 신부가, 전혀 뜻밖에도 서울 주교회의에 불려가서, 5년간이나 10여명이 넘는 선후배 상하 좌우 시어머니들의 눈치코치를 보며, 때로는 최대의 비협조를 아낌없이 베풀어주는 은덕도 상급으로 받아 입으며, 실로 힘에 겨운 과중한 주교회의 직무를 하느라, 너무 지쳐서, 죽네 사네 하며 비틀거리던 1984년 말, 변신부가 드디어 죽었다는 소문이 2 군데서나 실제로 알아보려는 확인전화가 올 정도로,,,!, 그래도 목숨은 질기고 길어서 아직 살아있어서, 숨이 끊어지지 않은 필자는, 10년가까이 살던 신장본당을 떠나서 천진암 산골로 아주 들어가려고, 교구장님의 허락으로, 책 보따리를 주섬주섬 싸서 싣고,  천진암 산골로, 교구 총대리 황익성 신부님의 조언을 따라, 건강회복을 위한 휴양을 겸하여, 심산궁곡의 성지 생활하러 아주 들어가게 되었읍니다.

그런데, 밤이면 부엉이 울음소리에 잠을 청하는 심산궁곡이라서, 생각보다는 어려움이 많아서, 신장성당 사제관은 천진암에 비하면 천당이었던 것처럼 느낄 정도였는데, 후에도, 김신부는 종종, 아마 그 자상하던 어머님의 말씀이 있었는지(?), 특히 추석 같은 때는 나를 잊지 않고, 소속 관활 신자가 전무한 천진암 산속에서, 항아리의 쌀이 떨어져서, 산나물같은 풀만 먹으며 살다가는 신부 머리에 염소처럼 뿔이 날텐데, 머리에 뿔이 나오는 신부는 신부 모양새도 좋지 않아,  동냥하러 나다니며, 고생하지 않는지 걱정이 되었는지, 산골의 동창신부를 잊지 않고 기억하여, 종종 수원 산 맛있는 포도를 한 상자씩 사서 보내주었읍니다. 

수원 권성동 성당을 짓는다기에, 교구청에 가는 길에는 종종 들려서 자당님을 뵐 때는 대부분 손에 빗자루나 걸레를 들고 있는 경우가 많았읍니다. 허허벌판 논 바닥에, 큰 대성당을 짓는다고, 귀가 따갑게, 공격적인 비협조의 말들이, 그나마 한두번 해 두었으면 그만이지, 거의 매주일 미사 때마다, 주변 기존 본당들의 일부 회장들까지, 때로는 성직자들도 단돈 백원 한장 보태주지는 못할 망정, 권성동 대성당 건립에 대한 사정없는 비판의 소리에 귀가 따가울 때도, 어머님을 닮은 김신부는 과묵하게 잘 참았었읍니다. 

과부의 서름은 과부가 돼 봐야 안다더니, 지금 내가 와서 머무는 곡수리 공소가 용문본당 소속으로 있을 때, 김신부가 봄 가을 판공을 하러 다니던 곳이라서, 지금도 이 마을에는 아직도 약국 하나가 없는 시골임을 잘 알고 있는지, 혹시라도 이곳에 와서 또 항아리에 쌀이 떨어지지 않나 걱정이 되는듯,  아들 사제의 생활을 걱정하시던 그 어머님을 본받아, 지난 해 추석(?) 때도 여기서는 구경하기 힘든 맛있는 포도를 한 상자 또 보내주었습니다.

역시 그 어머니에 그 아들 신부입니다! 한국사회의 격동기에 꿋꿋한 일 꾼, 김정원 신부님을, 옆에서 기도와 희생과 인내로 한결같이 꾸준히 함께하시어, 특히, 오늘날 수원교구의 거룩하고 튼튼한 정신적인 기둥과도 같은, 김정원 몬시뇰을 만들어, 있게 한, 어머니, 김순옥 마리아 님은 한국천주교회의 가난한 성직자들 부모님들의 주보로 모실 수 있는 신앙인이었습니다. 지금 천상 성모님 곁에 계실, 작은 시골 본당 신부의 어머님, 김순옥 마리아님께서는 가난이 자갈처럼 깔린 지상 교회 가난한 교구의 작은 본당에서 사목하는 사제들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변신부 드림. 

입력 : 2017.10.29 오전 8: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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