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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소리

WIND BELL

8월15일, 성모승천대축일, 광복절, 대한민국 건국절에! National Thanks giving to US & US Forcese on the 15th of August in 1945 !

글 : Msgr. By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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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승천대축일, 광복절, 대한민국 건국절!
National Thanks giving to US people & US Forcese on the 15th of August 1n 1945 ! Korean people today, we too much ungrateful now ! Donot forget the US Forcese' so grateful brave victory overcoming the Japan that we could be liberated finally from the Japan !

8월 15일, 성모승천대축일, 해방기념일, 광복절, 대한민국 건국절에, 

너무나 많은 국민들이 감사할줄 모르고,너무나 배은망덕하지 않는가? 반성합시다 !

National Thanks giving to US people & to US Forcese for our final liberation from Japan by the 15 of August in 1945 ! Korean people today, we are too much ungrateful now !

8월 15일, 성모승천대축일입니다. 1945년, 73년 전 군국주의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므로써 잔혹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우리나라가 해방을 맞이하게 된 것은, 미국의 많은 젊은 용사들이 오끼나와를 비롯한 대일본 전투에서 목숨을 바치며 싸웠고, 특히, 아직 일본이 개발하지 못한 신무기 원자폭탄 폭격 때문에 뿐아니라, 전 세계 신도들의 애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천주께 간구해주신, 천상에 계신 그리스도의 어머니시며, 지상에 있는 교회의 어머니시고, 모든 신자들의 어머니이신 천상 성모 마리아께서 도와주셨기 때문입니다.

2천년 천주교회 역사에 무서운 전란의 종식이나, 거듭되는 흉년의 그침이나, 예방이나 치료가 불가능한 전염병이 물러가는 과정에서, 성모 마리아께 대한 신도들의 정성어린 기도나, 혹은 성모님의 축일에 이루어지고 전해지는 기쁜 소식은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종종 있어 왔읍니다.  특히 우리나라의 전란도 성모 마리아 축일이나 성모님 공경예식 행사를 계기로 이루어지기도 하였읍니다. 그러나 신도들은 충분히 감사드리지 않았읍니다. 금년 성모승천대축일에는, 민족의 해방과 조국의 광복, 국가의 건국을 기념하는 날로 특은을 받았으니, 감사를드립시다.

감사를 드립시다. 천상의 성모님께, 또 미국과 미군 용사들에게 감사할 줄 알아야 하겠읍니다. 우리의 해방과 조국광복이 우리 선조들의 항일투쟁만으로는 일본의 항복을 받기가 어려운 승리였읍니다. 1945년 8월 5일, 미군의 첫번째 원자탄 폭격으로 히로시마가 잿터미가 되자, 3일 후에서야 대일 선전 포고를 하고, 대일본 전투에 참전하기 시작한 소련의 공격으로 일본이 항복한 것은 분명 아닙니다.

항복과 후퇴를 모르는, 실로 무서운 군국주의 일본 군부는 소화천황의 육성 항복선언이 아니었다면, 원자탄 폭격을 받았어도, 결코 항복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일본 국민과 군인들 절대다수가 죽더라도, 지금까지도 항복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시 일본은 세계 인류 역사상 가장 무서운 국국주의 나라였읍니다. 왜정 말년, 우리가 어려서 겨우 대여섯 살밖에 안되던 시절, 시골 마을 골목길에서까지, 헝아들과 함께 부르던 노래가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을 정도입니다.[갖다서 닛뽄] (이겼다, 일본이), [단지데 갖다서] (또 이겼다 일본이), [메이헤이 이마꼬서] (미.영은 이제야말로),[돛찌 우리다] (아주 진 이겨서 죽을 만들자) !악하고 독하던  일부 일본의 잘못된 정치가들의 군국주의 사상이 마침내 항복한 것은  U.N.의 군사력,이나 무력으로만은 불가능한 일이었읍니다.

우리 모두 8월 15일, 성모승천 대축일을 맞아서, 해방 기념일겸  광복절과 건국절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겸손되히, 진솔하게, 천주님께, 성모님께, 그리고 미국과, 특히, 일본을 패망시키고, 대한을 해방시킨, 미군 전몰 장병 용사들의 영혼들에게, 그리고, 그 가족들과 후손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며, 복을 빌어 드립시다.  -Msgr. Byon

**********************참고문헌******************* 

    일본을 패배시키기 위하여, 오끼나와 전투에서 얼마나 많은 미국 병사들이 목숨을 바쳤는지 오늘의 한국이 몰라서는 절대로 안될 것이다. 만일 오끼나와에서의 미.일 양국군의 육해공군 아시아 최대의 전투에서, 만일 미군이 패배하고 일본이 승리하였다면, 8.15, 한민족 해방과 대한제국의 조국 광복과 대한민국의 건국은 없었을 것이다 ! 

 ***아시아 최대, 최악의, 美.日, 오끼나와 3 개월간의 전투***<1945년 4월~7 월>

                                                                       ***<각종 전투 자료와 전사 자료 참고>***

 맥아더 29 미국 해군해병이 주도한 오키나와 전투 2

오키나와 본섬 북부 전투

일본군 제32군은 본섬 남부를 주전투장으로 예상해, 북부에는 독립혼성 제44여단의 1개 대대 병력만 배치했는데 미군은 제6해병사단을 주력으로 공격을 가해, 422일 제압을 완료했다.

이 전투에서 6해병사단은 전사·실종 243, 부상 1061명의 손실을 입었다. 북부는 주민의 대피지역으로 지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약 8만 명으로 추정되는 주민이 피난 와 있다가 미군의 통제 하에 들어가자 상당수는 산중으로 도망쳐 남쪽으로 내려왔다.

416일 미군 제77보병사단은 본섬의 서북쪽 해상에 떠있는 이에지마[伊江島=혼부 반도에서 서북쪽 9km]에 비행장과 해상방공용 레이더를 설치하기 위해 상륙했다. 이 섬에는 일제 독립혼성 제44여단 예하 1개 대대 650명을 핵심으로 수비대 2,000(약 절반은 현지소집 특설부대원)이 배치되어 저항했지만 21일에 미군이 섬 전체를 점령했다.

미군에 따르면 일본 측은 민간인 다수를 포함하여 4,706명이 전투에서 사망​​하고 3명이 포로가 되었다. 미군은 218명이 전사 또는 실종되고 902명이 부상당했으며, 중형 전차 60량과 자주포 6량 중 5량을 잃었다고 한다. 미군의 전사자 중에는 1944년 퓰리처상을 수상한 종군기자 Ernest T. Pyle[1900-1945.4.18.]도 포함되어 있었다. 기자의 투철한 직업정신을 보여주는 끔찍한 장면이었다.

[투철한 전문직업정신으로 오키나와 전투에 종군했다가 전사한 Pyle 사진]

일본군이 이 섬에 보유하고 있던 육군비행장은 3월 중에 철저하게 파괴했기 때문에 미군은 신속히 복구해 510일 최초의 전투기부대를 이 비행장에 진출시켰다.

오키나와 본섬 남부 전투

일제 제32군은 슈리[首里]성 지하에 둔 사령부를 중심으로 오키나와 본섬 남부를 지키는 지구전술을 폈기 때문에 미군의 오키나와 상륙전투 대부분은 남부공략에 소비되었다. 그 때문에 남부에서 전투를 전··후기 3기로 나눈다.

1. 오키나와 본섬 남부 전투 전기; 가카즈[嘉数]고지 함락까지

미군은 슈리의 사령부를 목표로 남진했지만, 45일에는 보병 1개 중대 겨우 150명이 전초기지의 지하진지를 활용하여 미군의 공격을 7-8회 저지해 미군은 지하진지에 각종 폭약과 수류탄까지 모든 폭탄을 사용하며 공격해, 46일 고지를 차지했다.

미군은 그 후, 모든 전선에 걸쳐 진격을 시작했지만, 47일에는 일본군의 완강한 진지전에 저지되어 진격을 멈췄다. 7보병사단은 탱크 10, 장갑차 5대로 공격했지만 일본군은 대전차지뢰와 포장폭탄으로 탱크 3대를 순식간에 격파하고, 미군보병을 포격과 기관총 소사로 후퇴시키고, 보병과 분리된 탱크를 육탄공격으로 부서뜨렸다.

96사단이 공격한 가카즈[嘉数/가수]고지는 지형요인과 함께 일본군의 가장 견고한 진지이기 때문에, 미군은 엄청난 출혈을 강요당했다. 일본군 제62사단은 이 진지를 제1선 진지로 최대한 활용하고 제24사단이 제2선 진지를 방어하며 격렬히 저항했다. 특히 48-12일에 가카즈 고지 일대를 공격한 미 육군 제96사단과 7사단은 총 2,880명의 사상자를 냈지만, 일본군의 방어선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43일 전황보고를 받으면서 천황(대원수)이 우메츠[梅津]육군참모총장에게 오키나와 주둔 일본군이 공격하지 않는 이유를 물었다. 우메츠 총장은 상황을 설명했지만, 32군에게 미군에 빼앗긴 북부와 중부 비행장의 탈환을 명령했고, 연합함대도 비행장 탈환에 나섰다. 여기서 보듯이 태평양전쟁의 최고 전범은 쇼와 천황임에도 그는 끝내 처단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제국주의의 본질이다.

32군 우시지마 사령관은 북·중 비행장 방면으로 출격을 결정하고 48일과 12일에 야습을 실시했지만 많은 전사자만 냈을 뿐이다. 일본군의 야습 후에도 미군은 맹렬한 공격을 반복했다. 특히 419일에 미군 제96·27사단 등 3개 사단이 총공격에 나섰지만 일본군의 치열한 저항을 받았다. 미군은 제27사단의 M4 탱크 30대 중 22대가 파손되었고, 24군단 전체로 720명의 사상자를 내고 후퇴했다.

그 후 육상전투는 교착상태가 계속되었고 미 해군은 함포사격을 포함한 폭격으로 지원했지만 일본군은 진지에 틀어박힌 채, 진지전투로 미군 사상자가 많았다. 32군은 423일에 전선을 정리하면서 일부부대의 철수와 진지를 변환했다. 19~23일의 격전에서 제32군이 전사 2,490, 부상 2,665명이 발생했다. 미군은 겨우 슈리 방어선 외곽을 돌파하였으나 일본 제32군은 예비 병력인 제24사단과 독립혼성 제44여단 주력을 투입하고 후퇴했던 제62사단과 함께 새로 방어선을 재구축했다.

미국 육해군의 불협화음

미국 육군이 가카즈 고지에서 고전하고 있는 동안, 미국 해군장병은 일본군의 치열한 특공에 노출되어, 41일부터 23일 사이에 60척의 함정이 격침 파괴되고, 전사 1,100, 부상 2,000 이상에 달했다.

​[일본군 가미카제 자살특공대와 교전하며 지상전투병력을 오키나와에 상륙시키는 제5함대 해군 함정들]

태평양함대 니미츠 사령관은 육군의 진격 속도가 너무 느림이 불만이었다. 니미츠 해군원수는 육군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해군을 희생시키고 있다고 생각하고 상륙 현장 전투지휘에 함구하겠다는 방침을 바꾸었다. 육군 제10군 사령관 버크너 중장의 작전 지휘에 개입하기 위해 422일에 Alexander A. Vandegrift[1887-1973. 해병대장. 과달카날 전투에서 제1해병사단을 지휘한 공적으로 대장으로 승진]해병대 총사령관을 대동하고 자신이 오키나와로 향했다. 버크너는 신중하게 작전을 수행했지만 해군과 해병대보다는 적극성이 부족하다는 평가에 불만이었고, 평상시에는 온화한 니미츠 해군원수도 회담 중에 버크너의 자세에 격앙해 다른 사람을 군사령관으로 교체하여 전투를 진행하겠다. 그러면 해군은 일제의 지독한 가미카제 공격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고 힐난했다.

이 때 니미츠와 반데그리프트의 구상은 완강한 일본군 방어선 배후에, 사이판에서 대기 중인 제2해병사단의 잔존부대를 상륙시켜 방어선의 배후를 찌르는 것이어서, 레이테 섬 전투의 Ormoc 상륙작전 성공을 재현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버크너는 보급문제 등을 우려하여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버크너는 1943년에 사령관으로 아투 전투(Battle of Attu=1943..5.12. 보르네오 섬 코타키나발루 부근에 있는 섬) 상륙전투에서 일본 육군대령이 지휘하는 수비대와 17일간 전투 끝에 전원이 옥쇄하게 압도적 물량을 투입한 정공법을 성공시켰던 것처럼 오키나와 전투에서도 정공법을 관철하려고 의도했다. 하지만 전장(戰場)은 확연히 달랐다. 오키나와 전에서는 해군이 특공대 중심의 일본군 공습으로 큰 피해를 입고 있었고, 육군도 일본군의 치열한 저항에 의해 쉽게 진격하지 못했다.

2. 오키나와 본섬남부 전투 중기 ; 일본군총공격 실패·슈리방위선 붕괴까지

일제 제32군은 야습 실패 이후에 지구전술을 통해 미군에 대규모 피해를 주고 진격을 지체시켜 왔지만, 인명 손실이 늘고 주된 진지도 점차 압박을 받았다.

429일에 초 이사무[長勇. 1895-1945.6.23. 육군중장. 동굴 진지에서 우시지마 사령관과 함께 자결]참모장은 계속되는 전력 소모 대신에 반전 공세를 취할 것을 주장했고, 야하라 히로미치[八原博通. 1902-1981] 대령은 공세를 취하면 전멸될 것이므로 지구전을 견지해야 한다.‘, '방어진지를 버리고 공세로 돌아서도 압도적으로 화력이 우세한 미군을 격퇴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실패하면 전략적 지구전마저 불가능하므로, 본토공격까지의 지연일수가 짧아질 것이라고 강하게 반대했지만, 다른 참모들은 초[] 참모장을 지지했다. 우시지마 사령관도 중앙에서의 독전(督戰) 요구도 있어, 초 참모장 등의 공세의견을 받아들여 이날 총공격을 결정했다.

54·5일에, 일본군은 포병대가 포격을 시작하고 제24사단과 탱크 제27연대 등을 투입하여 후텐마[普天間] 부근까지 전선을 회복했다. 일본군은 하룻밤에 5,000발이라는 전례 없는 포격을 가하면서 주정으로 해상을 우회하여 역 상륙을 시도했고 항공총공격도 실시했다.

미군은 일시 혼란에 빠졌지만, 총공격해 온 일본군을 반격해 대포, 경전차 등을 대부분 파괴하여 큰 타격을 입혔다. 일본군이 유기한 사체는 6,237명에 달했고, 미군도 사상자 714명이 발생했다. 이 피해는 일본군의 공세 정면에서 벗어난 지역에서 공격 중이던 제1해병사단이 54하루만에 352명의 사상자를 낸 것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가벼운 것이었다.

​[미국 함정으로 돌진하기 위해 대기 중인 가미카제 특공대원들. 대개 2명이 탑승하여 자살로 삶을 끝낸다. 조선사람도 있었다.]

한편 총공격을 하늘에서 엄호했던 일제 특공은 영국 항공모함 1[Formidable; R67]의 비행갑판에 돌진해 길이 3m, 깊이 60cm의 구멍을 낼 만큼 파괴했다. 또한, 미국 구축함 2, 중형 상륙함[LSM] 2척을 격침하고, 호위항공모함 1, 경순양함 1척이 대파하는 등 17척을 격침 또는 파손시켜 682명의 사상자를 냈다.

[[일본 가미가제(神風) 자살특공대의 폭격으로 갑판상에 큰 구멍이 난 영국항공모함 Formidable(R-70]   

슈리 방어선의 붕괴

일제 32군 정예부대의 총공격 실패로 Simon B. Buckner, Jr.[1886-1945.6.18. 최종계급 대장. 당시 중장.]사령관은 5월이 슈리를 총공격할 호기라고 판단했다. 6해병사단 중심의 제3수륙양용군단은 섬 북부의 소탕임무를 제10군 직할 제27보병사단과 교대하고, 511일까지 남쪽으로 전진했다. 이에 따라 미군은 서쪽부터 우익을 제3수륙양용군단의 제6해병·1해병사단이, 좌익을 육군 제77·96사단을 병렬하고 제7사단을 예비대로 둔 태세로 슈리 성에 있는 일본군 제32군 사령부를 포위, 섬멸하는 총공격을 개시했다.

[미국항공모함 USS Bunker Hill(CV-17)가  2개 특공기의 돌격을 받은 직후의 갑판 모습. 1945년 5월 11일] 

6해병사단은 511일에 일본군의 치열한 저항을 받으면서도 슈리 성 서쪽까지 진출했지만, 일본군 진지인 3개의 고지 앞에서 진격을 멈추었다. 3고지 중에서 슈거로프(Sugar Loaf=참호 반대쪽 경사면)를 정점으로 하고, 다른 두 언덕을 저변으로 하는 삼각형을 구성하고, 침공군이 정점을 향해 진격하게 해, 3개 고지가 서로 보완하는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했다. 슈거로프 일대는 반대사면 진지를 축으로 견고한 진지를 지키는 일본군의 독립혼성 제44여단 예하부대와 제6해병사단이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는 해병대 사상 최대의 격전지가 되었다. 특히 Sugar loaf를 방어하던 일제 독립혼성 제44여단은 8문의 105mm 야포와 4문의 75mm 산포를 갖추고 미군에 엄청난 출혈을 강요했고, 그 밖에 다수의 속사포(대전차포), 박격포와 유탄발사기 등으로 미군의 진격을 저지했다. 격렬한 포격과 사격 때문에 해병대는 고지 가까이 접근할 수 없었고, 탱크도 잇달아 격파됐다. 질량 모두에서 압도적인 미군을 상대로 Sugar Loaf10일 간이나 발을 묶는 일본군의 전술은 전후에 제6해병사단의 교본으로 교과서대로의 진지방어전술이라고 칭찬했다.

[Okinawa Sugar Loaf]

[현재의 Palau공화국 큰 섬 북부에 남아있는 참호반대경사면 진지/Sugar Loaf의 원형]

이 전투에서만 미군이 치른 대가는 사상자가 2,622명에, 신경증 환자가 1,289명에 달했다. 특히 장교의 사상률이 높아 3명의 대대장이 전사, 11명의 중대장이 사상하는 등 사상자 비율은 70%에 달했다.

6해병사단의 인근을 진격하고 있던 제1해병사단도 종심 방어의 정교하고 단단한 진지로 구축된 마을에서 고전을 겪었다. 1해병사단은 56일에 한 고지(일본군 호칭 : 50미터 폐쇄곡선고지)에 도달했지만, 일본군이 진지에서 3대의 탱크를 격파하는 등으로 2회나 밀리다가 9일에 진지를 폭파하고 고지를 제압했다.

1해병사단은 514일 다이묘[大名] 고지에 도달했지만, 이 고지와 그에 인접한 고지는 슈리 직전에 위치한 슈리 방어선의 핵심이어서 그 견고함은 지금까지와 비교가 되지 않았다. 17일부터 다이묘 고지에 대한 공격을 시작한 미군은 함포와 폭격부터 야포·박격포·전차에 의한 화염방사에 이르기까지 모든 화기를 집중하여 일본군 진지를 공격했으나 일본군으로부터의 응사도 굉장했다.

20일 제1해병사단은 2개 대대로 다시 다이묘 고지를 공격해 진지 하나하나를 격파하면서 진격, 네이팜으로 고지를 불태우고 진지를 소탕하면서 하루에 겨우 60m 진군한 후, 구릉을 25m 전진하면 일본군의 맹렬한 반격으로 다시 원래의 진지에 되돌아가야 했다.

​[현재 복원된 슈리성 오른쪽 출입구인 봉신문 奉神門 앞에서]

521일부터 오키나와에 10일 동안 비가 내렸다. 땅은 진창이 되어서 미군 차량의 운용이 어려워졌기 때문에 다이묘 고지를 포함해 미군의 공격은 한때 주춤했다.

육군 각 사단의 진격로에도 종심방어시스템이 구축되어 있어서, 육군도 해병대처럼 고전을 면치 못했다. 77사단은 슈리로 이어지는 구불구불한 길을 전진했지만 몇 미터 간격으로 일본군의 진지가 있어서 511~15일 사이에 전력이 1/4로 줄어들어 버렸다.

미군은 일반적으로 아침에 진격하여 오후부터 진지를 구축하고, 야간에는 진지에서 버티는 일본군의 야습을 경계하는 일정이었지만, 77사단은 조금이라도 전진속도를 높이기 위해 야간공격을 감행, 일본군과 치열한 백병전을 벌였다. 예하 제307보병연대는 일본군의 중요거점인 구릉의 진지를 야습, 정상의 일본군 동굴진지를 공격해 취침중인 일본군 다수를 살상했지만, 그 후 일본군의 치열한 반격을 받고 3일간 정상에 고립된 후에 구출되었을 때 야간공격에 참가한 204명 중 156명이 사상했.

구릉 안의 가장 견고한 진지[Mt. Choco-Drop=서부 130고지)를 공격한 미군 제77사단 제306보병연대는 격렬한 공격으로 사상자가 471에 달해 제307보병연대와 교대되었다. 일본군은 그 후에도 미군을 여러 번 격퇴했지만 동굴 봉쇄로 인해 제압됐다.

[후에 38선 이남 한반도를 점령하고 군정장관이 된 J. R. Hodge 중장의 강시 모습 ; pulic domain]  

​[맨오른쪽 키가 큰 사람이 Oregon 사단으로 불리는 미국육군 96사단장 Bradley소장, 오레곤 캠프에서 찍은 기념사진; public Domain]  

최초로 슈리 전선의 돌파구를 연 것은 가장 나중에 진격한 육군 제96사단이었다. 24군단장 John R. Hodge[1893-1963. 맥아더 사령부 남한 군정장관 역임] 중장은 슈리에 제일 가까운 고지를 공격해 단번에 슈리에 접근하는 작전을 주장했지만, 96사단[별칭 Oregon사단] 사단장 James L. Bradley[1891-1957. 딸네 집에서 익사]소장은 지형을 정찰한 후에 그보다 높은 Konical Hill(운타마모리運玉森)을 먼저 공략하는 것이 좋다는 의견이었다.

[운
타마모리 運玉森 사진 ; 사진은 public domain]

Bradley 사단장 의견대로 함포사격 후인 510일에 제96사단 제383보병연대가 Konical Hill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지만, 일제 24사단 보병89연대가 주력으로 포진한 진지는 폭격으로도 파괴할 수 없었다. 383연대가 전진하면 일본군이 격렬한 포격을 퍼부어 전진할 수 없었지만 513383연대가 Konical Hill 정상을 바라 볼 수 있는 지점까지 진격에 성공했다.

미군은 일본군의 슈리 방어선을 돌파해, 519일 슈리 성의 일본군 사령부를 함락시켰지만 피해는 심대했다. 2개월 미만의 슈리 전선 전투에서 24군단과 제3수륙양용군단의 사상자는 총 26,044명이었고, 전투 스트레스반응에 의한 부상병도 해병대 6,315, 육군 7,762명에 이르렀다. 탱크도 육군만(해병대의 손해는 사료 없음) 221대가 격파되었다. 이것은 오키나와 전투에 투입된 미군 탱크의 57%에 달하며, 또한 그 속에는 보충할 수 없었던 화염방사탱크도 12대나 포함되어 있었다.

3. 오키나와 본섬 남부의 전투 후기; 슈리함락과 일제 32군 철수

일제 제32군은 미군이 Konical Hill[운타마모리運玉森 방면] 공략을 달성하면 단번에 슈리 방어선이 붕괴할 것으로 우려해, 521일에 참모회의를 열고 여러 방안의 이해득실을 협의했다.

첫째, 슈리 진지에서 버티면서 최후의 결전을 하는 방안 ; 군의 원안으로 각 진지가 이 방안으로 정비되어 있지만 생존 장병은 아직 50,000명으로 추정되고 이 병사를 슈리 진지에 배치하면 미군 폭격의 좋은 먹이가 되어 버린다.

둘째, 치넨[知念]반도[본섬 동남쪽]로의 철수방안; 이 반도는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여 탱크를 상대로 한 전투에는 유리하지만 동굴의 수가 적어 잔존 병력을 수용하기 어렵고 집적한 물자도 적다.

셋째, 키얀[喜屋武]반도[본섬 서남쪽]로의 철수방안; 바다 정면이 30~40m의 절벽이어서 방어 지역으로는 양호하며 자연·인공 동굴이 풍부해 잔존병력의 수용도 가능하고, 24사단의 군수품이 집적되어 있다.

62사단장 후지오카 다케오[藤岡武雄. 1891-1945.6.22. 자결] 중장 등은 슈리 결전 방안을 주장했지만, 522일 우시지마 군사령관은 오랫동안 오키나와에 미군의 발을 묶어두기 위해, 지형이 견고한 키얀 반도로 철수하여 지구전을 계속하기로 결심하고, 군 주력의 후퇴를 29일로 예정, 그 전에 군수품과 부상병의 후송하도록 지시했다.

미군의 진격은 5월말부터 내린 폭우로 일시 주춤하고 있었지만, 523일 제96사단이 Konical Hill을 제압하자, 7사단 2개 연대가 슈리 성을 포위하기 위해 전진했다. 일본군은 패잔병이 많은 두 연대를 몇 번이나 공격했으나 완전히 저지할 수 없었다. 이 병력이 슈리와 오키나와 남부를 연결하는 간선도로에 인접한 고지대에 도달하면 일본군 잔존 포병 전력이 격렬히 포격하고 일제 제24사단 보병연대가 이를 격퇴했지만 병력에 한계가 있었다. 24일에는 미 제6해병사단의 수색대가 나하[那覇]에 진출해 이미 폭격으로 폐허가 된 나하를 접수했다.

[슈리성에서 내려다 보는 오늘날의 나하 시내]

Konical Hill을 완전히 제압한 제96사단과 Sugar Loaf와 허니문을 돌파한 해병대가 슈리를 완전히 포위하고 있던 5월 26일 미 해군 정찰기가 일본군의 대규모 이동을 발견했다. 미군은 일본군의 의도를 짐작하고 철저한 추격으로 이동 중인 일본군 45,000명에 함포·공습·포격으로 철저히 공격했지만 완전히 철수를 예측하지 않았고, 효과적인 추격을 못한 것, 5월 말부터 내리기 시작한 폭우 등으로 제32군의 철수를 완전히 저지할 수 없었다. 슈리를 포위하고 있던 제24군과 제3수륙양용군단의 옆을 빠져 나가 철수한 것이어서 손해는 컸지만 일제 제32군 30,000명은 기적적인 이동으로 남부에 새로운 진지를 만들고 방어선을 구축했다.

우도시마 사령관 등 제32군 수뇌는 5월 27일 호우와 야음을 틈타, 도보로 슈리에서 철수하여 섬 남부에 있는 하에바루초[南風原町]의 벙커로 향했고 30일 새벽에는 새로운 사령부를 설치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슈리성 안내표지]

[오늘날의 슈리성. 이 성 아래 수많은 동굴 안에서는 일제가 본토 결전을 늦추는 최후의 전투를 벌였던 곳]

얼마 안가 소수의 수비대가 남은 슈리 진지가 미군의 손에 떨어졌지만 미군의 함포 사격 등으로 사방이 파괴되고 일본병사 시체가 흩어져 있었다. 그 광경을 본 버크너사령관은 ‘이제 전투가 끝나고 다음부터는 소탕전이다.(중략) 적은 다시 전선을 구축할 수 없다‘고, 낙관적인 의견을 제시했다. 참모들도 일본군이 질서 있게 철수했을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일본군이 남부에 새로운 진지를 구축한 것은 나중에야 알았다. 그래서 미군은 일본군의 조직적인 저항을 완전히 제압하기 위해 그 후 3주 동안 더 전투를 해야 했다.

일본군의 남부 철수 시에는 많은 혼란도 일어났다. 오키나와 방면 일본해군부대는 주로 비행장 설치대 등을 육전대로 재편한 것으로 전투부대가 적고, 항공기관포를 육전용으로 개조하는 등 장비도 열악했다. 비교적 전투력이 있는 4개 대대를 육군의 지휘 하로 넘겨 슈리 전선에 보냈기 때문에 해군부대는 오로쿠[小祿]지역에 틀어박혀 항전을 계속했다. 항전 중에도 일제 해군은 접근한 미군 구축함 'Longshaw[DD-559]'를 비롯해, 소해함과 유조선을 해안포로 포격해 침몰시켰다. 하지만 5월 26일 전보독해과정에서의 오해로 인한 일단 철수 때, 잔존중화기를 파괴했고 병력도 2,000명에 불과했다.

6월 4일 진격 속도를 높인 미군은 오키나와 해군근거지대(사령관 오다미노루[大田實. 1891-1945.6.13. 자결. 당시 소장. 일본해군 육전의 권위자. 중장으로 추서)가 수비하고 있는 오로쿠 해군비행장까지 진격해왔다. 그래도 오다 소장은 사수를 결의하고 6월 5일에 제32군사령부에 대해 ‘해군은 포위당해 철수불능상태이기 때문에 오로쿠 지역에서 끝까지 싸울 것’이라고 타전했다. 우시지마중장은 오다 소장에게 남부로 후퇴할 것을 간곡히 부탁하는 명령을 내렸지만 오다 소장은 결의를 번복하지 않았다. 오다 소장은 6월 6일 각처에 결별의 전보를 타전하고, 특히 해군차관 앞으로 ‘오키나와 전투에서 천황 폐하가 현민에 대해 특별한 배려를 해 달라’는 전보를 남겼다.

[오타 미노루 소장이 자결한 구 해군사령부 동굴입구. 계단을 내려가면 자결현장이 있다.]

오로쿠를 공격한 미 제6해병사단은 일본해군부대가 진지를 사수하는 격렬한 저항에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 오로쿠 전투는 6월 10일에도 이어져, 미군 사상자는 2,608명에 달했다. 6 월11일에는 미군 2개 연대가 해군부대의 진지를 포위했다.

오다 소장은 6월 11일 우시지마 사령관 앞으로 ‘적의 탱크들이 우리 사령부 동굴을 공격 중이며, 근거지대는 6월 11일 2,330명이 옥쇄하지만 지금까지 후의에 감사를 드리며 귀군의 건투를 기원한다.’고 타전한 후 13일에 부하 참모 5명과 함께 자결했다. 또한 오로쿠에서는 6월 12일과 13일에 오키나와 전투에서 처음으로 159명의 일본 군인이 집단으로 투항해 포로가 되었다.

오키나와 전투에서의 자살특공대

오키나와 전투에는 일본 육해군 합계 총 1,900대의 특공기가 투입되었다. 미국 해군은 4월 23일에 태평양함대사령관 니미츠 원수가 제10군 사령관 버크너 중장에게 일본 특공 대책에 대비한 진격을 독려한 이후에도 일본군 특공에 시달렸다.

제5함대 사령관 Spruance 중장은 산하 함대의 지나친 특공피해로 '특공기의 기량과 효과가 엄청나, 함정의 손실과 피해의 비율이 매우 높기 때문에 이를 막기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채택해야 한다. 제20공군(미국육군항공대)을 포함하여 투입가능한 모든 항공기로, 규슈와 오키나와 비행장에 대해 모든 공격을 추가해 달라'고 해군상층부에 절실한 전황보고와 의견을 상신했다. 스프루언스의 상관인 니미츠 사령관도 워싱턴의 해군상층부에 ‘이제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다'고 타전했다.

전선에서 고전의 보고를 받은 해군장관 James V. Forrestal[1892-1949. 우울증으로 자살]은 기자회견에서 해군의 사상자가 4,702명이라고 밝혀 ‘해군이 상륙작전을 지속적으로 지원하기는 어려운 일이며 너무 비싼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을 미국 국민여러분께서 이해해 주기 바란다.’고 호소했다. 이 회견이 있은 후, 버크너 중장은 슈리 방어선을 공격하는 각 군단장에게 진격속도의 가속을 지시했다.
[1945년 4월 12일 일제 가미카제 특공의 자살폭격으로 화염에 휩싸인 미국전함 Idho(BB-42) ; public domain]

[1945년3월18일과 4월 16일 가미카제의 자살특공으로 불타는 항공모함 Intrepid(CV-11)과 적으로부터 보호감시하고 있는 구축함]

 전선이 붕락위기를 맞자, 대본영은 더 많은 특공대를 보냈다. 5월 11일에 제58임무부대의 기함인 항공모함 'Bunker Hill[CV-17. 마리아나 해전과 레이터 해전 등에 참가]‘이 2대의 특공을 받아 대파, 396명의 전사자와 264명의 부상자가 발생해 전선 이탈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 항공모함은 나중에 미국본토의 Puget Sound 해군조선소에서 수리를 받았는데, 그들이 본 사상 최악의 피해였다고 한다. 다음날인 5월 12일 기함이 ‘엔터프라이즈Enterprise'로 변경되었지만, ‘엔터프라이즈’에도 특공기가 명중하여 대파, 이틀 계속해서 미국함대의 기함이 위기에 처했다.

대본영은 이어 제공권 확보를 위해 육군공수부대에서 추출한 Commando부대[義烈空挺隊/의열공정대]를 미군이 장악하고 있는 비행장에 강행 착륙시켜 파괴활동을 벌였다. 구마모토에서 12대의 중폭격기가 출격, 그 중 1대가 북쪽 비행장(読谷비행장) 착륙에 성공해, 탑승하고 있던 대원과 승무원이 총33대의 미군 전투기·폭격기·수송기를 완파하거나 큰 피해를 입혔다. 여기서 미군 20명을 살상하고 7만 갤런의 항공유도 폭파 소실시키는 등, 비행장 기능에 타격을 입어 이틀 동안 비행장을 사용할 수 없게 했다.

미국해군 전사에는 오키나와 전투에서 해군이 특공으로 입은 손해가 막대하여, 대전 전 기간을 통해 가장 값비싼 해군작전이라고 쓰고 있다. 일본 특공대가 충분한 훈련도 받지 않은 조종사로 구식기계를 조종하면서도 집단특공공격으로 수상함정에 매우 큰 위험이 되었음을 오키나와 전투가 증명했다. 어떤 무기보다도 정신을 가진 사람이 무서운 것이다.

미일 양군 사령관의 전사와 자결

5월 25일, 오키나와 방면에서 항공작전을 해온 일제 육군 제6항공군은 연합함대의 지휘를 벗어나고 6월 9일부터 군수물자 투하 등의 지원만 맡게 되었다. 육군기는 섬 최남단인 갼[喜屋武]기지에서 매일 같이 한 대 이상이 일본 제32군에 탱크분쇄용 폭뢰 자재와 15센티 유탄포 포탄 등을 투하했다.

6월 5일, 미 제24군단이 일본군 남부방어선을 공격해 왔다. 이를 맞서는 일본군은 3만 명 이상이었지만 정규의 보병은 그 중 11,000명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화포를 잃은 포병이나 통신·정비·설영대 등의 지원부대와 오키나와 현지소집 방어대 등이었다.

일본군은 전력이 부족하면서도 방어선 곳곳에서 미군을 몇 번이나 격퇴했다. 섬 남부의 야에세다케[八重瀬岳. 높이 183미터]을 수비하는 독립혼성 제44여단은 6월 12일까지 미군 2개 사단의 3일간 발을 묶었고 13일에 총공격을 받아 주력은 괴멸했지만, 주변의 동굴에는 많은 잔존병력이 있어, 소탕전이 계속되었다.

​[결사항전에 나섰다가 포로로 잡힌 나이어린 소년병들. 초등 저학년이 아닐까? 사진은 public Domain]

서쪽 최남단 구니요시[国吉]에서는 보병 제32연대 약 1,500명 전후의 수비대와 제22연대 잔존병력이 미 해병대를 상대로 17일까지 구릉 지역을 사수하였다. 언덕 위로부터 치열한 사격을 받아 미 해병대에 사상자가 속출해, 13일에는 퇴각했다. 탱크 없이는 한 걸음도 더 나갈 수 없는 곳이었지만 일본군은 속사포로 5일 동안 미군 탱크 21대를 격파했다. 하지만 미군은 전차 1대에 보병 6명과 탄약을 쌓아 전선에 보내는 한편, 귀로에 사상자를 싣고 돌아오는 격전을 계속한 결과, 17일에는 일본 보병 제22연대의 사령부 진지를 폭파하여 연대장이 전사하고, 잔존병력은 대대장 이하 전원이 돌격으로 전멸, 5일 만에 구릉을 제압했다. 그동안 미군의 사상자는 1,050명, 그 중에는 일본군의 저격으로 전사한 제22해병 연대장 Harold Roberts 대령도 포함되었다.

미군은 일본군과 주민들에게 삐라 800만장을 뿌리고 투항을 촉구했다. 버크너 사령관 스스로도 우시지마 사령관 앞으로 보낸 친서에서 항복을 권고했지만, 6월 17일 우시지마는 거절했다. 다음날인 6월 18일, 버크너는 갼[喜屋武]반도의 최전선 시찰 중에 일본 육군의 야전 중포병 제1연대 제2대대의 곡사포 포격을 받아 전사하여 현재까지 미군전사 상 최상위 계급으로 전사한 유일한 사례이다. 이어, 6월 19일에는 제96사단 부사단장 겸 325연대장 Cladius M. Easley[1891-1945]준장이 일본군의 저격에 의해 전사하였다. 일본군은 적군부대 장성급 최고지휘관을 포함해 2명의 장군을 전사시켰지만 불리한 전세를 만회할 수는 없었다.

미국 제10군의 지휘는 급히 미국 해병대 제3수륙양용부대 사령관인 Roy S. Geiger[1885-1947. 최종계급 해병대장]중장이 사령관을 맡았다가 5일 후인 6월 23일 본국에서 육군지상군Army Ground Forces사령관으로 근무 중이던 Joseph W. Stilwell[1883-1946. 위암으로 사망]대장에게 인계했다. 스틸웰 장군은 일본군의 장개석 원조 루트 차단에 맞서 영국군 총사령관의 명령을 받는 미군의용군 사령관으로 버마 북부와 중국 운남성 일대에서 전투를 지휘했으나 장개석과의 불화로 본국에 소환되었던 강직한 미군 장성이었다.

일본군의 전선붕괴는 점차 진행되어, 본섬 남부 지역을 수비하고 있던 주력인 일본군 제24사단도 6월 17일에는 조직적인 저항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고 기아와 질병으로 하루 4천명의 병사가 죽어나갔다. 조직붕괴도 시작하여 지금까지 거의 볼 수 없었던 집단투항도 많아졌다. 6월 20일에 마부니다케[摩文仁岳] 동쪽 가장자리를 점령한 미군 제32보병연대가 977명이나 되는 일본군 장병을 포로로 했다.

스틸웰 군 사령관이 현지에 부임하던 6월 23일 오전 4시경(6월 20일, 6월 22일 설도 있다) 일본의 오키나와 수비군 최고지휘관인 제32군 사령관 우시지마[牛島満]중장과 참모장 초[長] 중장이 마부니[摩文仁]의 군사령부에서 자결해 오키나와 수비군의 지휘계통은 완전히 무너졌다. 24일경에는 핵심부대인 보병 제22·제89연대가 군기를 불태우며 옥쇄(전멸)했고, 대본영도 6월 25일에 오키나와에서 조직적인 전투의 종료를 발표했다.

그 후의 작은 전투

조직적 전투는 끝났지만 일제 잔존병력은 본섬 각지에서 산발적인 전투를 이어갔다. 이 지휘계통 없는 전투의 계속으로 민간인을 포함한 사망자 수를 증가되었다.

일본군 제24사단 예하의 보병 제32연대 휘하의 2개 대대 병력 등이 종전 때까지 생존하고 있었다. 연대장을 비롯한 이 부대의 생존 장병들이 미군에 투항한 것은 일본정부가 8월 29일이었다. 제32연대는 8월 22일에 미군과 접촉하고, 23일에 군기를 불태웠다. 오키나와 수비군의 최종적인 항복은 9월 7일 가데나[嘉手納]에서 행해졌다. 제32군 사령부 고급참모 야하라[八原]대령은 포로가 되었고 대부분의 참모들은 전사했다.

육군 제8비행사단 예하 비행전대의 정찰비행도 8월까지 계속하였다. 항복할 때까지도 일본해군의 특공공격은 계속되었다. 특공기가 7월 28일에는 미국 구축함 ‘Callaghan[DD-792]’을 침몰시켰다. 8월 12일에는 함재기가 야간 통상공격으로 전함 ‘Pennsylvania(BB-38)’에 손상을 입혔다[전사 20명, 부상 10명]. 8월 15일 천황의 항복방송이 있은 후에도 그것이 정전 명령은 아니라면서, 우가키 마도메[宇垣纏=1890-1945]해군중장은 오이타(大分)에 있는 해군 특공기지에서 11대 23명으로 된 특공대를 출격시키면서 스스로도 부하가 조종하는 2명 정원의 특공기에 3명이 함께 타고 중장 계급장을 단 정복을 착용한 채, 오키나와 방면으로 출격에 나서 마지막 자살특공을 마쳤다[특공기 3대와 5명은 불시착으로 살아남았고, 18명은 사망].

또한 일제 해군 잠수함은 7월 24일에 오키나와에서 필리핀으로 항해중인 호위구축함 'Underhill[DE-682]'을 격침했고, 또한 7월 29일에는 Tinian 섬에서 필리핀으로 항해 중인 중순양함 'Indianapolis[CA-35. 이전에 미국 본토에서 Tinian섬까지 원자탄을 수송하고 돌아가던 중]'를 격침했다.

종전 후의 상황

한편 오키나와공략작전(빙산Iceberg 작전)에 앞서 1945년 3월 26일 니미츠 원수는 오키나와에 통칭 '니미츠 포고'라는 미국해군군정 포고 제1호를 내렸다. 이 포고는 북위 30도 이남의 오키나와와 가고시마 현 아마미오시마[奄美大島. 면적 712km². 제주도의 절반/거제도의 2배 넓이] 일대의 일본 행정권·사법권을 정지하고 스스로를 미국태평양함대와 태평양지역사령관 겸 미국군 점령 하의 서남제도 및 그 근해의 군정청총장·미국해군사령관 시 더블류 니미츠라고 칭하면서 이 지역의 정치와 관할권 및 최고행정책임자임을 선언했다. 이 포고는 1972년 오키나와 반환 때까지 효력이 있어, 지금도 오키나와의 미군기지 문제에 영향을 주고 있다.

전투가 끝나면서 일제의 오키나와 수비군이 수비하던 오키나와 현 등은 미군 점령 하에 들어가 니미츠 사령관이 류큐열도 미국 군정부의 최고위직인 군정총독(Military Governor)은 ‘니미츠 포고’대로 군정을 맡았다. 그 아래에 군정장관(Chief Military Government Officer)은 Richmond K. Turner[1885-1961 최종계급 대장. 솔로몬 군도에서부터 오키나와에 이르는 각 전선에서 주로 상륙작전을 지휘한 수륙양용작전 전문가]해군중장을 두어 미국해군이 군정을 실시했다.

[현재 나하에 있는 오키나와 현청 청사]

1945년 9월 21일부터 10월 16일까지 군정장관은 신임 제10군 사령관인 Stilwell 육군대장이 맡았지만 실질적으로 해군이 군정을 실시했다. 1946년 7월 1일에 Wilhelm D. Styer(1893-1975)육군중장이 군정장관을 맡고부터 실질적으로도 미국육군이 운영하는 오키나와 민정부[Okinawa Civil Administraion/OCA]로 이관되었다가 1950년 12월부터 1952년 4월까지 ‘류큐열도 미국민정부[U. S. Civil Administration of the Ryukyu Islands/USCAR]’로 개편되어 류큐 열도 일대의 통치기관이 되었다. 류큐열도 미국군정부는 태평양 방면군(후에 극동군으로 개편)의 하급기관이었다. 또한 직접의 주민통제에 해당하는 기관으로 오키나와자문위원회(沖縄諮詢会/충승자순회. 후에 오키나와 민정부와 오키나와의회·오키나와 민정의회로 개편)가 설치되고 사법기관으로 형사에 관한 특정군사법원이 설치되었다.

이 군정부기관은 1952년 4월부터 류큐정부[Government of Ryukyu Islands]로 간판을 바꿔달았고 1972년 일본이 군용지 복원보상금 일부를 일본이 부담한다는 조건으로 반환대가를 지불하고 반환받을 때까지[일본 마이니치 신문 니시야마(西山太吉)기자의 외무성 취재로 거래 내용이 밝혀짐] 미국 육군중장을 고등판무관[high commissioner]이 통치책임을 맡았다.

니시야마 기자의 오키나와 반환 교섭의 취재 과정과 내용 등에 대해서는 ‘유일상 지음, 언론법제론[전정판, 2007, 370-374쪽’을 참고하시라.

오키나와 전쟁 전후 기간 내내, 거의 모든 섬 주민이 진지구축, 부상병 치료, 전투에 참가하여 마지막 격전지가 된 오키나와에서도 특히 남부지역의 여러 마을에서는 주민들이 전멸했다. 간신히 살아남은 오키나와 주민들은 이 무렵, 상당수가 외국(특히 남미)으로 이주했다.

전전인 1935년의 인구는 592,000명이었다. 1945년에는 326,000명으로 줄었으나 1950년 한국전쟁 때 70만 명 정도로 늘어났고, 미군점령이 끝난 1072년에는 100만 명을 넘어 현재는 약 145만 명이 살고 있으며 좋은 날씨와 쾌청한 공기로 많은 국내외 많은 관광객이 찾는다.

글과 사진 ; 유일상 + 일부는 Public Domain

유일상

[건국대 언론학 명예교수] 1968-1969 베트남전쟁에 해군수병으로 참전. 만기제대. 현재 역사문화여행전문저널리스트로 naver블로그 등 소셜 미디어 운영.

미국 육군원수 5성장군 맥아더 29 ; 미국해군해병이 주도한 오키나와 전투 2 맥아더2018. 7. 25. 0:23https://blog.naver.com/willow458/221325864851 
                                                             

맥아더 29 미국 해군해병이 주도한 오키나와 전투 2

오키나와 본섬 북부 전투

일본군 제32군은 본섬 남부를 주전투장으로 예상해, 북부에는 독립혼성 제44여단의 1개 대대 병력만 배치했는데 미군은 제6해병사단을 주력으로 공격을 가해, 422일 제압을 완료했다.

이 전투에서 제6해병사단은 전사·실종 243, 부상 1061명의 손실을 입었다. 북부는 주민의 대피지역으로 지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약 8만 명으로 추정되는 주민이 피난 와 있다가 미군의 통제 하에 들어가자 상당수는 산중으로 도망쳐 남쪽으로 내려왔다.

416일 미군 제77보병사단은 본섬의 서북쪽 해상에 떠있는 이에지마[伊江島=혼부 반도에서 서북쪽 9km]에 비행장과 해상방공용 레이더를 설치하기 위해 상륙했다. 이 섬에는 일제 독립혼성 제44여단 예하 1개 대대 650명을 핵심으로 수비대 2,000(약 절반은 현지소집 특설부대원)이 배치되어 저항했지만 21일에 미군이 섬 전체를 점령했다.

미군에 따르면 일본 측은 민간인 다수를 포함하여 4,706명이 전투에서 사망​​3명이 포로가 되었다. 미군은 218명이 전사 또는 실종되902명이 부상당했으며, 중형 전차 60량과 자주포 6량 중 5량을 잃었다고 한다. 미군의 전사자 중에는 1944년 퓰리처상을 수상한 종군기자 Ernest T. Pyle[1900-1945.4.18.]도 포함되어 있었다. 기자의 투철한 직업정신을 보여주는 끔찍한 장면이었다.

[투철한 전문직업정신으로 오키나와 전투에 종군했다가 전사한 Pyle 사진]

일본군이 이 섬에 보유하고 있던 육군비행장은 3월 중에 철저하게 파괴했기 때문에 미군은 신속히 복구해 510일 최초의 전투기부대를 이 비행장에 진출시켰다.

오키나와 본섬 남부 전투

일제 제32군은 슈리[首里]성 지하에 둔 사령부를 중심으로 오키나와 본섬 남부를 지키는 지구전술을 폈기 때문에 미군의 오키나와 상륙전투 대부분은 남부공략에 소비되었다. 그 때문에 남부에서 전투를 전··후기 3기로 나눈다.

1. 오키나와 본섬 남부 전투 전기; 가카즈[嘉数]고지 함락까지

미군은 슈리의 사령부를 목표로 남진했지만, 45일에는 보병 1개 중대 겨우 150명이 전초기지의 지하진지를 활용하여 미군의 공격을 7-8회 저지해 미군은 지하진지에 각종 폭약과 수류탄까지 모든 폭탄을 사용하며 공격해, 46일 고지를 차지했다.

미군은 그 후, 모든 전선에 걸쳐 진격을 시작했지만, 47일에는 일본군의 완강한 진지전에 저지되어 진격을 멈췄다. 7보병사단은 탱크 10, 장갑차 5대로 공격했지만 일본군은 대전차지뢰와 포장폭탄으로 탱크 3대를 순식간에 격파하고, 미군보병을 포격과 기관총 소사로 후퇴시키고, 보병과 분리된 탱크를 육탄공격으로 부서뜨렸다.

96사단이 공격한 가카즈[嘉数/가수]고지는 지형요인과 함께 일본군의 가장 견고한 진지이기 때문에, 미군은 엄청난 출혈을 강요당했다. 일본군 제62사단은 이 진지를 제1선 진지로 최대한 활용하고 제24사단이 제2선 진지를 방어하며 격렬히 저항했다. 특히 48-12일에 가카즈 고지 일대를 공격한 미 육군 제96사단과 제7사단은 총 2,880명의 사상자를 냈지만, 일본군의 방어선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43일 전황보고를 받으면서 천황(대원수)이 우메츠[梅津]육군참모총장에게 오키나와 주둔 일본군이 공격하지 않는 이유를 물었다. 우메츠 총장은 상황을 설명했지만, 32군에게 미군에 빼앗긴 북부와 중부 비행장의 탈환을 명령했고, 연합함대도 비행장 탈환에 나섰다. 여기서 보듯이 태평양전쟁의 최고 전범은 쇼와 천황임에도 그는 끝내 처단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제국주의의 본질이다.

32군 우시지마 사령관은 북·중 비행장 방면으로 출격을 결정하고 48일과 12일에 야습을 실시했지만 많은 전사자만 냈을 뿐이다. 일본군의 야습 후에도 미군은 맹렬한 공격을 반복했다. 특히 419일에 미군 제96·27사단 등 3개 사단이 총공격에 나섰지만 일본군의 치열한 저항을 받았다. 미군은 제27사단의 M4 탱크 30대 중 22대가 파손되었고, 24군단 전체로 720명의 사상자를 내고 후퇴했다.

그 후 육상전투는 교착상태가 계속되었고 미 해군은 함포사격을 포함한 폭격으로 지원했지만 일본군은 진지에 틀어박힌 채, 진지전투로 미군 사상자가 많았다. 32군은 423일에 전선을 정리하면서 일부부대의 철수와 진지를 변환했다. 19~23일의 격전에서 제32군이 전사 2,490, 부상 2,665명이 발생했다. 미군은 겨우 슈리 방어선 외곽을 돌파하였으나 일본 제32군은 예비 병력인 제24사단과 독립혼성 제44여단 주력을 투입하고 후퇴했던 제62사단과 함께 새로 방어선을 재구축했다.

미국 육해군의 불협화음

미국 육군이 가카즈 고지에서 고전하고 있는 동안, 미국 해군장병은 일본군의 치열한 특공에 노출되어, 41일부터 23일 사이에 60척의 함정이 격침 파괴되고, 전사 1,100, 부상 2,000명 이상에 달했다.


​[일본군 가미카제 자살특공대와 교전하며 지상전투병력을 오키나와에 상륙시키는 제5함대 해군 함정들]

태평양함대 니미츠 사령관은 육군의 진격 속도가 너무 느림이 불만이었다. 니미츠 해군원수는 육군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해군을 희생시키고 있다고 생각하고 상륙 현장 전투지휘에 함구하겠다는 방침을 바꾸었다. 육군 제10군 사령관 버크너 중장의 작전 지휘에 개입하기 위해 422일에 Alexander A. Vandegrift[1887-1973. 해병대장. 과달카날 전투에서 제1해병사단을 지휘한 공적으로 대장으로 승진]해병대 총사령관을 대동하고 자신이 오키나와로 향했다. 버크너는 신중하게 작전을 수행했지만 해군과 해병대보다는 적극성이 부족하다는 평가에 불만이었고, 평상시에는 온화한 니미츠 해군원수도 회담 중에 버크너의 자세에 격앙해 다른 사람을 군사령관으로 교체하여 전투를 진행하겠다. 그러면 해군은 일제의 지독한 가미카제 공격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고 힐난했다.

이 때 니미츠와 반데그리프트의 구상은 완강한 일본군 방어선 배후에, 사이판에서 대기 중인 제2해병사단의 잔존부대를 상륙시켜 방어선의 배후를 찌르는 것이어서, 레이테 섬 전투의 Ormoc 상륙작전 성공을 재현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버크너는 보급문제 등을 우려하여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버크너는 1943년에 사령관으로 아투 전투(Battle of Attu=1943..5.12. 보르네오 섬 코타키나발루 부근에 있는 섬) 상륙전투에서 일본 육군대령이 지휘하는 수비대와 17일간 전투 끝에 전원이 옥쇄하게 압도적 물량을 투입한 정공법을 성공시켰던 것처럼 오키나와 전투에서도 정공법을 관철하려고 의도했다. 하지만 전장(戰場)은 확연히 달랐다. 오키나와 전에서는 해군이 특공대 중심의 일본군 공습으로 큰 피해를 입고 있었고, 육군도 일본군의 치열한 저항에 의해 쉽게 진격하지 못했다.

2. 오키나와 본섬남부 전투 중기 ; 일본군총공격 실패·슈리방위선 붕괴까지

일제 제32군은 야습 실패 이후에 지구전술을 통해 미군에 대규모 피해를 주고 진격을 지체시켜 왔지만, 인명 손실이 늘고 주된 진지도 점차 압박을 받았다.

429일에 초 이사무[長勇. 1895-1945.6.23. 육군중장. 동굴 진지에서 우시지마 사령관과 함께 자결]참모장은 계속되는 전력 소모 대신에 반전 공세를 취할 것을 주장했고, 야하라 히로미치[八原博通. 1902-1981] 대령은 공세를 취하면 전멸될 것이므로 지구전을 견지해야 한다.‘, '방어진지를 버리고 공세로 돌아서도 압도적으로 화력이 우세한 미군을 격퇴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실패하면 전략적 지구전마저 불가능하므로, 본토공격까지의 지연일수가 짧아질 것이라고 강하게 반대했지만, 다른 참모들은 초[] 참모장을 지지했다. 우시지마 사령관도 중앙에서의 독전(督戰) 요구도 있어, 초 참모장 등의 공세의견을 받아들여 이날 총공격을 결정했다.

54·5일에, 일본군은 포병대가 포격을 시작하고 제24사단과 탱크 제27연대 등을 투입하여 후텐마[普天間] 부근까지 전선을 회복했다. 일본군은 하룻밤에 5,000발이라는 전례 없는 포격을 가하면서 주정으로 해상을 우회하여 역 상륙을 시도했고 항공총공격도 실시했다.

미군은 일시 혼란에 빠졌지만, 총공격해 온 일본군을 반격해 대포, 경전차 등을 대부분 파괴하여 큰 타격을 입혔다. 일본군이 유기한 사체는 6,237명에 달했고, 미군도 사상자 714명이 발생했다. 이 피해는 일본군의 공세 정면에서 벗어난 지역에서 공격 중이던 제1해병사단이 54일 하루만에 352명의 사상자를 낸 것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가벼운 것이었다.

​[미국 함정으로 돌진하기 위해 대기 중인 가미카제 특공대원들. 대개 2명이 탑승하여 자살로 삶을 끝낸다. 조선사람도 있었다.]

한편 총공격을 하늘에서 엄호했던 일제 특공은 영국 항공모함 1[Formidable; R67]의 비행갑판에 돌진해 길이 3m, 깊이 60cm의 구멍을 낼 만큼 파괴했다. 또한, 미국 구축함 2, 중형 상륙함[LSM] 2척을 격침하고, 호위항공모함 1, 경순양함 1척이 대파하는 등 17척을 격침 또는 파손시켜 682명의 사상자를 냈다.

[[일본 가미가제(神風) 자살특공대의 폭격으로 갑판상에 큰 구멍이 난 영국항공모함 Formidable(R-70]   

슈리 방어선의 붕괴

일제 32군 정예부대의 총공격 실패로 Simon B. Buckner, Jr.[1886-1945.6.18. 최종계급 대장. 당시 중장.]사령관은 5월이 슈리를 총공격할 호기라고 판단했다. 6해병사단 중심의 제3수륙양용군단은 섬 북부의 소탕임무를 제10군 직할 제27보병사단과 교대하고, 511일까지 남쪽으로 전진했다. 이에 따라 미군은 서쪽부터 우익을 제3수륙양용군단의 제6해병·1해병사단이, 좌익을 육군 제77·96사단을 병렬하고 제7사단을 예비대로 둔 태세로 슈리 성에 있는 일본군 제32군 사령부를 포위, 섬멸하는 총공격을 개시했다.

[미국항공모함 USS Bunker Hill(CV-17)가  2개 특공기의 돌격을 받은 직후의 갑판 모습. 1945년 5월 11일] 

6해병사단은 511일에 일본군의 치열한 저항을 받으면서도 슈리 성 서쪽까지 진출했지만, 일본군 진지인 3개의 고지 앞에서 진격을 멈추었다. 3고지 중에서 슈거로프(Sugar Loaf=참호 반대쪽 경사면)를 정점으로 하고, 다른 두 언덕을 저변으로 하는 삼각형을 구성하고, 침공군이 정점을 향해 진격하게 해, 3개 고지가 서로 보완하는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했다. 슈거로프 일대는 반대사면 진지를 축으로 견고한 진지를 지키는 일본군의 독립혼성 제44여단 예하부대와 제6해병사단이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는 해병대 사상 최대의 격전지가 되었다. 특히 Sugar loaf를 방어하던 일제 독립혼성 제44여단은 8문의 105mm 야포와 4문의 75mm 산포를 갖추고 미군에 엄청난 출혈을 강요했고, 그 밖에 다수의 속사포(대전차포), 박격포와 유탄발사기 등으로 미군의 진격을 저지했다. 격렬한 포격과 사격 때문에 해병대는 고지 가까이 접근할 수 없었고, 탱크도 잇달아 격파됐다. 질량 모두에서 압도적인 미군을 상대로 Sugar Loaf10일 간이나 발을 묶는 일본군의 전술은 전후에 제6해병사단의 교본으로 교과서대로의 진지방어전술이라고 칭찬했다.

[Okinawa Sugar Loaf]

[현재의 Palau공화국 큰 섬 북부에 남아있는 참호반대경사면 진지/Sugar Loaf의 원형]

이 전투에서만 미군이 치른 대가는 사상자가 2,622명에, 신경증 환자가 1,289명에 달했다. 특히 장교의 사상률이 높아 3명의 대대장이 전사, 11명의 중대장이 사상하는 등 사상자 비율은 70%에 달했다.

6해병사단의 인근을 진격하고 있던 제1해병사단도 종심 방어의 정교하고 단단한 진지로 구축된 마을에서 고전을 겪었다. 1해병사단은 56일에 한 고지(일본군 호칭 : 50미터 폐쇄곡선고지)에 도달했지만, 일본군이 진지에서 3대의 탱크를 격파하는 등으로 2회나 밀리다가 9일에 진지를 폭파하고 고지를 제압했다.

1해병사단은 514일 다이묘[大名] 고지에 도달했지만, 이 고지와 그에 인접한 고지는 슈리 직전에 위치한 슈리 방어선의 핵심이어서 그 견고함은 지금까지와 비교가 되지 않았다. 17일부터 다이묘 고지에 대한 공격을 시작한 미군은 함포와 폭격부터 야포·박격포·전차에 의한 화염방사에 이르기까지 모든 화기를 집중하여 일본군 진지를 공격했으나 일본군으로부터의 응사도 굉장했다.

20일 제1해병사단은 2개 대대로 다시 다이묘 고지를 공격해 진지 하나하나를 격파하면서 진격, 네이팜으로 고지를 불태우고 진지를 소탕하면서 하루에 겨우 60m 진군한 후, 구릉을 25m 전진하면 일본군의 맹렬한 반격으로 다시 원래의 진지에 되돌아가야 했다.

​[현재 복원된 슈리성 오른쪽 출입구인 봉신문 奉神門 앞에서]

521일부터 오키나와에 10일 동안 비가 내렸다. 땅은 진창이 되어서 미군 차량의 운용이 어려워졌기 때문에 다이묘 고지를 포함해 미군의 공격은 한때 주춤했다.

육군 각 사단의 진격로에도 종심방어시스템이 구축되어 있어서, 육군도 해병대처럼 고전을 면치 못했다. 77사단은 슈리로 이어지는 구불구불한 길을 전진했지만 몇 미터 간격으로 일본군의 진지가 있어서 511~15일 사이에 전력이 1/4로 줄어들어 버렸다.

미군은 일반적으로 아침에 진격하여 오후부터 진지를 구축하고, 야간에는 진지에서 버티는 일본군의 야습을 경계하는 일정이었지만, 77사단은 조금이라도 전진속도를 높이기 위해 야간공격을 감행, 일본군과 치열한 백병전을 벌였다. 예하 제307보병연대는 일본군의 중요거점인 구릉의 진지를 야습, 정상의 일본군 동굴진지를 공격해 취침중인 일본군 다수를 살상했지만, 그 후 일본군의 치열한 반격을 받고 3일간 정상에 고립된 후에 구출되었을 때 야간공격에 참가한 204명 중 156명이 사상했다.

구릉 안의 가장 견고한 진지[Mt. Choco-Drop=서부 130고지)를 공격한 미군 제77사단 제306보병연대는 격렬한 공격으로 사상자가 471명에 달해 제307보병연대와 교대되었다. 일본군은 그 후에도 미군을 여러 번 격퇴했지만 동굴 봉쇄로 인해 제압됐다.
[후에 38선 이남 한반도를 점령하고 군정장관이 된 J. R. Hodge 중장의 강시 모습 ; pulic domain]  

​[맨오른쪽 키가 큰 사람이 Oregon 사단으로 불리는 미국육군 96사단장 Bradley소장, 오레곤 캠프에서 찍은 기념사진; public Domain]  

최초로 슈리 전선의 돌파구를 연 것은 가장 나중에 진격한 육군 제96사단이었다. 24군단장 John R. Hodge[1893-1963. 맥아더 사령부 남한 군정장관 역임] 중장은 슈리에 제일 가까운 고지를 공격해 단번에 슈리에 접근하는 작전을 주장했지만, 96사단[별칭 Oregon사단] 사단장 James L. Bradley[1891-1957. 딸네 집에서 익사]소장은 지형을 정찰한 후에 그보다 높은 Konical Hill(운타마모리運玉森)을 먼저 공략하는 것이 좋다는 의견이었다.

[운
타마모리 運玉森 사진 ; 사진은 public domain]

Bradley 사단장 의견대로 함포사격 후인 510일에 제96사단 제383보병연대가 Konical Hill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지만, 일제 24사단 보병89연대가 주력으로 포진한 진지는 폭격으로도 파괴할 수 없었다. 383연대가 전진하면 일본군이 격렬한 포격을 퍼부어 전진할 수 없었지만 513383연대가 Konical Hill 정상을 바라 볼 수 있는 지점까지 진격에 성공했다.

미군은 일본군의 슈리 방어선을 돌파해, 519일 슈리 성의 일본군 사령부를 함락시켰지만 피해는 심대했다. 2개월 미만의 슈리 전선 전투에서 제24군단과 제3수륙양용군단의 사상자는 총 26,044명이었고, 전투 스트레스반응에 의한 부상병도 해병대 6,315, 육군 7,762명에 이르렀다. 탱크도 육군만(해병대의 손해는 사료 없음) 221대가 격파되었다. 이것은 오키나와 전투에 투입된 미군 탱크의 57%에 달하며, 또한 그 속에는 보충할 수 없었던 화염방사탱크도 12대나 포함되어 있었다.

3. 오키나와 본섬 남부의 전투 후기; 슈리함락과 일제 32군 철수

일제 제32군은 미군이 Konical Hill[운타마모리運玉森 방면] 공략을 달성하면 단번에 슈리 방어선이 붕괴할 것으로 우려해, 521일에 참모회의를 열고 여러 방안의 이해득실을 협의했다.

첫째, 슈리 진지에서 버티면서 최후의 결전을 하는 방안 ; 군의 원안으로 각 진지가 이 방안으로 정비되어 있지만 생존 장병은 아직 50,000명으로 추정되고 이 병사를 슈리 진지에 배치하면 미군 폭격의 좋은 먹이가 되어 버린다.

둘째, 치넨[知念]반도[본섬 동남쪽]로의 철수방안; 이 반도는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여 탱크를 상대로 한 전투에는 유리하지만 동굴의 수가 적어 잔존 병력을 수용하기 어렵고 집적한 물자도 적다.

셋째, 키얀[喜屋武]반도[본섬 서남쪽]로의 철수방안; 바다 정면이 30~40m의 절벽이어서 방어 지역으로는 양호하며 자연·인공 동굴이 풍부해 잔존병력의 수용도 가능하고, 24사단의 군수품이 집적되어 있다.

62사단장 후지오카 다케오[藤岡武雄. 1891-1945.6.22. 자결] 중장 등은 슈리 결전 방안을 주장했지만, 522일 우시지마 군사령관은 오랫동안 오키나와에 미군의 발을 묶어두기 위해, 지형이 견고한 키얀 반도로 철수하여 지구전을 계속하기로 결심하고, 군 주력의 후퇴를 29일로 예정, 그 전에 군수품과 부상병의 후송하도록 지시했다.

미군의 진격은 5월말부터 내린 폭우로 일시 주춤하고 있었지만, 523일 제96사단이 Konical Hill을 제압하자, 7사단 2개 연대가 슈리 성을 포위하기 위해 전진했다. 일본군은 패잔병이 많은 두 연대를 몇 번이나 공격했으나 완전히 저지할 수 없었다. 이 병력이 슈리와 오키나와 남부를 연결하는 간선도로에 인접한 고지대에 도달하면 일본군 잔존 포병 전력이 격렬히 포격하고 일제 제24사단 보병연대가 이를 격퇴했지만 병력에 한계가 있었다. 24일에는 미 제6해병사단의 수색대가 나하[那覇]에 진출해 이미 폭격으로 폐허가 된 나하를 접수했다.

[슈리성에서 내려다 보는 오늘날의 나하 시내]

Konical Hill을 완전히 제압한 제96사단과 Sugar Loaf와 허니문을 돌파한 해병대가 슈리를 완전히 포위하고 있던 5월 26일 미 해군 정찰기가 일본군의 대규모 이동을 발견했다. 미군은 일본군의 의도를 짐작하고 철저한 추격으로 이동 중인 일본군 45,000명에 함포·공습·포격으로 철저히 공격했지만 완전히 철수를 예측하지 않았고, 효과적인 추격을 못한 것, 5월 말부터 내리기 시작한 폭우 등으로 제32군의 철수를 완전히 저지할 수 없었다. 슈리를 포위하고 있던 제24군과 제3수륙양용군단의 옆을 빠져 나가 철수한 것이어서 손해는 컸지만 일제 제32군 30,000명은 기적적인 이동으로 남부에 새로운 진지를 만들고 방어선을 구축했다.

우도시마 사령관 등 제32군 수뇌는 5월 27일 호우와 야음을 틈타, 도보로 슈리에서 철수하여 섬 남부에 있는 하에바루초[南風原町]의 벙커로 향했고 30일 새벽에는 새로운 사령부를 설치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슈리성 안내표지]

[오늘날의 슈리성. 이 성 아래 수많은 동굴 안에서는 일제가 본토 결전을 늦추는 최후의 전투를 벌였던 곳]

얼마 안가 소수의 수비대가 남은 슈리 진지가 미군의 손에 떨어졌지만 미군의 함포 사격 등으로 사방이 파괴되고 일본병사 시체가 흩어져 있었다. 그 광경을 본 버크너사령관은 ‘이제 전투가 끝나고 다음부터는 소탕전이다.(중략) 적은 다시 전선을 구축할 수 없다‘고, 낙관적인 의견을 제시했다. 참모들도 일본군이 질서 있게 철수했을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일본군이 남부에 새로운 진지를 구축한 것은 나중에야 알았다. 그래서 미군은 일본군의 조직적인 저항을 완전히 제압하기 위해 그 후 3주 동안 더 전투를 해야 했다.

일본군의 남부 철수 시에는 많은 혼란도 일어났다. 오키나와 방면 일본해군부대는 주로 비행장 설치대 등을 육전대로 재편한 것으로 전투부대가 적고, 항공기관포를 육전용으로 개조하는 등 장비도 열악했다. 비교적 전투력이 있는 4개 대대를 육군의 지휘 하로 넘겨 슈리 전선에 보냈기 때문에 해군부대는 오로쿠[小祿]지역에 틀어박혀 항전을 계속했다. 항전 중에도 일제 해군은 접근한 미군 구축함 'Longshaw[DD-559]'를 비롯해, 소해함과 유조선을 해안포로 포격해 침몰시켰다. 하지만 5월 26일 전보독해과정에서의 오해로 인한 일단 철수 때, 잔존중화기를 파괴했고 병력도 2,000명에 불과했다.

6월 4일 진격 속도를 높인 미군은 오키나와 해군근거지대(사령관 오다미노루[大田實. 1891-1945.6.13. 자결. 당시 소장. 일본해군 육전의 권위자. 중장으로 추서)가 수비하고 있는 오로쿠 해군비행장까지 진격해왔다. 그래도 오다 소장은 사수를 결의하고 6월 5일에 제32군사령부에 대해 ‘해군은 포위당해 철수불능상태이기 때문에 오로쿠 지역에서 끝까지 싸울 것’이라고 타전했다. 우시지마중장은 오다 소장에게 남부로 후퇴할 것을 간곡히 부탁하는 명령을 내렸지만 오다 소장은 결의를 번복하지 않았다. 오다 소장은 6월 6일 각처에 결별의 전보를 타전하고, 특히 해군차관 앞으로 ‘오키나와 전투에서 천황 폐하가 현민에 대해 특별한 배려를 해 달라’는 전보를 남겼다.

[오타 미노루 소장이 자결한 구 해군사령부 동굴입구. 계단을 내려가면 자결현장이 있다.]

오로쿠를 공격한 미 제6해병사단은 일본해군부대가 진지를 사수하는 격렬한 저항에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 오로쿠 전투는 6월 10일에도 이어져, 미군 사상자는 2,608명에 달했다. 6 월11일에는 미군 2개 연대가 해군부대의 진지를 포위했다.

오다 소장은 6월 11일 우시지마 사령관 앞으로 ‘적의 탱크들이 우리 사령부 동굴을 공격 중이며, 근거지대는 6월 11일 2,330명이 옥쇄하지만 지금까지 후의에 감사를 드리며 귀군의 건투를 기원한다.’고 타전한 후 13일에 부하 참모 5명과 함께 자결했다. 또한 오로쿠에서는 6월 12일과 13일에 오키나와 전투에서 처음으로 159명의 일본 군인이 집단으로 투항해 포로가 되었다.

오키나와 전투에서의 자살특공대

오키나와 전투에는 일본 육해군 합계 총 1,900대의 특공기가 투입되었다. 미국 해군은 4월 23일에 태평양함대사령관 니미츠 원수가 제10군 사령관 버크너 중장에게 일본 특공 대책에 대비한 진격을 독려한 이후에도 일본군 특공에 시달렸다.

제5함대 사령관 Spruance 중장은 산하 함대의 지나친 특공피해로 '특공기의 기량과 효과가 엄청나, 함정의 손실과 피해의 비율이 매우 높기 때문에 이를 막기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채택해야 한다. 제20공군(미국육군항공대)을 포함하여 투입가능한 모든 항공기로, 규슈와 오키나와 비행장에 대해 모든 공격을 추가해 달라'고 해군상층부에 절실한 전황보고와 의견을 상신했다. 스프루언스의 상관인 니미츠 사령관도 워싱턴의 해군상층부에 ‘이제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다'고 타전했다.

전선에서 고전의 보고를 받은 해군장관 James V. Forrestal[1892-1949. 우울증으로 자살]은 기자회견에서 해군의 사상자가 4,702명이라고 밝혀 ‘해군이 상륙작전을 지속적으로 지원하기는 어려운 일이며 너무 비싼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을 미국 국민여러분께서 이해해 주기 바란다.’고 호소했다. 이 회견이 있은 후, 버크너 중장은 슈리 방어선을 공격하는 각 군단장에게 진격속도의 가속을 지시했다.
[1945년 4월 12일 일제 가미카제 특공의 자살폭격으로 화염에 휩싸인 미국전함 Idho(BB-42) ; public domain]

[1945년3월18일과 4월 16일 가미카제의 자살특공으로 불타는 항공모함 Intrepid(CV-11)과 적으로부터 보호감시하고 있는 구축함]

 전선이 붕락위기를 맞자, 대본영은 더 많은 특공대를 보냈다. 5월 11일에 제58임무부대의 기함인 항공모함 'Bunker Hill[CV-17. 마리아나 해전과 레이터 해전 등에 참가]‘이 2대의 특공을 받아 대파, 396명의 전사자와 264명의 부상자가 발생해 전선 이탈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 항공모함은 나중에 미국본토의 Puget Sound 해군조선소에서 수리를 받았는데, 그들이 본 사상 최악의 피해였다고 한다. 다음날인 5월 12일 기함이 ‘엔터프라이즈Enterprise'로 변경되었지만, ‘엔터프라이즈’에도 특공기가 명중하여 대파, 이틀 계속해서 미국함대의 기함이 위기에 처했다.

대본영은 이어 제공권 확보를 위해 육군공수부대에서 추출한 Commando부대[義烈空挺隊/의열공정대]를 미군이 장악하고 있는 비행장에 강행 착륙시켜 파괴활동을 벌였다. 구마모토에서 12대의 중폭격기가 출격, 그 중 1대가 북쪽 비행장(読谷비행장) 착륙에 성공해, 탑승하고 있던 대원과 승무원이 총33대의 미군 전투기·폭격기·수송기를 완파하거나 큰 피해를 입혔다. 여기서 미군 20명을 살상하고 7만 갤런의 항공유도 폭파 소실시키는 등, 비행장 기능에 타격을 입어 이틀 동안 비행장을 사용할 수 없게 했다.

미국해군 전사에는 오키나와 전투에서 해군이 특공으로 입은 손해가 막대하여, 대전 전 기간을 통해 가장 값비싼 해군작전이라고 쓰고 있다. 일본 특공대가 충분한 훈련도 받지 않은 조종사로 구식기계를 조종하면서도 집단특공공격으로 수상함정에 매우 큰 위험이 되었음을 오키나와 전투가 증명했다. 어떤 무기보다도 정신을 가진 사람이 무서운 것이다.

미일 양군 사령관의 전사와 자결

5월 25일, 오키나와 방면에서 항공작전을 해온 일제 육군 제6항공군은 연합함대의 지휘를 벗어나고 6월 9일부터 군수물자 투하 등의 지원만 맡게 되었다. 육군기는 섬 최남단인 갼[喜屋武]기지에서 매일 같이 한 대 이상이 일본 제32군에 탱크분쇄용 폭뢰 자재와 15센티 유탄포 포탄 등을 투하했다.

6월 5일, 미 제24군단이 일본군 남부방어선을 공격해 왔다. 이를 맞서는 일본군은 3만 명 이상이었지만 정규의 보병은 그 중 11,000명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화포를 잃은 포병이나 통신·정비·설영대 등의 지원부대와 오키나와 현지소집 방어대 등이었다.

일본군은 전력이 부족하면서도 방어선 곳곳에서 미군을 몇 번이나 격퇴했다. 섬 남부의 야에세다케[八重瀬岳. 높이 183미터]을 수비하는 독립혼성 제44여단은 6월 12일까지 미군 2개 사단의 3일간 발을 묶었고 13일에 총공격을 받아 주력은 괴멸했지만, 주변의 동굴에는 많은 잔존병력이 있어, 소탕전이 계속되었다.

​[결사항전에 나섰다가 포로로 잡힌 나이어린 소년병들. 초등 저학년이 아닐까? 사진은 public Domain]

서쪽 최남단 구니요시[国吉]에서는 보병 제32연대 약 1,500명 전후의 수비대와 제22연대 잔존병력이 미 해병대를 상대로 17일까지 구릉 지역을 사수하였다. 언덕 위로부터 치열한 사격을 받아 미 해병대에 사상자가 속출해, 13일에는 퇴각했다. 탱크 없이는 한 걸음도 더 나갈 수 없는 곳이었지만 일본군은 속사포로 5일 동안 미군 탱크 21대를 격파했다. 하지만 미군은 전차 1대에 보병 6명과 탄약을 쌓아 전선에 보내는 한편, 귀로에 사상자를 싣고 돌아오는 격전을 계속한 결과, 17일에는 일본 보병 제22연대의 사령부 진지를 폭파하여 연대장이 전사하고, 잔존병력은 대대장 이하 전원이 돌격으로 전멸, 5일 만에 구릉을 제압했다. 그동안 미군의 사상자는 1,050명, 그 중에는 일본군의 저격으로 전사한 제22해병 연대장 Harold Roberts 대령도 포함되었다.

미군은 일본군과 주민들에게 삐라 800만장을 뿌리고 투항을 촉구했다. 버크너 사령관 스스로도 우시지마 사령관 앞으로 보낸 친서에서 항복을 권고했지만, 6월 17일 우시지마는 거절했다. 다음날인 6월 18일, 버크너는 갼[喜屋武]반도의 최전선 시찰 중에 일본 육군의 야전 중포병 제1연대 제2대대의 곡사포 포격을 받아 전사하여 현재까지 미군전사 상 최상위 계급으로 전사한 유일한 사례이다. 이어, 6월 19일에는 제96사단 부사단장 겸 325연대장 Cladius M. Easley[1891-1945]준장이 일본군의 저격에 의해 전사하였다. 일본군은 적군부대 장성급 최고지휘관을 포함해 2명의 장군을 전사시켰지만 불리한 전세를 만회할 수는 없었다.

미국 제10군의 지휘는 급히 미국 해병대 제3수륙양용부대 사령관인 Roy S. Geiger[1885-1947. 최종계급 해병대장]중장이 사령관을 맡았다가 5일 후인 6월 23일 본국에서 육군지상군Army Ground Forces사령관으로 근무 중이던 Joseph W. Stilwell[1883-1946. 위암으로 사망]대장에게 인계했다. 스틸웰 장군은 일본군의 장개석 원조 루트 차단에 맞서 영국군 총사령관의 명령을 받는 미군의용군 사령관으로 버마 북부와 중국 운남성 일대에서 전투를 지휘했으나 장개석과의 불화로 본국에 소환되었던 강직한 미군 장성이었다.

일본군의 전선붕괴는 점차 진행되어, 본섬 남부 지역을 수비하고 있던 주력인 일본군 제24사단도 6월 17일에는 조직적인 저항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고 기아와 질병으로 하루 4천명의 병사가 죽어나갔다. 조직붕괴도 시작하여 지금까지 거의 볼 수 없었던 집단투항도 많아졌다. 6월 20일에 마부니다케[摩文仁岳] 동쪽 가장자리를 점령한 미군 제32보병연대가 977명이나 되는 일본군 장병을 포로로 했다.

스틸웰 군 사령관이 현지에 부임하던 6월 23일 오전 4시경(6월 20일, 6월 22일 설도 있다) 일본의 오키나와 수비군 최고지휘관인 제32군 사령관 우시지마[牛島満]중장과 참모장 초[長] 중장이 마부니[摩文仁]의 군사령부에서 자결해 오키나와 수비군의 지휘계통은 완전히 무너졌다. 24일경에는 핵심부대인 보병 제22·제89연대가 군기를 불태우며 옥쇄(전멸)했고, 대본영도 6월 25일에 오키나와에서 조직적인 전투의 종료를 발표했다.

그 후의 작은 전투

조직적 전투는 끝났지만 일제 잔존병력은 본섬 각지에서 산발적인 전투를 이어갔다. 이 지휘계통 없는 전투의 계속으로 민간인을 포함한 사망자 수를 증가되었다.

일본군 제24사단 예하의 보병 제32연대 휘하의 2개 대대 병력 등이 종전 때까지 생존하고 있었다. 연대장을 비롯한 이 부대의 생존 장병들이 미군에 투항한 것은 일본정부가 8월 29일이었다. 제32연대는 8월 22일에 미군과 접촉하고, 23일에 군기를 불태웠다. 오키나와 수비군의 최종적인 항복은 9월 7일 가데나[嘉手納]에서 행해졌다. 제32군 사령부 고급참모 야하라[八原]대령은 포로가 되었고 대부분의 참모들은 전사했다.

육군 제8비행사단 예하 비행전대의 정찰비행도 8월까지 계속하였다. 항복할 때까지도 일본해군의 특공공격은 계속되었다. 특공기가 7월 28일에는 미국 구축함 ‘Callaghan[DD-792]’을 침몰시켰다. 8월 12일에는 함재기가 야간 통상공격으로 전함 ‘Pennsylvania(BB-38)’에 손상을 입혔다[전사 20명, 부상 10명]. 8월 15일 천황의 항복방송이 있은 후에도 그것이 정전 명령은 아니라면서, 우가키 마도메[宇垣纏=1890-1945]해군중장은 오이타(大分)에 있는 해군 특공기지에서 11대 23명으로 된 특공대를 출격시키면서 스스로도 부하가 조종하는 2명 정원의 특공기에 3명이 함께 타고 중장 계급장을 단 정복을 착용한 채, 오키나와 방면으로 출격에 나서 마지막 자살특공을 마쳤다[특공기 3대와 5명은 불시착으로 살아남았고, 18명은 사망].

또한 일제 해군 잠수함은 7월 24일에 오키나와에서 필리핀으로 항해중인 호위구축함 'Underhill[DE-682]'을 격침했고, 또한 7월 29일에는 Tinian 섬에서 필리핀으로 항해 중인 중순양함 'Indianapolis[CA-35. 이전에 미국 본토에서 Tinian섬까지 원자탄을 수송하고 돌아가던 중]'를 격침했다.

종전 후의 상황

한편 오키나와공략작전(빙산Iceberg 작전)에 앞서 1945년 3월 26일 니미츠 원수는 오키나와에 통칭 '니미츠 포고'라는 미국해군군정 포고 제1호를 내렸다. 이 포고는 북위 30도 이남의 오키나와와 가고시마 현 아마미오시마[奄美大島. 면적 712km². 제주도의 절반/거제도의 2배 넓이] 일대의 일본 행정권·사법권을 정지하고 스스로를 미국태평양함대와 태평양지역사령관 겸 미국군 점령 하의 서남제도 및 그 근해의 군정청총장·미국해군사령관 시 더블류 니미츠라고 칭하면서 이 지역의 정치와 관할권 및 최고행정책임자임을 선언했다. 이 포고는 1972년 오키나와 반환 때까지 효력이 있어, 지금도 오키나와의 미군기지 문제에 영향을 주고 있다.

전투가 끝나면서 일제의 오키나와 수비군이 수비하던 오키나와 현 등은 미군 점령 하에 들어가 니미츠 사령관이 류큐열도 미국 군정부의 최고위직인 군정총독(Military Governor)은 ‘니미츠 포고’대로 군정을 맡았다. 그 아래에 군정장관(Chief Military Government Officer)은 Richmond K. Turner[1885-1961 최종계급 대장. 솔로몬 군도에서부터 오키나와에 이르는 각 전선에서 주로 상륙작전을 지휘한 수륙양용작전 전문가]해군중장을 두어 미국해군이 군정을 실시했다.

[현재 나하에 있는 오키나와 현청 청사]

1945년 9월 21일부터 10월 16일까지 군정장관은 신임 제10군 사령관인 Stilwell 육군대장이 맡았지만 실질적으로 해군이 군정을 실시했다. 1946년 7월 1일에 Wilhelm D. Styer(1893-1975)육군중장이 군정장관을 맡고부터 실질적으로도 미국육군이 운영하는 오키나와 민정부[Okinawa Civil Administraion/OCA]로 이관되었다가 1950년 12월부터 1952년 4월까지 ‘류큐열도 미국민정부[U. S. Civil Administration of the Ryukyu Islands/USCAR]’로 개편되어 류큐 열도 일대의 통치기관이 되었다. 류큐열도 미국군정부는 태평양 방면군(후에 극동군으로 개편)의 하급기관이었다. 또한 직접의 주민통제에 해당하는 기관으로 오키나와자문위원회(沖縄諮詢会/충승자순회. 후에 오키나와 민정부와 오키나와의회·오키나와 민정의회로 개편)가 설치되고 사법기관으로 형사에 관한 특정군사법원이 설치되었다.

이 군정부기관은 1952년 4월부터 류큐정부[Government of Ryukyu Islands]로 간판을 바꿔달았고 1972년 일본이 군용지 복원보상금 일부를 일본이 부담한다는 조건으로 반환대가를 지불하고 반환받을 때까지[일본 마이니치 신문 니시야마(西山太吉)기자의 외무성 취재로 거래 내용이 밝혀짐] 미국 육군중장을 고등판무관[high commissioner]이 통치책임을 맡았다.

니시야마 기자의 오키나와 반환 교섭의 취재 과정과 내용 등에 대해서는 ‘유일상 지음, 언론법제론[전정판, 2007, 370-374쪽’을 참고하시라.

오키나와 전쟁 전후 기간 내내, 거의 모든 섬 주민이 진지구축, 부상병 치료, 전투에 참가하여 마지막 격전지가 된 오키나와에서도 특히 남부지역의 여러 마을에서는 주민들이 전멸했다. 간신히 살아남은 오키나와 주민들은 이 무렵, 상당수가 외국(특히 남미)으로 이주했다.

전전인 1935년의 인구는 592,000명이었다. 1945년에는 326,000명으로 줄었으나 1950년 한국전쟁 때 70만 명 정도로 늘어났고, 미군점령이 끝난 1972년에는 100만 명을 넘어 현재는 약 145만 명이 살고 있으며 좋은 날씨와 쾌청한 공기로 많은 국내외 많은 관광객이 찾는다- 

 ****** 글과 사진 ; 유일상 + 일부는 Public Domain - 유일상  --[건국대 언론학 명예교수] 1968-1969 베트남전쟁에 해군수병으로 참전. 만기제대. 현재 역사문화여행전문저널리스트로 naver블로그 등 소셜 미디어 운영.- [출처] 미국 육군원수 5성장군 맥아더 29 ; 미국해군해병이 주도한 오키나와 전투 2|작성자 Henry Ryu *******


**********2018년 8월 15일,******


천주교 성모승천대축일에, 한민족 해방 기념일에, 조국 대한의 광복절에,  대한민국 건국절에,

여름내내 100년만에 처음 닦친 매일 37도를 오르내리는 폭염 속에서, 오후 4시 전후의,

서울 시내 아스팔트 뜨거운 불볕 위의 태극기를 들고 행진하는 국민들 !!!******************

청와대로 향하는 끝없는 행진이 계속 이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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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연일 폭염에 거의 40도 육박이었다.대부분 그늘이나 지하철 역사에 모두 내려가 계셨다. 그것을 감안해서 3.1일과 비교해보면정말 어마무시한 인파가 모였다고 본다.IMG_20180816_172735_336.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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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분들이 그늘을 찾았는데도 사진상 약간의 밀도차이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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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기념 경축행사에 있어서만은, 한민족의 해방과 대한의 광복을 위하여, 오끼나와 전투에서 목숨을 바친 수 만명(약 7만 5천여명???) 미군 장병들과 미국에 감사와 경의 표시로, [태극기와 성조기를 함께 들고 행진하는 것이] 당연한 예의가 아닐까 합니다. 8.15 한민족 해방과 조국광복은 태극기의 힘만으로 된 것이 아니고, 성조기의 힘이 더 컸기 때문입니다. -Msgr. Byon-IMG_20180816_172812_210.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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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가 많이 왔네 안왔네 증거도 없이 이야기 말고 이렇게 사진으로 증명해라.사진출처:보리떡님.[출처] 어제 서울역 얼마나 나왔을까? 3.1일과 비교 해보자.           2.jpg

여름내내 100년만에 처음 닦친 매일 37도를 오르내리는 폭염 속에서, 

오후 4시 전후의, 서울 시내 아스팔트 뜨거운 불볕 위의 태극기를 들고 행진하는 국민들 !!

여름내내 100년만에 처음 닦친 매일 37도를 오르내리는 폭염 속에서, 오후 4시 전후의,

서울 시내 아스팔트 뜨거운 불볕 위의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행진하는 국민들 !!!

8.15 기념 경축행사에 있어서만은, 한민족의 해방과 대한의 광복을 위하여, 오끼나와 전투에서 목숨을 바친 수 만명(약 7만 5천여명???) 미군 장병들과 미국에 감사와 경의 표시로, [태극기와 성조기를 함께 들고 행진하는 것이] 당연한 예의가 아닐까 합니다. 8.15 한민족 해방과 조국광복은 태극기의 힘만으로 된 것이 아니고, 성조기의 힘이 더 컸기 때문입니다. -Msgr. By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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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내내 100년만에 처음 닦친 매일 37도를 오르내리는 폭염 속에서, 오후 4시 전후의,

서울 시내 아스팔트 뜨거운 불볕 위의 태극기를 들고 행진하는 국민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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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내내 100년만에 처음 닦친 매일 37도를 오르내리는 폭염 속에서, 오후 4시 전후의,서울 시내 아스팔트 뜨거운 불볕 위의 태극기를 들고 행진하는 국민들 !!!6.jpg

여름내내 100년만에 처음 닦친 매일 37도를 오르내리는 폭염 속에서, 오후 4시 전후의,서울 시내 아스팔트 뜨거운 불볕 위의 태극기를 들고 행진하는 국민들 !!!7.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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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내내 100년만에 처음 닦친 매일 37도를 오르내리는 폭염 속, 오후 ,서울시내 아스팔트 뜨거운 불볕 위의 태극기를 들고 행진하는 국민들 !!!23.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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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내내 100년만에 처음 닦친 매일 37도를 오르내리는 폭염 속, 오후 ,서울시내 아스팔트 뜨거운 불볕 위의 태극기를 들고 행진하는 국민들 !!! 어마어마한 인파!아무 사고없이 모두 평화롭게 마치도록 기도하며!





2017년 2월 18일, 서울, 시청 앞에서, 남대문 방향으로 가득찬 태극기 물결의 탄핵 반대하는 국민들의 애국 궐기대회 !

8.15 기념 경축행사에 있어서만은, 한민족의 해방과 대한의 광복을 위하여, 오끼나와 전투에서 목숨을 바친 수 만명(약 7만 5천여명???) 미군 장병들과 미국에 감사와 경의 표시로, [태극기와 성조기를 함께 들고 행진하는 것이] 당연한 예의가 아닐까 합니다. 8.15 한민족 해방과 조국광복은 태극기를 들었던 우리 한민족의 힘만으로 된 것이 아니고, 성조기를 들고 싸웠던 미군의 힘과 희생이 훨씬 더 컸기 때문입니다. 

2017년 2월 18일, 서울, 시청앞광장,대통령 탄핵 반대 국민들의 제13차 태극기 애국 궐기대회-여미카엘 신부 참석, 등단 탄핵 반대 피력-
(박상목님의 유투브에서 퍼왔습니다)
 
The 13 th Demonstration of the some hundred thousends Korean peoples !
They oppose the national assembly's impeachment of the present president Miss Julia Park !
Rev. Michael Yeo Hyeong Koo, the former parrishpriest of Myong Dong Cathedral of Seoul Archidiocese,
now, retired priest attended and did a brief speech against the impeach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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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18일, 서울, 시청 앞에서, 남대문 방향으로 가득찬 태극기 물결의 탄핵 반대하는 국민들의 애국 궐기대회 !
2017년 2월 18일, 서울, 시청앞광장,대통령 탄핵 반대 국민들의 제13차 태극기 애국 궐기대회-여미카엘 신부 참석, 등단 탄핵 반대 피력-
 
The 13 th Demonstration of the some hundred thousends Korean peoples !
They oppose the national assembly's impeachment of the present president Miss Julia Park ! Rev. Michael Yeo Hyeong Koo, the former parrishpriest of Myong Dong
Cathedral of Seoul Archidiocese, now, retired priest attended and did a brief speech against the impeachment!!
 
2017/January/7.Saterday. 서울, 강남대로에서, 대한민국 수호 애국 태극기 집회 광경.[출처] 기억하고 싶은 애국집회 두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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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January/7.Saterday. 서울,강남대로에서, 대한민국 수호 애국 태극기 집회 광경.[출처] 기억하고 싶은 애국집회 두 사진!
Demonstration of the some hundred thousend Korean People against the National Assembly's decision on the impeachment of the present president Miss Parck, that which was announced without, and, before investigation on i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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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18일 태극기 애국 궐기대회< 미카엘 여형구 신부 등단 강연!>  
***2017.  3.  1. - 3.1. 만세 운동 98주년, 서울 중심가에서 태극기 애국 궐기대회- 태극기 역사상 最多의 太極旗人들의 애국 궐기대회가장 아름다운 태극기 활용 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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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 반대' (서울=연합뉴스) 홍해인 기자 = 3·1절 태극기국민운동준비위원회 주최로 1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태극기국민운동 및 구국기도회에 참가한 시민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2017.3.1 hihong@yna.co.kr -연합뉴스에서 퍼온 사진입력 : 2017.02.19 오후 7:5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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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트 체크]'태극기' 왜곡 보도, 사진으로 입증.최근 2년 집회 검증... '100만 인파'를 '옹기종기' 묘사... '촛불' 능가하면 보도 외면

 * 출처: 최재필 기자 프로필 보기 | 최종편집 2018.08.19 13:33:34
▲ 2017년 새해를 앞둔 31일 오후 2시 중구 대한문 앞에서 열린 태극기 집회. 거리를 뒤덮은 태극기가 물결을 이루고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지난 8월 15일 광복절, 서울 광화문 도심에서 3만여명이 참여한 '건국 70주년 기념 8.15 국가해체세력 규탄 범국민대회'가 열렸다. 폭염에도 불구하고, 수만명의 사람들이 모여 정부가 외면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생일과 건국 정신을 기렸지만, 극히 일부 우파 언론 외에는 이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전달하지 않았다. 많은 매체가 "태극기 집회 때문에 태극기가 싫어졌다"는 식의 태극기 집회에 대한 지극히 부정적인 기사를 쏟아냈다. 



‘촛불’과 ‘태극기'. 2016년 10월 말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정국 이후부터 대한민국 사회를 대표하는 ‘좌파'와 ‘우파'의 상징이다. 그런데 우파 단체의 태극기 집회에 대한 일부 언론들의 ‘왜곡편파' 보도 논란은 여전하다. 태극기 집회 참가자 수를 아예 밝히지 않거나, 태극기 집회 모습이 아닌 참가자 몇명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사진을 게재하는 행태가 대표적이다. 



태극기 집회는 2016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집회, 31일 종각역 집회 등을 거치면서 규모에서 촛불집회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2017년 3월 1일 열린 태극기 집회는 남대문에서 종로5가까지 거리를 인파로 뒤덮었지만, 대다수 방송과 신문은 태극기 집회를 외면하거나, 친박단체의 집회인양 왜곡·축소 보도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지금도 매주 토요일 태극기 집회가 열리고 있지만, 언론에는 거의 보도되지 않고 있다.



이에 <뉴데일리>는 박근혜 대통령 탄핵 정국이 본격화된 2016년 10월 말부터 대표적 태극기 집회와 관련, 일부 언론의 보도가 어떻게 왜곡되었는지, 보도 내용이 맞는지 당시 현장 사진을 중심으로 검증했다. 다만 집회 날짜는 역순으로 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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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 폄훼 보도-'건국 70주년' 태극기 집회(2018년 8월 15일)


일부 언론은 태극기 집회와 태극기 가치를 연결시켜 태극기 집회를 폄훼하는 뉘앙스를 전했다.ⓒ뉴스1 캡처
'건국 70주년' 태극기 집회가 열린 지난 15일, 태극기 집회에 대한 일부 매체의 '편파 보도'는 여전했다. 뉴스통신사 <뉴스1>은 "'태극기집회'의 역설…좌도 우도 태극기 싫어졌다"는 기사에서 태극기 집회에 대한 부정적 뉘앙스를 전했다. 

<뉴스1>은 "태극기가 예전만 못한 대접을 받게 된 건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전후에 있었던 '태극기 집회' 탓도 적지 않다"며 "태극기의 상징성과 이미지를 실추시킨 탓에 태극기를 바라보는 시민들의 시선이 무관심을 넘어 부정적으로 변했다"고 했다.

"광복절에 태극기를 걸지 않겠다고 응답한 사람의 68%가 태극기에 대한 인식이 부정적으로 바뀌었다"는 응답 결과를 근거로 제시했다. 태극기 집회와 태극기 가치를 연결시켜 태극기 집회를 폄훼하는 듯한 분위기를 전한 것이다. 그 밖에 “15일 광복절을 기념하며 서울 광화문 등 도심으로 나온 시민들 상당수는 태극기를 부끄럽게 여겼다"고 보도한 매체도 있었다. 

<조선일보> 등 보수우파 매체들이 대한민국수호 비상국민회의, 자유대연합, 국가원로회 등 200여 단체 회원 약 2만8000명(신고 인원 기준)이 참석한 집회 현장의 모습을 '그대로' 담아내는 것과는 다른 보도 행태였다.

◇언론 왜곡 보도 사례-제14차 태극기 집회(2017년 2월 25일)

박근혜 대통령 탄핵정국이 절정에 이르렀던 2017년 2월께부터는 태극기 집회에 대한 언론의 편파·왜곡 보도가 더욱 극성을 부렸다. 그해 2월 25일에는 태극기 집회와 촛불집회가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 약간의 시차를 두고 열렸다. 대부분의 언론은 "촛불집회 100만명"이라는 주최 측의 주장을 여과없이 보도했다. 하지만 "300만명이 모였다"는 태극기 집회의 주최 측 주장은 언론에 제대로 보도되지 못했다. 일부 좌파 성향 언론 중에서 이날 태극기 집회 참가자 수를 "10만명 수준"이라고 보도한 곳이 있었다.  

[보도 사진]
지난해 2월 25일 촛불집회 모습. 대부분 언론은 이 사진을 게재하며 100만명이 운집했다고 보도했다.ⓒ사진공동취재단

[실제 집회현장 사진]
▲ 주최 측 연단이 세워진 대한문 앞도 태극기 집회 참가자들로 가득찼다.ⓒ사진출처=일간베스트

▲ 서울 중구 시청 광장 플라자호텔 쪽에서 남대문을 바라본 장면.ⓒ사진출처=일간베스트

언론 보도가 거의 없던 8차 태극기 집회(2017년 1월 7일) ! 아니, 너무나 보도되지 않는 처량한 태극기들의 모임이   
길거리에 나와, 많은 보도매체들한테 천덕꾸러기처럼, 구박덩어리가 되는 것을 보다 보다 차마 못하여, 비록 비좁고 또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고, 알아주지 않는 우리, [사랑방(Servant Hall of Msgr. Byon)]에서나마 자료 보전용으로라도
한쪽 뒷구석에라도 붙여서 올렸답니다. 교우들의 이해를 바랍니다. 절대다수의 보도매체들한테 공정하게 대접을 받으면 우리 
같은 Servant 들이 모여서 뒤적거리며 들어보는 사랑방(Hall) 뒷 구석 대우를, 태극기들이 면하게 될 것입니다.
 
8차 박근혜 하야 반대 집회는 경찰 추산으로 우파 단체 집회 참가자가 촛불집회 참가자를 처음으로 누른 집회였다. 경찰은 2017년 1월 7일 서울 광화문광장에 모인 11차 촛불집회 참가자 수를 2만4000명(주최 측 추산 60만명)으로 집계했다. 같은 날 서울 강남 일대와 동아일보 사옥 앞, 서울역 광장에서 열린 우파 단체의 태극기 집회 참가자 수는 3만7300명으로 집계했다.
[네이버 캡처]

입력 : 2018.08.12 오후 6: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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