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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천주교회 창립자" 용어 사용에 대하여. - 참고사항입니다

글 :  변기영 몬시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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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상 종교나 단체의 창립자, 창시자와 입교자, 추종자, 동조자, 유공자 구별

 韓國天主敎會 創立聖祖로 모시는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①  1777년부터~1779년 간에 처음 몇차례 개최되었던 天眞菴 講學會 에 참가하고 ,
 
 1784년 늦 봄부터 水標洞의 李檗 聖祖 自宅 集會 에 참가하고
 
③  1785년 늦봄까지, 明禮坊의 金範禹 譯官 自宅 集會 에 참가하면서, 한국 최초의 天主敎 迫害, 즉,  1785년의 乙巳年 迫害에 受難 하고 ,
 
④  1786년부터 조직되어 약 2년 내외 동안 사목 활동한 臨時準聖職者團 에 참가하여 ,
 
⑤  끝까지 한국 천주교회 창립에 주동적인 역할을 하면서, 신도들의 의지가 되고, 스승이 되어, 지도자의 위치 에서 신앙을 증거한 殉敎 先祖들 이다 .
 
     즉, 교회창립에 있어, 담당하였던 역할과 기능과 활동과 업적을 따라 호칭하는 것이 합리적 상식이다. 
 
  종교나 사회 단체의 創立者나 創始者라는 칭호나 표현은, 그 분들의 역할과 기능과 업적, 등으로 호칭하는 것이다. 그래서 創立者나 創始者나 追從者들(從者旣衆-丁若鏞)을 同等視 하고, 동일 반열로 호칭하는 것은, 孫子孫女들을 祖父母들과 同等視하며, 同一 반열(班列)에 자리하게 하는 동시에, 손자손녀들도, 할아버지 할머니로 똑같이 부르자는 것과 다를 바 없는, 無禮 不當한 失禮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나라에서 천주교 신앙인들의 공동체를 최초로 결성한 敎會 創立者들의 가르침과 권고를 따라, 후에 入敎한 신도들과는 구별하여 말하는 것이 우리 인간사회의 언어관습이며, 사회의 통념이다. 타종교계에서도, 종교의 創始者나 主唱者들은 그 追從者들이나 有功者들과 구별한다. 한국 천주교회가 창립되던 시기의 당시 우리나라 사회와 초기 천주교 신도들의 상황을 보면, 새로운 신앙을 가르치는 이들을 믿고, 권고를 받아들이고, 그 가르침을 따르며 실천하고, 박해 중에도 실천하던 신도들의 정신적이며 심리적인 의지가 되고 중심이 되던 지도자들의 기능과 역할을 무시할 수가 없는 것이다.  
 
 
1979년 한국천주교회 창립선조들의 묘를 찾아 확인하여, 불가피한 이장으로 묘역을 조성할 당시, 지금 천진암 성지의 교회 창립선조 묘역의 권철신 성현 묘 우편으로 청동 십자가 자리까지  2 분의 묘역이 빈 공터로 되어 있는 이유는, 홍유한 선생과 김범우 역관의 묘를 이장하려고 준비한 자리였다. 필자가 두 분들의 묘를 찾아 확인한 후, 후손들도 천진암 성지로 이장하는 것을 몹시 원하였었으나, 담당 위원회(위원장 김남수 주교)와, 당시 천진암 성지를 12차례나 자주 방문하시던 김수환 추기경의 의견을 존중하며, 당시 한국교회 어른이신 김추기경의 의견을 따르기로 하여, 현재의 5위를 한국천주교회 창립성조로 확정하고, 5위 묘소로 끝내기로 한 것이다.  
 
 
당시 위원들 중에는 유홍렬 박사(교회역사학자, 서울대학교 교수), 이숭녕 박사(서울대학교 교수, 정신문화연구원장), 유영도 신부(로마 그레고리안 대학 修學, 神學, 哲學, 敎會法 3개 박사학위 소지자, 서울 대신학교 교회법 교수), 具天祐 신부(교회 최고 원로), 등이 있었다.
 
그래서, 예컨대, 천진암 天學道場에서의 천주교 신앙인들의 공동체가 탄생하며 교회가 창립된 후, 본거지를 수도 서울로 이전하여, 처음에는 수표동 이벽 성조의 자택을 집회소로 삼아 서울에서의 복음을 전파하며, 유림들과의 공개토론회, 등을 개최하다가, 이벽 성조의 자택이 경주이씨 양반의 집이라 하여, 常民, 노예, 상인들의 출입이 불편하여, 부득이, 양반과 상민들과 종들과 남녀노소 빈부귀천의 출입이 자유로운, 중인 계급으로 한편으로는 중국어와 몽고어,일본어 학원을 겸하면서, 한의원을 겸하고 있던, 김범우 역관이 자택을 제공하여 수표동에서 지금의 명례방으로 자리를 옮겼으니, 김범우 역관 순교자는 교회창립의 功勞者이지만, 한국에서 최초의 天主敎 創始者나 主唱者나, 지도자나 가르치던 스승적 위치의 신앙인은 아니었다. 洪儒漢 선생의 경우, 필자의 동창생이었던 안동교구장 故 박석희 주교가 천진암 성지에 와서 3일간 머물면서 홍유한 선생 묘 비문 건립의 문안을 필자에게 물었을 때, “한국천주교회 先覺者”로 함이 좋겠다고 자문하여 답하였다. -Msgr. Byon
입력 : 2014.07.01 오전 1: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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