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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952년 늦 여름, 남사국민학교 운동회에서 4학년 생들의 가장행렬 사진 !
글쓴이 Msgr. Byon   / 등록일 : 2018-01-30    (조회 : 4128)
온 나라가 전쟁 중이던 1952년 여름, 남사국민학교 운동회 날, 당시 우리 4학년 학생들의 가장행렬 모습.  온 국민이 전쟁에 집중하던 시절, 비행기를 만들어서, 가운데를 뚫고 어깨걸이로 지고서 들고 나왔다. 급장을 맡았던 나는 (변기영 몬시뇰, 당시 12 세) 엄마 역을 맡아, 가장하여 머리에 수건을 쓰고, 밭을 매다가 군대 가는 아들(검은 양복 뒤)을 따라나선 장면. 그 뒤에서 그늘에 얼굴을 가리고 있다.- 자세히 보면, 많은 어린이들이  고무신도 못 신고, 맨 발로 학교에 다니는 코흘리개들이었다. 전쟁 중이었으니, 고무신 공장도 제대로 돌아가지 못하던 시절!

전쟁중이라서, 점심 도시락을 싸가지고 오는 학생은 한 반에 한 두 명 정도였다. 가장행렬하는 우리 코흘리개 어린이들을 자세히 보면 고무신도 못 신고 온 맨발의 꼬마들이 적지 않다. 지금 레바논 피난민 수용소의 어린이들 수준이었다. 

그래도, 빈 속으로, 맨 발로 온종일 뛰어놀며 즐거웠던 시골 국민학교 시절!! 이 때 전교생 우리 어린이들은 날마다 학교에 가고 올 때, 목이 터져라고 신나게 노래를 불렀다. 이 노래를 크게 자주 부르면 중공군(당시에는 전방에서 후방으로 휴가 나온 우리 큰 형님들이 말하기를, 북치고, 꽹과리 치며 떼로 몰려온다고, "똥뗑이 놈들"이라고 불렀다)들이 모두 물러갈거라고 했다. 

마치, 임진왜란 때, 남도 해안에서, 마을마다, 매일 밤, 아녀자들이 손에 손잡고, "강강 수월래! 강강 수월래!"를 큰 소리로 자꾸 부르면, 왜놈들이 바다 건너로 쫓겨갈 거라고, 믿었던 것처럼!!!그래서 우리 어린이들은 떼놈들이 물러가도록 아래 노래를 자주 큰 소리로 불렀다.

"무찌르자, 오랑캐, 몇 백만이냐 ? 대한 남아 가는 데 초개(草芥)로구나 !
나아가자 ! 나아가 ! 승리의 길로! 나아가자! 나아가, 승리의 길로 !~ ~ ~ ! "

당시 중공군 150만 명 중에 우선 100만 대군이 모택동 아들과 함께 북한의 인민군을 도와 우리와 싸우러 내려와 38선을 넘어 우리나라를 침략하므로, 전국 어린이들은 군가를 부르며, 애국심을 불태웠다. *초개(草芥)- 풀끝에 맺힌 이슬.


남사국민학교 졸업사진(6학년2반) 단기 연호를 쓰던 시대다. 우리가 국민학교를 졸업한 단기 4286년은 1953년이다. 이 한장의 사진은 우리들에게 매우 소중하다.우리 반(6학년 2반) 담임 선생님은 권오균 선생님이셨고, 6학년 1반 담임 선생님은 이보현 선생님이셨다. 남사국민학교의 교가를 작곡하셨다고 들었다(교가 가사 작사는 이일령 교장 선생님으로 후에 용인군 교육감 ?). 내 기억에 우리 어린이들은 대부분 집에 돈이 없어서, 졸업기념사진을 찍을 엄두도 못내고, 1장씩 살 돈도 낼 수 없는 집이 적지 않아, 담임선생님이 자신의 월급에서 지불하였던 것으로 생각나며, 졸업사진 찍기 몇일 전부터 담임선생님은 미리 몇차례 우리들에게 일렀다. 졸업기념사진은 오래오래 간직하고 보는 것이니, 옷을 빨아 입고 오도록 하여, 이른 봄이라 좀 선선한데도, 특히 여학생들은 하얀 저고리와 버선에 검은 고무신을 신고 오라고 하였다. 그래도 여학생 1명은 구호물자에서 사서 입힌 누런 어른 상의를 줄여서 입고다녔는데, 졸업사진 찍는 날도 힌 저고리 검은 치마를 안 입고 그대로 왔다. 그 시절, 전쟁 중 시골이라서 우리들은 고무신이 찢어지거나  어디가 뚫어지면, 마을에 다니는 신길이 장수 아저씨한테 외상으로 고무신에 가죽을 대고 꾀매어 신던 시절이다. 졸업사진의 여학생들 고무신이 모두 고무신 코가 뾰족한 여자용이 아니라, 뭉둑한 남자용을 빌려서 신고 온 어린이들도 보인다.  

<사진을 보면서 ( )안은 살던 마을 이름. 맨 윗줄 오른편부터,생각나는 이름들:<필자, 변기영 당시 14세, 권봉주(창말) 이름 기억 안남, 김영균(각궁말, 작고), 남선우(외동촌), 양만옥(아리실, 반장 선거 때마다 부반장이 되었다. 나는 만년 반장(90%이상 득표, 양만옥은 10% 내외, 우리는 모두 반장이나 부반장을 하기 싫어했고, 억지로 해야 했다),김순태(아리실, 작고), 김진영(중부뜰), 박재호(버등이), 구본욱(통골), 이상철(새말), 김종만(버등이), 이름 기억 안남,이한봉(순뭍), 홍승준(뒷말, 30대에 작고),김학영(통골), 윤학영(아리실), 공영택(중부뜰), 여학생들 5명 중 맨 왼쪽 끝이 장순강(각궁말),다음이 권혁주(방축골,작고), 최돈웅(방축골),권혁문(방축골, 현재, 서울 강남성모병원 근무), 아래서 두번째 줄 여학생들, 우편부터, 이옥순(각궁말), 이름 기억 안남 3명, 5번째, 안수강(중부뜰, 만년 여자 부반장, 몇년 전 작고 소식을 들음, 훗날 우리 반에서는 당시 유일하게, 대학교(서울서 숙명 여 중.고를 거쳐 숙명 여대 입학)에 들어갔다고 들었다. 필자가 서울 가톨릭대학(신학과)에 정식으로 들어간 것은 1966년 봄이었다. 단임선생님 좌편으로 4명은 모두 이름 기억 안남, 좌로 두번째 누런 색 상의를 입은 동창이 조화형(?아버지가 음악 선생?),맨 아랫 줄, 좌로부터 3번째가 윤상금(? 중부뜰),그 다음이 하성열(각궁말, 작고 ?), 담임선생님 우편으로 2번째가 남인우(외동촌), 이 외의 동창들은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데, 그래도 내가 6년 간 학기마다 반장을 맡아서 출석부를 가지고, 이름을 불렀기 때문에 이만큼이나 생각나는 것이고, 틀리는 경우가 꽤 있을 텐데! >

졸업한 후 한번도 만나지 못하고 50여년 만에 남인우 동창은 몇년 전 천진암 성지로 나를 찾아왔으나, 하도 늙어서, 서로가 서로를 물론 전혀 몰라보았다. 내가 위의 졸업사진을 가지고 나와서 함께 찾아보았으나, 내 자신도, 그 남인우 동창 자신도, 자신의 사진을 한동안 우리는  모두가 찾아내지 못하였었다.세월도 가고, 코흘리게 어릴적 동무들도 가고, 우리의 기억도 사라져 흘러가고  있다.!!! - Msgr. Byon

용인, 남사국민학교 제16회 졸업기념 사진(1953년 3월), 6학년 1반(남학생들)과 2반(남녀 합동) 모두가 함께 찍은 기념사진. 1학년 때 남학생들로 우선 40명으로 1반을 만들고  남은 남학생들과, 1개 반 40명이 안되는 여학생들을 합쳐 혼합으로 2반이 만들어졌으나, 그래도 1반보다 숫자가 적었다. 그 당시 교장선생님은 한승운 장노님으로 기억된다.

최근 윤학영 동창이 김순태, 권혁주, 안수강, 홍승준, 등의 작고 소식을 내게 전해 주어서, 먼저 간 영혼들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우리 모두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같은 길을 가고 있다. 동창 윤학영은 독일에 가서 오랫동안 포도주  제조 기술을 습득하고 귀국하여, 유롭의 어느 나라 포도주보다도 못지 않은 아주 양질의 국산 포도주를 제조하였으며, 재작년 지금 내가 거하는 이곳 곡수성당에 당시 교황대사 오스발도 파딜랴 대주교님과 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님이 곡수성당 축성차 오셔서 여러 신부님들과 내외 귀빈들과의 오찬에 윤학영 동창의 특제 포도주가 격찬리에 인끼가 제일 높았다. 윤학영 동창에게 감사를!

시골에서 원래 집이 몹씨 가난하던 나는 국민학교 졸업 후, 천주교에 입교하여, 남다른 인생관으로, 1971년 사제가 되기까지, 또 사제가 된 후에도, 출가한 성직의 길을 걷느라, 한번도 동창회에 참석을 못하였고, 특히 은사님들을 찾아뵙지 못하여 늘 미안한 마음을 느꼈다. 그래서, 어릴적 국민학교 꼬마 동창들이 하나씩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도 몇년 뒤에서야 들어서 겨우 아는 처지가 되어, 문상한 번 못가고, 기도할 뿐이다.

"주님, 우리 국민학교 동창들이 이제는 모두 80 여세가 되오니, 늙으막에 몸이라도 건강하게 보살펴 주옵소서!" 

하고 기도할 뿐이다.-  Msgr. Byon


제1회 살레시오 수련자들(1962.2.14~1963.2.23), 뒷줄 우측에서 두번째가 변기영 수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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