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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천주교회 창립사

Church history in Korea

하느님의 종 權哲身 암브로시오와 權日身 프란치스코 하비엘

글 :  김학렬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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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8월 27일에 평화방송 TV에서 녹화한 장하다 순교자 프로그램의 요약이다.
교회사의 원칙을 통해 본 한국천주교회의 창립선조
 
- 하느님의 종 權哲身 암브로시오와 權日身 프란치스코 하비엘 -
 
2008105일에 양평에서 권철신 가문이 살던 장소를 사진과 같이 확인하였다. 그날 양근성지에서 순교자현양대회미사를 봉헌한 후, 성지주임 권일수 신부님과의 대화 중, 선상순례를 언급하면서 강가에서 감호암(鑑湖岩)이 새겨진 바위를 발견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감호암을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은 성지주임 권일수 신부님이었다. 그러나 그 의미를 알고 있었던 필자는 즉시 배를 타고 가서 그 金石文을 확인하였다. 권철신 묘지명을 읽고 鑑湖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 권철신 묘지명에,
公諱哲身字旣明自號曰鹿菴名其所居曰鑑湖安東之權也라고 하였다.
 
족보에 나오는 이름은 철신(동생들의 이름은 제신,일신,득신,익신), 자는 기명, 스스로 지은 호는 녹암(남인들이 주로 의 호를 사용하여, 직암 권일신, 순암 안정복, 사암 정약용, 광암 이벽), 그 유명한 거처의 이름은 가로되() 감호라 한다(자가 앞에 나오면 名所, 名人, 名歌手, 名醫, 名答, 名山, 名門, 名勝地 등 이름이 나있는 훌륭하고 우수한이란 형용사로 쓰인다.). 본관은 안동 권씨다.
 
권철신 묘지명에, ‘아들과 조카들이 집안에 가득하나 마치 친형제처럼 화합하니, 그 집에 10여 일이나 한 달을 머문 뒤에야 비로소 누가 누구의 아들이라는 것을 겨우 구별할 수 있을 정도였다. -노비(奴婢)와 전원(田園), 또는 비축된 곡식을 서로 함께 사용하여 내것 네것의 구별이 조금도 없으니, 집에서 기르는 짐승들까지도 모두 길이 잘 들고 순하여 서로 싸우는 소리가 없었다. -진귀한 음식이 생기면 비록 그 양이 얼마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반드시 고루 나누어 종들에게까지 돌려주었다. 이는 7죄종을 극복하며 덕스러운 삶을 사는 칠극을 실천하는 집안으로서, ‘친구와 형제를 한 몸처럼 아끼는 데에 힘쓰니, 그 문하에 들어간 자는 다만 한 덩어리의 화기(和氣)가 사방으로 퍼져 마치 향기가 사람을 엄습하는 것이 지란(芝蘭)의 방에 들어간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뿐이었다.’고 하였다. 신앙에 있어서도 4대를 이어가는 순교자들의 가문이요, 이 집안에서 동정부부들의 삶이(이루갈다, 권데레사) 다 나오는 성인과 복자들의 집안이다.
 
[감호수창첩]에 권철신의 한시 11수가 전한다. 감호에 낙향하여 세거하기는 증조 흠 때부터였는데, 함경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하성래, 윤유일전 p. 31)
 
과거(1784. 9) 양근 갈산에서(cf.1906보감, 지금의 양평읍사무소와 양평 고등학교 일대) 이벽(李檗)이 처음으로 서교(西敎)를 선교할 때 감호로 찾아가 10여 일 동안 머물며 형제들을 설득하였다.(달레상 311에서는 감산이라 하였는데, 이는 감호와 갈산의 합성어일 것이다.)
 
1795년 실포사건 후에, 주문모 신부는 박해를 피해 최인길의 집을 떠나 창동, 석정동, 사축서동으로 피하였고, 경기도 양근의 권상문(권철신)의 집에서도 3일을 머물렀다.(추안, 순조1315, 주문모공초; 달레 상 390-54, 양근직승거삼일).
 
권철신의 형제들 52녀가 양근 한강포에 산다고 하였고(1807 정묘보), 사학징의에서도 권상문이 양근 한강포에 살면서 과거공부를 한다고 하였다.
 
2. 천진암강학
 
. Maubant 나신부1838123일에 양지 공소에서 쓴 편지에, 조선에 그리스도교의 창립(l'etablissement)에 관하여, 이벽과 이승훈이 노력하였다고 적고 있다.
 
. 페낭신학교 교과서. 
우리나라의 3번째(정규하, 강도영, 강성삼) 신부님들부터 배운 말레시아 페낭신학교COMPENDIUM HISTORIAE ECCLESIASTICAE, PULO-PINANG 1885의 라틴어 교과서의 내용은,
 
R. 그때에, 어떤 한국의 학자들이 고적한 곳으로 물러가서 철학 공부를 하였다 ; 그들 가운데 특출한 사람들은 이덕조(Ni-Tek-Tso) 로서 별호가 벽이(Piek-i , 즉 고집이 센, 완고한 사람, obstinatus)라는 이와, 권철신(Kuen-Tsiel-Sin-i), 그리고 정(Tieng)씨네 두 형제들(정약전 Tieng-Jak-Tsien 과 정약용 Tsieng-Jak-Iong)이었다. 그들은 인간 본성과 하늘과 세상에 대하여 다양한 문제를 검토한 후, -곧 이어 하느님의 계명 실천 방법을 (적응)훈련하는 데 열중하게 되었다. (1770)
 
. 권철신 묘지명에, ‘선형(先兄) 약전(若銓)이 공을 스승으로 섬겨 지난 기해년 겨울 천진암(天眞菴) 주어사(走魚寺)에서 강학(講學)할 적에 이벽(李檗)이 눈오는 밤에 찾아오자 촛불을 밝혀 놓고 경()을 담론(談論)하였는데하였다. 정약전과 정약용, 이승훈, 이존창, 윤유일도 천진암강학에 참석하였다고 판단되나, 순교자가 된 사람들의 이름을 정약용은 생략하였을 것이다.
 
그 근거로는 정약전 묘지명에, 與李潤夏李承薰金源星 等과 돌같이 굳은 친분을 맺고 (定爲石交) -약전이 녹암(鹿菴) 권철신(權哲身)의 문하(門下)로 들어가 가르침을 받았다. -그때 그곳에 모인 강학회자는 김원성권상학(權相學)이총억(李寵億) 등이었다. -이때 이승훈도 자신을 가다듬고 노력하였으므로(當此時 李承薰亦淬礪自強), -함께 서교(西郊)로 나아가, 향사례(鄕射禮)를 행하니, 모인 사람이 백여 명이었다.
 
또한 이승훈과 권일신이 윤유일을 1790裝送之時, -裝送之事(추국일기 1801.2.18. 권철신공초) 하였는데, -이존창이 1776년에 13세의 이총억을 따라서 권철신의 문하에 들어왔다.(윤유일전 p. 27-28). 이후 수년이 지나, 이승훈은 미리 준비되어 북경에 파견되어 갔고, 결국 세례를 받고 돌아왔다. 아무리 주변 신부들이 반대하였다고는 하나, 40일 만에 필담으로 교리를 배워 영세하였다는 것은, 이벽이 잘 준비하여 보낸(꾸며서 보낸 -裝送李承薰) 사실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3. 양근 감호 갈산에서 이벽의 선교활동이 있었는데, 그 전에, 이벽은 이승훈의 귀국 후에 책을 받고나서 6개월 동안 연구에 매진하였다.(10년 이상 천진암 독서처의 공부와, 이승훈의 귀국 후 4월부터 9월까지). 그리고 나서는 감호로 권철신을 찾아 나섰다. 과거(1784. 9; cf. 달레상 311 -양근 갈산에서 강의) 이벽(李檗)이 처음으로 서교(西敎)를 선교(宣敎)할 때 따르는 사람이 많아지자, 문효세자(文孝世子 1782.10.-1786. 6.)를 가르치는 동궁(東宮)의 관원(官員)이 된 권철신의 집이 있는 양근 감호를 방문하여, “감호(鑑湖)는 사류(士類)가 우러러보는 사람이니, 감호가 교에 들어오면 들어오지 않는 자가 없을 것이다.” 하고, 10여 일을 묵은 뒤에 돌아간 일이 있었는데, 그때 공의 동생 일신(日身)이 열심히 이벽을 따랐다.’(권철신 묘지명, -弟日身熱心從檗).
 
선교의 결실로 세례식이 있게 되었는데, 17849월에 수표교의 이벽 성조의 자택에서, 이승훈은 이벽, 권일신, 정약전, 정약용에게 세례를 주었다.(추국 1801. 2.18.). 이어서 중인 계급의 최창현, 최인길, 김종교 등 학식과 덕망이 뛰어난 이들을 입교시켰다.(달레상 307-314).
망설였던 권철신도 인천(동생 권득신의 집?)에서 권일신이 쓴 편지를 읽고(추안1801 1차 심문중, 주재자 흠숭, 삼혼설, 4근본원소. 그래서 이 몸도 그 책들을 보았습니다.), 178412월 이전에(cf.안순암의 2편지)암브로시오로 세례받았다.(달레상311.). 1790. 10. 16.의 구베아 주교의 편지에는, 천명도 넘는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다고 하였다.
 
4. 권철신 암브로시오의 신앙.
 
묘지명에, ‘그러나 공은 서교를 믿지 않고 우제의(虞祭義)1편을 지어 제사의 뜻을 밝혔다.’며 정약용은 권철신의 신앙을 감추고 있다. 그러나 권철신이 1791년 제사 문제가 일어나기 전에도, 허례와 허식에 대한 반론의 글로 虞祭義란 글을 지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안순암의 1782년 편지가 그 증거이다. 안순암의 1782년 권기명에 답하는 편지에, ‘이러한 문제들은 기왕 의견이 서로 합치하지 않을 경우, 결국 갑을논박이 되어 합일점을 찾기가 어렵기 마련이니, 이후로는 서신 왕래에 피차 안부나 살피고 정담이나 나누는 것이 좋을 듯하네.’ 하였다.
 
이어서 안순암이 갑진178410(?) 편지로, 권기명에 답하면서(6,), ‘덕조(德操 이벽)가 얼마간의 서책을 가지고 갔다는데(9월에 감호를 찾아 선교하여, 일신 열심종벽!) 이곳을 지나면서도 나를 찾아보지 않고 그냥 지나쳐 버린 그 까닭을 알 수 없군. 아마 공부의 길이 달라 서로 얘기할 것이 없기 때문이었을까? 남을 선으로 인도한다는 천주의 뜻은 틀림없이 그렇지 않을 것일세.’ 하였다.
그리고 안순암의 을사일기에서, ‘내가 권기명과 이사흥에게 편지를 준 것이 갑진178412월이었는데, 을사17853월에 천학의 옥사가 있었다.’고 하였다.(김시준 벽위편 p. 97.).
 
안순암이 갑진178412월에, 권기명에 답하는 편지에서, (cf. 벽위편, 안순암의 을사일기 뒤에), ‘그런데 지금 또 듣자하니, 공이 서양의 천주학에 있어 경망하고 철없는 젊은 것들의 앞잡이가 되고 있다는데, 이렇게 갑자기 이학(異學)으로 가버리다니 과연 어찌해서 그러한 것인가?’ 하며, 권철신의 천주교신앙을 책망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천주학에 빠져버린 공들이 마음을 씻고 발길을 돌려 그 폐습을 털어 버리지 않고, 도리어 나를 지칭하여, “지옥은 바로 아무(순암) 어른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다.”라고 한다면, 나는 이 말을 달게 받아들여 더 이상 차마 이러한 추태를 부리지 않겠네.’(순암집 6, ).
 
권철신과 이사흥에게 보내는 편지 1784(12?)에서, ‘서양선비의 학문에 이가환, 정약전, 이승훈, 이덕조가 서로 결속하여 신학의 학설을 열심히 익힌다는 소문이 파다하다고, -문의에서 온 (이기양 어머니의)언문편지 가운데, 이기양의 두 소년(이총억과 방억)이 모두 이 공부를 한다고 칭찬하여 마지않았다고 함으로써, 이기양 가문도 모두 신앙하였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
 
이사흥에게 답하는 을사1785년 봄의 편지에서, ‘저번에(1784년 겨울?) 성오 권일신이 힘써 이 학문을 내게 권하였지만, 내가 귓전에 지나가는 바람을 듣듯이 하였네! -80난 늙은이가 배울 수 있는 바가 아니니라고 함으로써(앞서 정약전이 이 늙은이가 가련하다고 말한 까닭이다.; : 정약전의 신앙열정이 이와 같았으나, 표현이 절제되고 최소화된 정약용의 선중씨 묘지명에서는, 신앙하지 않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니, '일찍이 이벽(李檗)과 종유(從遊)하여 역수(曆數)의 설을 듣고는 기하(幾何)의 근본을 연구하고 심오한 이치를 분석하였는데, 마침내 서교(西敎)의 설을 듣고는 매우 좋아하였으나, 몸소 믿지는 않았다.' 이는 권일신이 장인에게까지 선교하였음을 드러내고 있다. 뒤이은 편지에서, ‘을사1785109일에 양지 수령 유사형이 찾아와 말하기를, ‘문산()의 수령(이기양)이 틀림없이 양근으로부터 찾아와 뵈올 것입니다. 다음날 -나와 그의 나이가 훨씬 차이나고, 수십 년 동안 스승의 예의로 나를 대하여 오다가 하루아침에 이와 같으니, 이것이 천학의 예법인가?’ 하였다.
나와 절친한 사람이(=이벽? 권일신?) 천주학(天主學)을 하고 있는데, 그 학설은 우리 유가(儒家)와 다르기 때문에 선입관(先入觀)이 마음속에 자리 잡아 이상한 것이나 찾고 괴상한 행동을 하지나 않을까 염려되어, 대략 나의 견해로 그대(사흥 이기양)와 녹암(鹿菴)에게 질문하였으나 끝내 한 자의 답장도 받아 보지 못하였으니, 틀림없이 그대들에게 버림을 받은 것이다.’ 하였다.(순암집 제8, (), 이사흥에게 답하다. 을사년 1785).
 
5. 명례방 집회와 을사1785년 박해(이벽의 순교와 권일신의 용맹)
 
서울과 한강 유역의 선비들이 이벽의 전교로 천주교를 신앙하기 시작하자, 양반가문에서는 물의가 일기 시작하였다. 17853월경 명례방에 있던 김범우의 집에서, 이벽이 정약용 형제들과 권일신 부자와 이승훈 등을 앞에 앉히고 교회예절을 거행하며 교리 강좌를 하다가 추조들에게 적발되었는데, 이른바 을사추조적발사건이다.(징의 378; 변기영, 96 , 79). 권일신은 이 집회에 아들 권상문, 이승훈과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형제, 김범우 등 중인 수십 명과 함께 참석하였다가, 형조의 금리(禁吏)들에게 발각되어 형조로 압송되었다. 이때 중인 출신 김범우만 투옥되고 나머지는 석방되자, 권일신은 아들 권상문과 이윤하(매부). 이총억. 정섭 등을 데리고 형조판서에게 나아가, 성상을 돌려줌과 동시에 김범우와 함께 처벌해 달라고 호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서적은 형조의 뜰에서 불사르고, 전국에 서학을 금하는 효유문(曉諭文)이 전달되었다.(최석우, 815; 벽위편 2, 을사추조적발 ; 정조 15118; 징의 378).
 
이 사건으로 김범우는 많은 매를 맞고 단장(단양설과 단장설!)으로 귀양 가서 다음해 가을 쯤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이승훈의 1789 서한; 징의 82; 달레 상 318), 많은 사람들이 다투어 유배를 가기를 원하면서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최석우,815; 벽위편 2, 차대연설 신해1791 1025). 교회의 지도급 인물들에게도 박해가 가해져, 양반 지도층 신자들인 이벽. 이승훈, 정약전, 약용 등이 문중의 박해를 받게 되었다. 이들은 집안의 박해를 받으면서, 자신의 신앙을 은폐하기 위해 두 가지 뜻을 가진 언사를 주로 사용하였는데, 이는 형식적인 무마용으로서 당시 많은 신자들 특히 이벽, 이승훈, 권일신 등이 취하던 방식이었다.(달레 상 320; 옹위 49).
 
1785을사박해로 이벽 성조는 성 막시밀리아노 콜베 신부님처럼, 아사벌에 이은 독살로, 순교하게 되었다.(이장기록 참조). 양반 집안들의 문중박해로 이승훈과 정약용 형제들은 자유롭게 활동하지 못하였으나, 권철신 형제들은 이미 부친이 작고하였으므로(父親 孟容亡 경자1780) 집안의 어른이 되어 비교적 자유롭게 신앙활동을 할 수 있었다.
 
박해가 4/5곳에서 일어나 체포되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으며, 10명 넘게 피를 흘리며 증거하였다.(이승훈의 1789 편지). 이승훈은 아버지의 엄한 반대와 악우들의 비방에도 끝까지 참고 성교를 봉행(隨後厥父嚴禁 惡友亂謗 承薰猶忍耐奉敎) 하였다.(백서 45).
 
이승훈의 1789년 편지에는, 이승훈이 세례를 받을 때 선교사에게 약속한 대로, 1784말에 그라몽 신부에게 편지를 썼고, 전령이 17854(음력?)에 돌아왔으나 이미 박해가 시작되어 그라몽 신부의 답장과 책들을 빼앗겼다.
 
6. 모방성직제도와 권일신의 활동.
 
양평 용문사 대웅전 앞의 안내판 글에서, 권일신의 14대조인 개국공신 권근이 용문사에 모셔진 큰 스님 정지국사의 부도비문을 작성하여 모셨다는 내용을 확인하면서, 권일신 성현이 평상시에도 양근 감호 뒷산의 용문사를 자주 찾아, 선조들의 정신을 이어받으며 정신을 수양하려고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양촌집 38, 정지국사 부도비; 답사기 참조).
 
을사년1785 박해로, 이벽을 중심으로 명례방 집회가 열리던 중, 추조금리들에게 적발되어 성물을 다 빼앗기고, 집주인이던 김범우는 매를 맞고 귀양을(밀양 단장) 가게 되었다. 이후 이벽 성조와 이승훈, 정약용 집안에서는 문중박해가 일어나, 이벽성조는 순교하시고, 이승훈도 정약용도 드러나게 신앙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권철신, 권일신 성현의 아버지는 경자년1780에 이미 작고하셨으므로, 권일신은 집안의 어른으로서 비교적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다. 을사박해로 교회가 움츠려든 상황에서, 권일신 성현은 성령의 힘을 얻어 교회의 활력을 불어넣기 위한 피정을 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그래서 1786년 봄 경, 옆 마을 도주울(도곡리)의 친구인 조동섬 유스티노와 함께 용문산을 찾아 8일 동안 피정을 하게 되었다. 이 피정의 결실로 평신도들이 스스로 모방성직제도를 세워, 이승훈도, 정약용과 정약전도 모두 신부가 되었고, 권일신은 주교로 활동하게 되었다.(달레 상, 322-).
 
7. 전국적인 천주교 전파.
 
한국 천주교 신앙의 시작이 이벽과 권철신의 제자들이 모인 천진암강학에서 출발하였듯이, 신앙의 전파도 이들에 의하여 주도되었다. 이벽으로부터 전교를 받아서 천주교를 믿게 된 이들은 먼저 권철신과 권일신 형제와 정약전. 약종. 약용 형제들이었다. 권철신의 제자들이 한국천주교회의 창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됨에 따라 양근 의 감호는 자연히 천주교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고, 특히 권일신이 그 주축이 되었다. 권일신은 가족과 하인은 물론이고 친구와 친지 등 주위의 많은 사람들에게 천주교를 전하여 입교시켰다. 권일신의 전교로 입교한 집안사람들로는 아들 권상문, 권상학, 권상벽과 권상문의 아내 오숙혜(오석충), 이윤하의 아내가 된 누이 권씨와, 조숙의 아내가 된 딸 권데레사(동정부부), 조카 권상술(노방)과 권상립(기인, 요한), 권상익, 비 순덕과 구애 등이다(서종태, 양평군사 상, 493).
 
망설이던 그의 형 권철신도 권일신의 권유로 영세를 받아 입교하였고, 인근 마을에 거주하던 윤유일과 조동섬 등도 입교하였다. 권철신은 적극적으로 전교활동을 전개하지는 않았지만, 인근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는데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북경을 왕래하는 최초의 교회 밀사로 윤유일(바오로)이 선정되는데, 그가 거주하던 한강개는 (cf. -씨앗, 21; 1760년 여주군 금사면 금사2리 점들에서 태어나, 양근 한강개 마을(강상면 대석리)로 이사하였다.) 역시 한강 물길로 연결되는 곳이어서, 강 건너 이웃 감호(갈산) 마을의 권철신에게서 신앙의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충주지방의 천주교 전파도 권철신의 인척관계로 시작된다.(양평사, 497). 권철신의 조카인 권상익(권득신)을 사위로 맞은 충주의 이기연은 권일신으로부터 교리를 배우고 입교하였다. 이기연은 가족과 친지들에게 신앙을 전하여, 아들 이중덕, 며느리 권아기련, 조카 이종덕, 종질 이문덕, 종손 이관기 등과 집안의 비녀까지 교리를 배워 천주교를 믿었다. 권철신의 사위인 이재섭(남보498, 연안 이용섭; 그 후손이 이문우 요한 성인이다.)도 충주지역에서 신앙생활을 하였고, 권철신의 처남인 남필용도 충주에 살면서 1791년에 입교하였으며, 남필용의 아들 남제도 부친에게 교리를 배워 천주교를 믿었다.(사학징의 62, 169-170, 178, 182-4, 274-275, 282-6).
 
권일신의 전교로 충청도 내포의 이존창, 전주의 유항검이 입교하여 지방선교의 발판이 마련되었고, 서울에서는 진산의 진사 윤지충과 홍낙민, 최창현, 지황 등 10여명이 입교하였다.(옹위48; 서종태 493). 이로써 한국천주교회는 서울에 공동체가 설립됨과 거의 동시에 경기. 충청. 전라 지역에도 공동체가 생겨났다.
내포지방 여사울의 이존창은 원래 이기양 밑에서 공부하다가 권철신의 문하로 옮겨 학문을 닦던 중, 1784년 겨울 무렵에 권일신으로부터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았다. 그의 발길은 당진과 보령의 염전지역에서 삽교천 인근의 덕산, 그리고 공주와 청양으로 이어졌다. 김대건 신부의 집안과 최양업 신부의 집안도 그의 가르침으로 신자가 되었다. 후에 서울로 이주하여 지도층이 된 홍필주와 황심도 역시 이존창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전라도 지방의 경우도 전주와 진산을 중심으로 복음이 전파되었는데, 이는 양근의 권철신을 매개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전주의 유항검은 1784년에 권철신을 찾아갔다가, 권일신의 가르침을 받고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달레 상 314; 징의 228) 진산의 윤지충도 권철신의 제자인 정약전의 영향으로(이종 4) 1784년에 입교하여, 1787년에 정약전을 대부로 이승훈에게 영세하였다. 이어서 윤지충의 영향으로 무안. 무장, 고산 지역의 신앙공동체도 생겨나게 되었다.(달레 상 531)
 
그 이름의 권위로 많은 외교인이 복음으로 끌려왔다. 여주의 노론 대가인 김건순이 18세에 양부가 세상을 떠났을 때, 권철신 암브로시오에게 문의하고(cf. 우제의) 송조 때의 의식으로 장례를 치루고 긴 변호문을 썼는데, 이가환도 이에 감탄하였다.(백서 56). 김건순은 밤에 권철신을 찾아가 만나 신앙을 갖게 되었고, 이후 17978월에 정광수가 전달한 주문모 신부의 편지를 받고 상경하여, 올바른 구원의 길로 나아가, 여주의 이중배, 원경도, 이희영 등을 개종시켰다. 사학징의에 의하면, 김건순은 국청정법죄인으로 처형되어 순교하였다.(백서 60;달레 440, 489, 491 ).
 
강완숙의 진술(사학징의)에서, ‘제가(주문모신부의 편지) 항시 편지를 주고받은 곳은 정약종, 약용, 오석충, 권철신, 문영인(폐궁 나인), 권철신의 손아래 누이(이윤하) 등의 집입니다. 편지도 압수되었으니, 만번 죽어도 아쉽지 않습니다.’ 하였다. 정광수(사학징의)의 진술에서는, 1791년에 권일신한테 배웠고, 1799년에 벽동에 최해두와 조이수(조섭)의 세 집의 담을 터 첨례장소(精舍)로 꾸몄으며, 홍문갑(강완숙)의 집에 머물던 주 신부를 모심과 동시에, 주신부의 편지를 여주의 김건순에게 전하고 답장을 받아오는 등의 활동을 하였고, 활동 상황을 적은 정광수의 일기가 있었다.
이렇게 양근 감호에 사는 권철신, 일신 형제가 이벽의 전교로 신앙을 가지게 되었고, 이어서 그 제자들에 의하여, 충청도의 내포지역과 충추지역, 그리고 전라도의 전주와 진산 등지로 널리 전파되어 갔다. 그리하여 정조 191795에는 금정, 예산, 충주 등 호서지방에 천주교인들이 많았으므로, 이가환. 정약용. 이승훈을 보내어 천주교를 탄압하고자 할 정도였다.(달레 상 396 ; 정조 19725).
 
8. 제사금지와 신해 1791년 박해.
 
윤유일은 교회의 밀사로 선발되어 1789년에 이승훈과 권일신의 편지를 들고 북경으로 떠났다. 윤유일은 은자 20냥에 사지마私持馬란 명목으로 일과一窠를 샀고, 이가환도 은자 500냥을 내놓았다.(징의 p. 232; 하성래, 윤유일전 p. 69 ; 홍대용의 을병연행록에는 112일에 출발하여 1227일에 북경에 도착하는 3,111리 길이었다.). 윤유일은 구베아 주교의 사목서한과 함께, 모방성직제도의 중지와 제사금령을 받아옴으로써, 박해를 피할 길이 없게 되었다.
 
왕조실록 1791113일 기록에, ‘평택 현감 이승훈과 양근 사람 권일신을 잡아다 문초하다. -권일신의 아들 세(상학,상발,상문) 사람은 바로 안정복의 외손자인데, 30리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살면서도 모두 그 외조부의 장례에 가보지도 않았으니, 그 스스로 교주로 자처하는 것이 이보다 더할 수 없다 하겠습니다.’ 하였다. 이렇게 권일신은 전해에 윤유일이 받아 온 제사금령을 실천하여, 장인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순암 안정복 년보에, ‘80세로 7월 계사일 오시(午時)에 침실에서 돌아가셨으나’, 권일신의 일가는 병을 핑계로 제사에 참여하지 않은 것이다. 구베아 주교의 제사금령이 1790년에 윤유일을 통해 조선에 전달되자, 권일신 일가도 이 금령을 지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윤지충도(1759-1791 바오로, 1783년 진사) 5월에 모친상을 당하자, 전염병을 핑계로 삼아 8월 그믐날에야 기한을 넘겨 장사를 지냈다. 이에 대하여 정조 1791. 10. 20.에 대사간 신기를 시작으로 상소가 잇따르자, 윤지충은 10. 26.에 관아에 자수하여, 117일부터 취조가 시작되었고, 1113일에 참형으로 순교하였다.(cf. 시복자료집 1).
 
권일신의 순교열망은 1785년에 이어 1791년에도 스스로 형조에 자수함으로써 확인 되었다. 권일신의 이같은 순교 열망은,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가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와 같은 방법을 나타낸 것으로서, 고문으로 본성이 드러날 것을 염려하여, 이미 양심선언을 한 것이었다. ‘형제들이여, 내가 이 생명을 얻는데 방해하지 마십시오. 내 하느님의 수난을 본받는 자가 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내가 여러분에게 도착했을 때는 나를 믿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부탁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여러분에게 쓰는 말을 믿으십시오. -내가 수난을 당한다면 여러분이 나에게 호의를 모인 것이고, 수난에서 제외된다면 여러분이 나를 미워한 것입니다.’(성무일도, 연중 10주간 화요일).
 
이리하여 벽위편, 신해진산의 변, 19. 장악원 사계에서, ‘초사흘에(1791. 11. 3.) 비변사에서 계를 올리기를, 권일신이 서학에 빠진 것은 곧 친지들이 모두 들어 아는 바입니다. 일찍이 을사1785년에 중인 김범우를 핵실할 때, 형조 법정에 들어가서 김가와 같이 벌을 받겠다고 자청하였으니, -교주라 하는 것. -지금 권일신은 양근에 살고 있으니, 만일 잡아오려면 시일이 많이 걸리겠으므로 아직 핵실하지 못하였더니, 일신이 제발로 형조에 들어와(앞서 1791. 11. 1일의 체포령 사실을 알고 2일에 자수?) 함께 벌을 받겠다 함은 뚜렷한 증거로서 그 요학의 괴수가 된 것을 알겠거늘, 하물며 여러 사람이 진술한 것이 한 입에서 나온 것 같으니, -권일신을 형조로 하여금 핵실하게 하여 법률을 바로 잡음이 어떠하오리까? 하니, 전교하시기를, 그렇게 하여라 하였다.’ (벽위편, p. 69. 權日身居在楊根 若發關推捉則 多費日子(이만채=) 姑不得究覈而 大抵日身之自入秋曹 願被同罪者 大是的贓明驗 其爲妖學之窩主’; 김시준역, p. 144). 이에 대하여 정약용의 정헌묘지명에, ‘신해년(1791, 정조 15) 겨울에 호남옥사(湖南獄事)가 일어나자, 상은 번옹에게 명하여 관서(官署)에 가서 목만중홍희운이기경(李基慶) 등을 불러 호남옥사의 사실 여부를 조사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장악원(掌樂院) 조사 사건이다.’ 하였다.
 
권일신에 대한 3차 심문에서, 외조부의 회장에 자식이 참여하지 않은 것은 본인이 사경을 헤매는 중병 때문이라고 핑계를 대었다. 이는 이벽의 순교 때에 문중에서 전염병 핑계를 대던 것과 같은 것으로, 사실상 장인의 제사에 참석하지 않기 위하여, 권일신 본인과 3명의 아들들이 병을 핑계 삼아 참석하지 않은 것이다. 7차 심문 때도, 진술을 계속 번복했던 때문에 30도의 한계까지 치면서 심문할 때까지, 예수를 사망하다고 배척하지 않았고, 사학이라는 2자를 늦게 인정하였다. 이후 소위 회오문이라는 것은 사실상 정답을 불러주는 대로 쓴 듯한 내용으로, 아주 체계적으로 작성된 글로서, 혹형을 받아 죽을 지경에 이른 사람이 썼다고 보기에는, 아주 잘 짜인 글로서, 채제공이나 홍인호 등 측근 누군가 써준 것을 그대로 옮긴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cf. 박광용, <창설주역 2>, 123-; 이기경 벽위편, p. 109- 형조 계목 양근죄인권일신 --6초 일차형문 --7大抵其學異於孔孟之學 乘人五倫至廢祭祀 --卽邪學遲晩納招 --耶蘇二字終不斥言邪妄 --始以邪學二字遲晩.; 신해1116일 형조계 --聖意八耄老母奄奄呼絶 --口招--耶蘇之學妖邪不正納招; cf. 달레 상 359; 김시준역 벽위편 p. 170).
 
권일신이 제사 문제로 문초를 받아 생긴 상처를 이윤하의 집에서 치료하다가, 예산으로 유배를 떠났으나, 뒤따른 자객에 의하여 용인 구읍에서 몽둥이에 맞아 순교하자(족보와 집안 가승), 이후 권철신은 문을 닫아걸고 산문을 나서지 않은 채 조용히 10여년을 보내게 되었다. 이웃 마을에 살던 조동섬도 천주교 서적을 본 죄로 양근 관아의 감옥에 갇혀 아홉 달 동안 형벌과 신문을 받은 뒤에 풀려났다. 이같이 신해박해로 권일신을 잃고 침체에 빠졌던 양근 지역의 공동체는 그의 제자인 윤유일을 중심으로 꾸준한 활동을 편 결과 성직자 영입이란 결실을 맺고, 한국 천주교회는 새로운 활력을 얻게 되었다.(양평사 502).
 
을묘 1795 박해 때에, 주문모 신부는 피신할 수 있었고, 대신 고생을 무릅쓰며 보필하던 윤유일과 최인길, 지황이 신부를 대신하여 1795628일에 재판도 없이 포도대장에 의하여 매맞아(장폐) 순교하였다(정헌 이가환 묘지명). 그들은 결코 주문모 신부의 행적을 이야기 하지 않았고, 끝까지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들의 시신은 비밀리에 강물에 던져졌다.(시복시성위원회, 48) 이 사실로 인하여 이승훈, 가환, 약용 등은 예산, 충주, 홍주(금정) 지방으로 외직을 맡아 낙향하게 되었다.(옹위 70).
 
주 신부는 박해를 피해 최인길의 집을 떠나 창동. 석정동, 사축서동으로 피하였고, 경기도 양근의 권상문(권철신)의 집에서는 3일을 머물렀다.(추안,순조13.15 주문모공초). 이후 충청도 연산의 교우집으로 피신해 다니다가 17965월에 창동에 있는 강완숙(골롬바)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 주문모 신부는 평신도들의 사도직 활동을 체계화하기 위하여 명도회(明道會)를 조직하였다. 서울에는 六會라 하여 황사영, 현계흠, 홍문갑, 김여행, 홍익만, 김이우(?)의 집이 한달에 한번씩 모임 장소로 활용되었다. 초대 회장은 정약종이 맡았다.(믿음의 씨앗, 33).
 
강완숙의 진술에서, ‘제가(주문모신부의 지시로) 항시 편지를 주고받은 곳은 정약종, 약용, 오석충, 권철신, 문영인(폐궁 나인), 권철신의 손아래 누이(이윤하) 등의 집입니다. 편지도 압수되었으니, 만번 죽어도 아쉽지 않다.’고 하였다.(사학징의).
 
9. 신유1801년 박해.
 
제사문제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1798, 1799년에 왕의 밀사로서 신자행세를 한 조화진의 간계로 충청도 해미진영에서는 내포지방의 교우 100명 이상이 순교하였다.(벽위편; 달레 상 397-12 ; 옹위 71; 여진천, 백서해제 34-9, 36-13 ).
 
1791년 진산 사건 이후 양근에서는 권철신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자 하였다. 반대파 홍낙안 등에 의하여, 권철신의 집안에서는 벌써부터 신주를 땅에 묻고 제사를 폐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이기경, 벽위편, p17). 홍낙안은 1791. 9. 29에 이미 좌의정 채제공에게, <권철신은 부모의 신주를 땅에 묻고, 이윤하는 그 아버지와 조부의 제사를 폐한자> 라고 고발하였다.(벽위편, 30). 이어서 천주교를 이단으로 배척, 성토하고 권일신을 교주로 고발하였었다.(벽위편, 42).
 
양근 감호에 사는 권철신의 집안은 본래 이름난 집안이라 남들의 비방도 대단하였다. 셋째인 아우 일신이 신해박해에 죽고 나서부터는 감히 드러내놓고 신앙을 지키지는 못하였으나, 그를 원수같이 여기고 시기하는 자들의 미움과 원망은 점점 심해갔다. 기미년(1799) 여름부터, 그의 고향에서 귀신같이 고약한 무리가 터무니없는 일을 꾸며 관가에 고발하였고, 이에 권씨 자제들도 맞서 대항하였으므로 사건은 장차 크게 벌어지게 되었다. 이리하여 18005월에 양근 지방에서는 많은 교우들이 체포되었다.(백서 11-13). 이 때 양근에서 신주 도난사건이 있었는데, 경신년 국상(1800. 11)후 양근 악당 김모 등이 도둑을 보내, 집안의 4대 신주를 훔치려 하다가 찾아내지 못하자, <권철신이 신주를 태워 없앴다>고 소문을 내었다. 1801신유년 봄에 군수 유한기가 조사하여 벽장 속에 4대 신주가 봉안되어 있음을 확인하고도 느슨하게 다스렸다는 이유로 파면되었고, 새 군수 정주성이 와서 연루자 50여명이 죽거나 유배당하였으나, 권철신 가문의 신주를 훔치려 한 죄는 불문에 붙였다. 늙고 겁이 많은 권철신은 서울로 올라가서 잠시 몸을 숨겼고, 관가에서는 그의 아들 권상문을 대신 잡아들였다.(권철신 묘지명; 백서 13). 권일신의 1791년 순교에도 가담하였을 이들은 이 사건을 기회로 삼아 1801년 신유박해 때에 권철신을 감옥에서 장살(백서 51; 1801. 2. 22에 매를 맞고 죽었다. 그의 시신은 이가환과 함께 기시되었다.)하였고, 아들 권상문을 비롯하여 양근과 여주 지역의 순교자들을 양산하는 계기가 되었다.
 
경기 감사(京畿監司) 이익운(李益運)이 상소하기를, “그 사교(邪敎)의 우두머리를 찾아낸다면 권일신이 바로 우두머리입니다. 일신이 죄를 받아 죽은 뒤에도 그들이 허물을 고치기는커녕 여전히 기고만장하여 왕래가 끊이지 않고 있으니 권철신의 온 집안이 악()을 계속하였다는 것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아도 분명합니다.” 하였다.(권철신 묘지명).
 
이기경의 벽위편 2, 신유박해(p. 247 -)의 문초를 날짜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 부신계 - 이가환, 이승훈, 정약용을 잡아들이라고 함 = 不動終不悛改承薰
 
210/ 대왕대비 殿傳曰 推鞫 - 죄인 이가환, 이승훈, 정약용 原情(사정을 하소연!)
 
211/ 국청죄인 이가환 형문 13, 이승훈 30, 정약용 30, 최창현 30, 권철신 5, 최필공 원정.
 
213/ 三司合啓 - 정약종 윤패상지죄 +원정후 형문 13, 임대인 조동섬 홍낙민 원정.
 
214/ 이승훈과 최창현 面質. 김백순 원정.
 
신봉조 상소 p.263, ‘신이 추국하는 자리에 참석하여 친히 눈으로 보니, 승훈등 3인은 똑같이 완악한 패기가 서려있고, 魔祟마수로써 이용하기를 상습으로 삼고, 刑具차꼬보기를 초개같이 하고 형륙에 나아가기를 낙지에 나감같이 하고 -- 죽자하고 실토치 않으니 (如草芥就刑戮如樂地 - 抵死而不吐!)’, 이는 1795년에 윤유일 등이 緘口無一言 한 것과 같다.(옹위)
 
-- 15/ 승훈 갱추후 10, 김백순 24, 이가환 홍교만 정약전 오석충 홍獻榮 원정.
 
p.270 16/ 李學逵 원정, 이가환 이승훈 정약용 更招, 김백순 4, 홍교만 20.
 
p.272 17/ 정약종 16, 이존창 原情.
 
p. 275 / 16일에 지사 권엄 등 연명 上疏.
 
p.283 17/ 이가환 갱초 12, 이존창 30, 최창현 6, 오석충 30.
 
p.285 18/ 이가환 30, 오석충 20, 이승훈 15, 권철신 갱초.
 
p.285 19/ 권철신 30, 오석충 30도 후 이가환과 면질.
 
p.289 20/ 조동섬 임대인 홍교만 정약전 홍낙민 갱초, 오석충 2, 김백순 이기양 原情.
 
-- 21/ 권철신 이존창 이기양 최창현 更招. / 이익운 上疏.
-- 25/ ‘공의 사형(死刑)을 결정하였다. 35도를 맞은 후, 마침 고문의 상처로 인해 공이 죽자 드디어 기시(棄市)하였으니, 그날이 225일이었다.’(함께 고문을 당한 정약용의 권철신 묘지명)
 
p. 308 26/ 이기양 更招.
 
-- 27/ 이가환 遲晩物故, 권철신 物故. 최필공 부대시참 西小門外.
 
권철신은 211일 공초 첫날에, 이가환이 형문 13, 이승훈 30, 정약용 30, 최창현 30, 권철신 5도의 매를 맞았다. 66세의 이미 늙은 나이어서 죽음이 염려되었으므로 5대의 매를 맞고 그쳤으나, 19일에는 한계치에 이르는 30도의 매를 맞으며 심문을 당하였다. 그러나 이때에 받아낸 추국내용은 고문에 의한 강압 수사로서, 그 자체로 무효에 해당되며, 오히려 끝까지 지인들을 보호하는 사랑을 실천하였음을 볼 수 있다. 이는 <벗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는 말씀을 실천한 것이었다. 고문을 당하는 문초에서도, 권철신은 정약용과 함께 마태오 릿치(이마두)의 적응주의적 제사관을 피력하였고, 교회의 제사금령은 없던 것이 새로 생긴 것이므로, (제사금지는 불변의 교리, 교의가 아니라) 언젠가는 변화될 규정에 불과한 것으로 여겼다고 보인다. 결국 결안문을 작성하기도 전에, 천주교 신앙에 대한 증오심(in odio fidei, 시복시성절차 해설, 49, 54)에서, 박해자들이 죽기까지 매를 때려 장폐로 순교하게 되었다. (사학징의 p. 171. 국청정법 및 사사죄인장폐죄인 명단에 이승훈, 이가환, 권철신 등이 기록되어 있다.).
 
10. 대를 이은 순교와 교회 활동.
 
교회의 지도급 신자들이 모두 순교한 이후, 교회재건에 활발히 참여한 사람은 이여진 요한, 사촌 신태보 베드로, 홍낙민의 아들 홍우송(재영), 정약용 요한 (배교했었으나, 뉘우치는 마음이 생겨 공동사업에 헌신함으로써 속죄하기에 힘썼다.) 등이었다. 이에 조동섬 유스티노와 면천의 한 토마스도 도움을 주었고, 1811년에 북경주교에게 보내는 편지와 교황께 보내는 편지를 작성한 사람은 권철신의 조카인 권기인(상립1768-) 요한과 권노방(상술 1762?-)으로서, 둘째 권제신의 아들들이다.(달레중 17, 19-37). 그러므로 정하상 성인이 전면에 나서기까지 그 중간 시대에 지도자 역할을 한 사람들은 성인의 외가쪽 친척들로서, 조동섬 유스티노와 권제신의 아들 권기인 요한과 권노방 등이었다.
 
권상문 세바스티아노 복자의 아들 황과 경, 황은(의원으로 생계) 기해박해때 우포청으로 압송되어 순교한 것으로 보인다.(cf. 우포청등록, 기해 1221일 양근수초; 윤유일전 p. 32). 1868년 윤46일의 실록에는, ‘죄인 이재의이신규권복의 결안(結案)을 받들었다. 권복 형제는 바로 신유년 장형(杖刑)으로 죽은 죄인 철신(哲身)의 손자입니다. 스스로 이단의 교리에 물들지 않았다고 하면서 문자를 만들어 온 세상을 속이고 어지럽게 하였고, -남종삼(鍾三)과 같은 흉악한 자와 기꺼이 결탁하였고, 조철증(喆增)과 같은 역적과 버젓이 교통하였으니, 그 불측한 정절(情節)을 따라서 알 수 있습니다. 신은 이신규(李身逵) 부자와 숙질(이재의 부제) 및 권복(權複權襫) 형제를 모두 의금부로 하여금 엄히 국문하여 실정을 캐내게 해서 속히 전형을 바르게 하여 난의 뿌리를 끊고 세상의 가르침을 안정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여, 순교하였음이 확인 된다.(치명일기 n. 90, 92; 남보 5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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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09.04 오전 11:5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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