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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천주교회 창립사

Church history in Korea

기적의 9월27일,오늘,[103 성인들의 生日],교황님의 103위시성확정과 천진암대성당 건립!

글 :  몬시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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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9월 27일, 오늘은 103위 시성이 최종 확정된, [103 성인들의 生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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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교회는 聖人  한분만 되어도, 크고 아름다운 대성당을 세워, 천상에 계신 성인과 천주님께 감사와 찬미의 선물로 바친다. 따라서 그 성당의 이름이 된다. 예컨대, 사도 성베드로 대성당, 사도 성 바오로 대성당, 성모 대성당, 세자 성 요한대성당, 소화 데레사 성당, 아씨시 프란치스코 성당, 빠도바의 성 안또니오대성당, 등,,, 103위 시성 후, 우리나라에서는 미리내 성지에 103위 대성당이 건립되었다. 교구장 김남수 주교의 업적이다. 지상의 천주교회는 천상의 하느님과 성인성녀들에게 바치는 감사와 찬미의 선물로 세워지지만, 성당은 신도들이 사용하고, 사회인들이 구경하며, 국가와 사회가 관광자원으로도 활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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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3년 6월 11일은 기적 심사관면이 확정된 날이고, 같은 해, 9월 27일, 오늘은 103위 시성이 확정된 날이다. 시성 확정에 필요한 기적 심사 인준이나, 기적 심사 관면 되었어도, 시성확정에까지는 여러 해가, 때로는 수십년씩 걸릴 때도 없지 않다. 로마 교회의 시복시성 행정은 완벽을 기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1983년 6월 11일(토요일) 기적 심사 관면 회의는, 오전 11시부터 오후1시경까지, 로마 교황청에서 교황 요한바오로 2세 친히 임석하여 열린 103위 한국 순교복자들의 시성을 위한 기적심사관면 회의(Romana Rota dei Concistori)에서, 관계 장차관급 이상의 교황청 추기경들과 대주교들, 몬시뇰들과 교황청 대법원 법관들과 선임이 허가된 변호사도 참석하는 회의를 통하여, 만장일치에 가까운 절대다수의 찬성표로 합의한 결론을 교황께서 윤허하심으로서, 103위 복자들의 시성을 위하여 제출된 기적에 관하여 장기간, 때로는 수십년 씩 소요되는 기적 심사 관면이 확정되므로서, 사실상 103위 시성은 확실시되었고, 전 세계 교회를 놀라게 하였다.  
 
   그러나, 시성추진 과정에서 교황청 시성부의 기적심사 관면 자체가 아직 시성 확정 자체는 아니었다. 최대한의 완벽을 기하려는 교황청의 사목행정, 특히, 사후 세계에 가 있는 신앙인들에 관한, 시복이나 시성 선언은 무류성(無謬性, infallibility)을 지닌 교의적(敎義的, dogmatic)인 성격에 관련된 사항이기 때문에, 매우 신중에 신중을 기하여 왔다. 다만, 기적 인정이나, 기적 심사 관면은 시성 확정으로 가는, 가장 넘기 어려운 고개라고 부르기도 한다. 
 
   당시 주교회의 시성추진부에 각 교구에서 제출한 기적은 17건이었으나, 그중에 7건을 로마로 보냈고, 그 중에 3건이 기적 인정 가능성이 있으나, 확정 심사에는 장기간이 요청된다는 사안이었다. 시성되려면 기적이 나야 된다는 이런 사실은 아주 오래전부터, 수십년 전부터 잘 알고 있던 한국교회였다. 주교회의 시복시성추진부에서는 1982년도 초부터 교황대사의 도움을 받으며, 기적 심사 관면을 교황께 요청하여 왔었던 것을 윤허하시고(6월 11일), 나아가, 시성을 확정하신 것이다(9월 27일). 교황께서 시성을 확정,윤허하시면, 뒤이어, 교서(Bulla)가 작성되고, 발표(Promulgatio)되며, 고유 기도문과  축일 제정에 들어가고, 시성식 거행 준비를 착수하게 된다.  
 
   1983년 9월 27일(화요일)의 103위 시성확정에 대하여, 당시 가톨릭 新聞은,
한국 교회 新紀元 이룬, 27일 밤,- 감격 속에 잠 못 이룬 시복시성추진부”-
 
라는 제목으로 톱기사화하였다.(1983년 10월 9일 주일 판). 당시 가톨릭新聞의 보도에서는, [在로마 시성수속 담당관 직무대리 겸 200주년기념사위 로마 연락 담당]으로 장익 신부를 소개하면서, 한국시간 밤 10시 15분에 본국 주교회의 시성추진부장 변기영 신부에게 이 큰 희소식을 알려왔다고, 크게 상세히 보도하였다.
 
   후에 회의 현장 사진들을 받아 자세히 살펴보니, 3개월 전(6월 11일, 토요일)기적심사 관면 회의 때처럼, 이번 시성확정 회의(9월27일) 때도,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장익신부 혼자서 맨 뒷자리에 옵서버로 쓸쓸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103위 복자들의 시성추진 기적심사 관면 자체도 기적이지만, 3개월 반만에 103위 전원 시성 확정도 기적이며, 최초로 로마 베드로대성당이 아닌, 한국 서울에서의 시성식 거행 윤허도 기적이며, 평신도들 전원 동시 시성 확정도 기적이 아닐 수 없다. 시성운동 출발 때 한국교회는 복자 김대건 신부 한분의 시성추진이 중심 촛점이었고, 교황청 시성성에서는 프랑스선교사 대표격으로, 앵베르 범주교와 함께, 2명의 시성 추진만을 김수환 추기경과 김남수 주교에게, 또 필자에게도, 시성부 장관 팔라찌니 추기경이 직접 수차 거론하였었기 때문이다.
 
   기적심사 관면이 확정된 지, 꼭 3개월 16일만이었다(1983. 6. 11.~1983. 9. 27.). 103위 시성 확정 소식은, 3개월 전(6월 11일), 기적관면 확정 때처럼, 장익 신부가, 투표와 검표 후 결과에 대하여 교황성하의 인정과 윤허로 확정 몇 10분 후에, 즉시 거의 실시간이라 할만큼, 국제전화가 매우 불편하던 당시로는 아주 신속히 시성추진부장  변기영 신부에게 알리므로써, 시성추진부에서는 감격에 넘쳐서 즉시 대사관, 주교회의 사무처, 관계 주교님들에게 알렸다, 주교위원회 위원장 윤공희 대주교님은 시성추진부장 변기영 신부에게, 다음 날(28일) 각 언론에 공식 기자회견을 갖도록 일임하였다.  
 
   기적심사 관면 확정 발표 때처럼, 주교님들이 모두 자리를 뜰 수 없는 각 교구의 사목 현장 사정으로, 이번에도 시성추진부장 변기영 신부의 외로운 발표와 기자회견으로, [103명 성인의 나라, 대한민국]이 각 언론에 특필대서되었다. 주교회의 이름으로 전국 교회에 감사미사 봉헌 요청 공문을 보내며, 정말 며칠 동안 감격과 감사에 젖어, 당시 한국교회 전체가, 특히 5년간 업무를 추진해온 주교회의와 더욱이 실무를 관장해온 시성추진부는 너무나 기쁘고 감격스러워, 한동안 잠이 오지 않을 정도였으며, 103위 시성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정말 생시인지, 환상과 착각이 아닌지,,, 감격 속에서,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배고푼 줄을 못느낄 정도라고나 할까?    
 
   이 기회에 국내 여러 인쇄물이나 사전에서까지 잘못된 사항을 바로잡고자 한다.
  103위 시성 기적심사 관면일1983년 6월 11일(토요일)이고,
  시성 최종 확정일1983년 9월 27일(화요일)이다.
 
   그리고, 참고로, 시복이나 시성 추진에 있어, 법정 대리인으로 교황청에서 인정하는 변호사를 선임하기도 하며, 신청자 자신들(주로 지방교회 교구장 주교들이나 면속 수도회 대원장들)과 시성부와의 각종 시성신청 서류 연락업무를 위해 두는, 교회법 용어로, Postulator이라고 부르는데, 이를, 요청자, 연락관, 수속담당관, 등으로 불리는 대리인을 두게 되는데, 최근에는 내용의 수정이나 추가나, 변경 등에 법정 대리인으로 선임되는 변호사의 역활도 어느 정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신청 대리인이라는 호칭으로 부르는 것도 타당하다고 하겠다. 시복이나 시성 신청의 유권 사목자들인 연로한 주교들 중에는 대부분이 거리가 먼 나라에 상주해야 하는 신청 유권 사목자들이므로, 로마에 자주 와서, 시복시성 후보자들의 인적사항, 순교나 신앙활동 장소명칭, 관련 연월시, 등의 수정, 변경, 추가, 등을 하는 것이 무리이기 때문이다.      
 
   한국천주교회200주년기념 경축 5년간의 국내외의 수많은 회의와 행사와 추진과정, 특히 103위시성에 관한 자세한 보도는, 가톨릭新聞 影印本 제6권과 제7권(1982. 1. 1. ~ 1983. 12. 25.)과 제8권에 정확히 그 때마다 자세히 보도한 기록이 실려있다. 다만 日刊紙가 아니고, 한국천주교회 내의 유일한 週刊誌였기에, 항상 1주일 늦게 주일 판으로 보도되었다. 사회 주요 日刊紙들은 항상 하루 늦게 다음날 朝刊이나 夕刊에 보도하였으나, 그대신 週刊誌였던 가톨릭新聞의 보도는 日刊紙들보다 상세하고 풍부한 역사의 현장을 기록보도하고 있다. 천진암 성지 자료집(국배판 평균 400면씩 1권~131권)에는 사회 일간지들의 보도들도 수록되어있다. 100여만명을 힘들게 갓 넘어서는 한국교회가 500여만명 시대로 향하는 교회발전의 분수령을 오르는 현장 모습들이다. 우리를 돌아다보며, 맨 앞에서 우리를 이끌고 재촉하며 오르시는, 한국천주교회 우리 신앙의 선조들과, 목숨을 바치며 살아남은 우리 순교 선조들이 우리를 뒤에서 밀며 격려해 주신다. 천주께 감사를 !  
 
  한국주교회의가 주관한, 한국천주교회200주년기념 경축 5개년 간의 교회 모습에 관하여, 1980. 5. 16. 처음부터 5개년 계획수립과 1984. 11. 26, 시행 완료 때까지, 유일하게 시작부터 끝까지 관여한 필자가 볼 때, 가톨릭新聞은 보도의 사명 뿐 아니라, 역사 기록의 차원에서, 훗날 역사가들의 높은 평가를 받게 될 것을 확신한다. - Msgr. Byon -
 
1983년 2월 26일 한국주교회의 103위시성추진부장 변기영신부가 로마에서, 시성부장관 팔라치니추기경을 예방한 후 3일 후에, 새 교회법 선포식 겸 교황청의 대법관(로마나 로따의 꼰치스또리)들이 교황성하 앞에서 하는 연례선서식에 참석, 교황 요한바울로 2세 성하를 알현하면서, 103위 한국순교자 시성을 간청하였다. 교황성하께서는, 변기영 신부의 손을 한동안 꼭 잡으시고, 이태리어로, [Si, Si, preghiamo, Si. preghiamo!]즉, 그래, 물론 시성해야지, 함께 기도하자, 시성해야지!]하시며 답하시었는데, 단순히 의례적이 아닌, 당신의 마음 속에 이미 한국순교자들의 시성을 간절히 원하고 계시고, 꼭 시성하시겠다는 목자로서의 간절하고 확고한 의지와 결심을 이미 가지고 계심을 나타내시었다 이 때 성하의 자세는, 단순히 의례적이 아닌, 당신이 마음 속으로 한국순교자들의 시성을 원하고 계시고, 꼭 시성하시겠다는 목자로서 자신의 간절하고 확고한 의지와 결심을 가지고 계심을 나타내시었다. 사실 당시에 한국의 어떤 성직자나 수도자나 신도들보다도 훨씬 더 성하께서는 한국순교자들의 諡聖을 갈망하시고 계셨다.


1983년 2월 26일 이날 오전 11시부터 성하를 알현한 후, 12시경 접견 후의 대법관들과 성하를 모시고 찍은 기념 사진(사진을 바라보면서 성하 좌측 뒤로 두번째가 변기영 신부). 2월 12일 시성추진부장 변기영신부가 로마에 가서 교황성하를 뵙고 간청한 후,
 
   한달 후에, 즉 3월 15일에 시성추진위원장 김남수 주교가 로마에 가셔 시성부장관 팔라치니 추기경을 뵙고 간청하  셨고, 교황성하는 해외 사목방문 관계로 뵙지 못하고 귀국하였고, 4월 1일부터는 재로마 연락관 김진석 신부를 윤민구 신부로 교체하는 국내 김남수 주교의 임명서로 시성성에 등록이 되어 윤신부가 연락관이 되었다.
 
   103위시성추진부장 변기영 신부가 로마 연락관 교체를 건의하게 된 것은, 아직 학위논문을 마치지 못하고 개인 집에 하숙하고 있던 김신부는 시간에 쫒기고 있었고, 전화가 없어 본국과의 연락이 어려웠고, 윤신부는 이미 학위논문을 마친 상태로 시간이 있었으며, 사제들의 기숙사에 머물고 있어서, 오히려 본국과의 연락도 쉬웠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 한달 후에 즉, 4월 20일에는 한국 교회의 어른이신 김수환 추기경께서 로마를 방문하여 21일에 교황성하를 뵙고 시성을 간청하셨고, 4월 26일에는 시성부장관 팔라치니 추기경을 뵙기로 예약되었다고 서울 시성추진부에 로마에서 국내에 연락이 왔다. 윤신부(같은 해 4월1일, 시성부에 등록, 업무시작)와 단테 변호사가 시성부와 교황성하의 근황에 대하여 종종 알려주고 또 필자도 자주 전화로 점검하고 있었다. 특히, 교황청과 연락업무는 국내 대사관의 협력이 컷다. 당시 국제우편이 시일이 너무 걸려서, 대사관 외교행랑을 이용하였다.
 
   그해 5월 10일, 시성을 위한 기적심사관면이 시성부에서 끝나서 결재가 되어, 5월 15일경이나 20일경에 성하의 결재와 동시에 발표되리라고 로마에서 연락이 왔었으나, 대법원의 최종회의와 성하의 결정은 대법관들과 함께 교황성하께서 친히 임석하시어 확정하시게 되었으니, 한국순교복자 103위 시성을 위한 기적심사관면 결정과 발표는 6월11일이었고, 국내에는 6월 12일 아침에서야 공식 발표하였다.


1983년 6월 11일, 오전11시부터,교황궁에서 요한바오로2세 성하께서 친히 임석하시는 가운데, 개최된, 한국순교복자103위 시성을 위한 기적심사관면을 위한, 대법관(Romana Rotta Concistori)들과 시성부 위원 대주교들 및 관계 추기경들의 최종 연석 합동회의. 사진은 시성부장관 팔라찌니 추기경의 보고 및 기적심사관면 건의 장면.


1983년 6월 11일, 오전11시부터,교황궁에서 요한바오로2세 성하께서 친히 임석하시는 가운데, 개최된 한국순교복자 103위 시성을 위한 기적심사관면을 위한, 대법관(Romana Rotta dei Concistori)들과 시성부 위원 대주교들 및 관계 추기경들의 최종 합동 연석회의에서 기적심사관면 건의에 적극 찬성하는 위원 대주교들의 발언 장면


1983년 6월 11일, 오전11시부터, 교황궁에서 요한바오로2세 성하께서 친히 임석하시는 가운데, 개최된 한국순교복자 103위 시성을 위한 기적심사관면을 위한, 대법관(Romana Rotta Concistori)들과 시성부 위원 대주교들 및 관계 추기경들의 최종 합동 연석회의 중에 시성부장관 추기경의 건의와 위원 대주교의 찬동에 이어 변론을 시작하는 단테변호사의 발언 장면(당일 단테변호사는 3차까지 발언하였다).


1983년 6월 11일, 오전11시부터, 교황궁에서 요한바오로2세 성하께서 친히 임석하시는 가운데, 개최된, 한국순교복자 103위 시성을 위한 기적심사관면을 위한, 대법관(Romana Rotta Concistori)들과 시성부 위원 대주교들 및 관계 추기경들의 최종 연석회의 중에 시성부장관 추기경의 건의와 위원 대주교들의 찬동 발언에 강력히 반대발언을 하는 몬시뇰. 이 몬시뇰을 흔히, "마귀의 옹호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1983년 6월 11일, 오전11시부터, 교황궁에서 요한바오로2세 성하께서 친히 임석하시는 가운데, 개최된, 한국순교복자103위 시성을 위한 기적심사관면을 위한, 대법관(Romana Rotta Concistori)들과 시성부 위원 대주교들 및 관계 추기경들의 최종 합동 연석회의에서 기적심사관면 건의에 적극 찬성하는 위원 대주교들의 재발언 장면


1984년 10월 14일 성 베드로 대성당 103위 성인 첫 축일 대미사

   1984년 10월 14일, 로마 성 베드로대성당에서 교황 요한바오로2세 성하의 주례로 한국순교성인 103위 첫 축일미사를 김수환 추기경님과 한국의 모든 주교님들과 프랑스의 많은 주교님들과 함께 한국신도들 약 1,8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약 2만여명이 넘는 세계 각처에서 모인 신도들과 함께 거행한 후, 오후에는 교황성하의 알현이 있었다.

   본래 국내에서 거행된 103위시성식으로 새로이 시성된 103위 축일은 9월 20일로 정해졌고, 그 첫 축일은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이 주례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10월 14일로 변경하여 거행하였는데, 아직까지도 그 이유를 모르는 성직자들이 한국에는 대부분이다. 10월 14일은 요한바오로2세께서 만 6년 전 교황으로 등극하신 때였다.

   요한바오로2세성하께서는 한국순교성인103위를 당신 교황직무 수행의 주보로 생각하시고 가장 열심히 공경하셨으며, 15일에 하루 마지막 점검을 하신 후 16일에는 고국 폴랜드에 3번째 방문길에 오르시게 되어 있었다. 아직 민주화가 되기 전 무서운 공산국가였던 모국방문 길을 한국순교성인들과 함께 가시기 위해서였다. 사형선고를 받은 사형수 순교자들이 사형집행장을 향하여 걸어가던 마음으로, 한국순교성인들과 함께, 성하께서는 마피아단의 본거지 시칠리아와, 공산 게릴라들이 난무하는 남미를, 반대의견을 무릅쓰고, 방문하셨다.
 
                                    
   유럽교회는 聖人  한분만 되어도, 크고 아름다운 대성당을 세워, 천상에 계신 성인과 천주님께 감사와 찬미의 선물로 바친다. 따라서 그 성당의 이름이 된다. 예컨대, 사도 성베드로 대성당, 사도 성 바오로 대성당, 성모 대성당, 세자 성 요한대성당, 소화 데레사 성당, 아씨시 프란치스코 성당, 빠도바의 성 안또니오대성당, 등,,,.
  
  103위 시성 후, 우리나라에서는  미리내 성지에 103위 대성당이 건립되었다. 시성추진위원장이었던 교구장 김남수 주교의 업적이다. 지상의 천주교회는 천상의 하느님과 성인성녀들에게 바치는 감사와 찬미의 선물로 세워지지만, 성당은 신도들이 사용하고, 사회인들이 구경하며, 국가와 사회가 관광자원으로도 활용한다 .      
  
 
  저 크고 많은 각종 공장들과 대학 건물들과 체육시설, 대규모 호텔들과 백화점들과 아파트 단지 건설을 보면서, 특히 천문학적 액수의 무기 구입 제작비를 생각하며, 103위 성인들의 천주공경 신덕과 교훈을 자자손손히 물려주는 한겨레 영성의 터전이오, 샘물이 되어, 천년 세월을 두고 韓民族 수호의 유구한 천주님의 전당이 될, 신성한 천진암대성당 건립에도, 신도들과 온 국민이 관심과 정성을 기울였으면!!! 
-Msgr. Byon- 
 
 
입력 : 2015.10.02 오전 10:4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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