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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천주교회 창립사

Church history in Korea

만천유고(萬川遺稿)는 위작(僞作)일 수 없다.!

글 :  변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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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천유고(萬川遺稿)는 위작(僞作)일 수 없다.!

만천유고의 발문은 1830년대 초에 정약용 선생에 의하여 쓰여진 것이 분명하다. 특히, 발문에 나오는, 삼십여성상이라는 표현이, 정약용 선생의 천진소요집에서도 2회나 쓰여지고 있는데, 그 쓰여지는 내용과 이유가 같으므로, 1827년, 天眞菴 現場에 와서 지은, 天眞消搖集 著作年代와 著作者가 같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天眞消搖集에 나오는 石泉, 規伯, 載宏, 學淵, 등이 답하며 지은 것처럼 되어 있는 詩句 몇 句節역시, 정약용 선생 자신이 지은, 자신의 이야기임을 쉽게 알 수 있는 것은, 그 아들 學淵의 이름으로 答하였다는 詩句에서, 三十餘年이란 해당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들 학연이 2살이나 3세 때의 일을 추억삼아 회고하며, 30여년 운운하는 懷古詩를 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해서, 蔓川遺稿 내용의 原文은 李檗 先生 作이 대부분이고, 筆生은 李承薰 進士이며, 30여년 후에, 조각들을 주어 모아서 한데 묶은, 編輯者는 丁若鏞 선생이니, 跋文의 내용 중에는 天眞消搖集에 중복되거나 내포되어 있는 것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만천유고를 위해서는 다행한 증명자료다.

이제 좀더 상세히 한국 천주교회 창립의 주역 이벽 성조의 「天主恭敬歌」와 「聖敎要旨」가 실려있는 蔓川遺稿의 眞僞는 是非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별첨에서 재확인해본다.

이벽 성조의「聖敎要旨」와 「天主恭敬歌」가 실려있는 「(蔓川遺稿」가 「邪學懲義의 末尾에 나오는 교회초기의 서적 목록에 들어있지 않다고 하여, 이 「만천유고」가 僞作이 아니냐고, 이의를 제기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은 정말 답답하고 서글픈 일이다.

오히려 蔓川遺稿는 著者와 筆記者와 編輯者와 著述 年代와 場所와 그 動機가 명시되어 있지만, 이른 바, 邪學懲義는 누가, 어디서, 언제, 썼는지가 일체 밝혀지지 않는 文件이다. 邪學懲義의 내용은, 王朝實錄이나, 闢衛編이나, Daveluy 著書에 의하여, 학인하고, 증명되어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蔓川遺稿」를 직접 들여다보고 나서도 그 진위에 대하여 이러쿵저러쿵 불신과 회의를 퍼뜨리는 이가 있다는 것은 한국 천주교회 역사를 정립하는 일에 있어 매우 섭섭한, 수준미달과 함량미달의 일이다. 더구나 그 「蔓川遺稿에 실려있는 「성교요지」를 크게 다루면서 쓰여진 박사학위 논문이 4편씩이나 해외에서 나왔는데도, 물론 漢文의 일부 번역에 결함이 없지 않고, 이하에서 감히 불가피하게 정정하여 돕고자 하지만, 계속하여 문제삼는 것은 확실히, 진지하게 연구해보지는 않았다손치더라도, 적어도 유심히 읽어보기나 하고서 이야기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말을 들어야 마땅하다고 하겠다. 그러면 이제 蔓川遺稿의 眞僞에 대하여 몇가지 견해를 보충해서 말해보기로 하자.

우선 「蔓川遺稿」에 나오는 이벽 성조의 「聖敎要旨」를 유심히 읽어보면, 이벽 성조가 아니고는 아무도 그러한 저작(著作)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그 「聖敎要旨」의 내용은 천주교 교리에 대한 지식과 동양학에 관한 학식이 풍부한 사람의 작품이라는 것을 직감하게 된다.

솔직히 말해서 200년 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아니, 한반도 5천년 문화사(文化史)에 있어 이 같은 작품을 쓸수 있는 사람이 누구이겠는가? 당장 지금 우리 나라 학계의 가장 저명한 교수와 학자들을 총동원해서 이와 같은 작품을 쓰라고 한다면 쓸만한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미안하고 건방진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아무도 없을 것 같다. 이를 충분히 독해할 수 있는 이들도 많지 않다.

그러므로, 200여년 전에 대학자 권철신이나 권일신, 정약용 3형제 등을 설득시켜 천주교에 입교시킨 이벽 선생이 아니고는 이런 작품을 쓸수 있는 사람은, 전에도, 지금도, 또 앞으로도 없으리라고 믿는다. 이 「성교요지」하나만 보더라도 그 자체로 「만천유고는 도저히 위작일 수가 없는 명작 중의 대작이 아닐 수가 없다. 만일 이 「성교요지」를 누가 장난삼아 거짓으로 지었다면, 이 정도를 거짓으로 장난삼아 짓는 사람이라면, 이벽 선생보다도, 정약용 선생보다도 훨씬 더 박학하고 위대한 학자이며, 신앙인이며, 신학자이며, 문학인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성교요지」와 그 「성교요지」가 실려 있는 「만천유고」는 그 자체가 자체를 自證하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① 혹자는 「성교요지」라는 책이름이 「사학징의」 끝에 나오는 그 많은 요화사서(妖畵邪書) 소화기(燒火記) 목록에 없으니 믿을 수가 없다고 하는데, 이것은 일반신자들의 신앙심 전파를 위한 서적들(예를 들면, 천주교 교리책, 고해성사 보는 법, 등…)과 학문적이며 사상적인 시문집(詩文集)이 왜 함께 일반신자들 대중 속에 똑같이 보급되지 않았느냐고 하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② 또 「만천유고」에 실려있는 여러 가지 詩文에 나오는 地名과 人名들이 모두가 실제로 여기 저기 현존하던 것 들이다(예를 들어 走魚寺, 鶯子峴, 無愁洞, 龍飛窟, 辛夷橋, 李寵億, 權相學, 選菴 丁若鐘, 李德祖, 曠菴, 天學初涵 등…). 이 모든 지역 중에서 한국 천주교회 발상지 천진암 부근에 있는 곳들은 필자가 직접 답사하여 보았거니와, 결코 거짓으로 꾸미기 위하여 이 모든 장소를 다니며 詩를 지었으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③ 다만 이승훈 선생의 호 晩泉 혹은 蔓川의 한문 글자에 있어서 문제시 하는 이가 있는데, 이에 대한 필자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④ 초기교회 당시에는(200여년 전후해서) 출신지역이나 연고가 있는 지역의 山水 이름을 따서 호를 짓거나, 부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예컨대, 삿갓우물 마을(笠井洞)에 살던 지황(池璜)을 관천(冠泉)이라고 부르던 일이나, 정약용이 처음에는 자기 집 앞강의 물기운이 거셈을 따서 열수(烈水)라고 했던 것처럼, 이승훈 선생이 살던 마을의 앞냇갈, 즉 중림동에서 청파동으로하여 새남터로 흘러 들어 가던 냇갈을 가리켜, 당시에는 덩굴풀이 우거져 있다해서 덩굴내(蔓草川)라고 불렀고, 여기서 만초천(즉, 덩굴풀 「만」(蔓)이라는 글짜는 이미 풀초(草)라는 글자를 겸하여 가지고 있으므로 草라는 글자를 빼버려도 뜻이 같고, 발음은 간단하고 쉬워서, [蔓川]이라고도 하였으니, 이승훈 선생을 만천이라고 부르는 것은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⑤ 그러면 「邪學懲義」에는 왜 만천을 한문으로 晩泉이라고 기록하였는지 의문이 나겠지만, 사학징의에는 남한산성에서 순교한 한덕운(韓德運)을 우덕운(禹德運)이라고도 썼듯이, 또 「사학징의」 171면부터 192면까지 나오는 많은 순교자나 유배자들의 이름을 읽은 사람이면, 그 기록자가 얼마나 무성의하게, 그저 부르는 대로, 자기 마음대로, 써나갔는지를 깨닫게 되듯이, 또 사학죄인들의 이름을 뭐 그리 정성들여 쓸 필요가 있었으랴! 「사학징의」에 나오는 공서파(攻西派)의 기록보다는, (적어도 이름에 관한 한) 「만천유고」의 편집자,다산 정약용의 기록을 더 믿어야 할 것이다. 혹은 여러 가지 다른 이유로, 예컨대 심문을 당할 때, 일부러 한문 글자를 바꾸어서 자신의 호를 대어줄 수도 없지 않으니까, 글자가 바뀔 수도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⑥ 그런데 이 「만천유고」의 내력을 알려주는 열쇠와도 같은 문맥은 바로 「만천유고」 맨 끝에 나오는 ‘발문(跋文)’이다.

⑦ 이 발문은 요새 나오는 책으로 말하면 ‘머릿말’에 해당하는 것이므로 「만천유고」의 저자나 편집자, 그 편찬 동기, 편집 연대 등을 아는데 가장 중요한 열쇠가 되는 것이며, 만천유고」에 실려 있는 천주공경가나 십계명가」, 또는 「성교요지」의 제목 바로 밑에 붙인 간단한 해설문도, 이 발문을 쓴 편집자의 글이며, 또 글이어야 한다는 것 쯤은, 이를 읽는 이들에게 쉽게 납득이 가는 일이다. 물론 각 詩나, 作文의 제목 밑에 붙인 주해가 훗날 다른 이들이 첨가한 필치로 볼 수 있는 것들도 사실이다. 이는 최석우 신부님도 필자와 의견을 같이하였다.

⑧ 그러므로 이 발문의 번역은 매우 중요한 것인데, 필자가 보기에 지금까지 3차례나 漢學文人의 저서에나 학위논문에 제시된 번역이 너무나 잘못되어 있고, 또 단행본에서도 역시 오역(誤譯)이 계속되고 있을 뿐 아니라, 오역이 다시 거듭 거듭 다른 데에 인용되어가고 있음을 보고만 있을 수 없으므로, 부득이 필자의 전문분야는 아니지만, 여기에 그 원문과 번역문들과 함께 필자의 새 번역문 그리고 구절 구절에 대한 주해를 붙여서 밝히고자 하며, 이 「만천유고」와 그 안에 있는 「성교요지」내용의 번역에 관해서는 다음으로 미루고, 우선 발문에 관한 것만 살펴 보겠다. 사실, 이「만천유고」와 그 발문이 한국 천주교회 창립사와 이벽 성조에 관한 연구에 있어서 지니는 중요성은 자못 크므로, 오역의 거듭된 인용을 중지시키는 동시에, 이를 바로잡아 보려는 시도는 필요하고 시급한 것임을 누구나 식견있는 이라면 즉시 깨닫게 될 것이다.

⑨ <원문>

⑩ 平生囚獄死免於出世三十餘星霜江山依舊靑空白雲不變影先賢知舊何處去哉不接木石之身勢轉轉倒處中憶不意移世蔓川公之行蹟儷文不少矣然不幸於燒失一稿不得見千万意外詩藁雜錄片書有之故劣筆於秒記日蔓川稿東風解凍枯木逢春芽葉蘇生之格此亦上主廣大無邊攝理也宇宙眞理如是太極而無極醒覺者如接上主之意也. 無極觀人

⑪ 여기서 어떤 번역문에서는 不意移世를 不意移也로 원문 뿐 아니라 번역문까지 엉뚱하게 옮겨졌는데, 이는 매우 잘못된 것이다. 이 원문에 대한 첫 번째 번역문을 여기 옮기면 다음과 같다.

⑫ “平生 獄事로 인한 罪人으로 지내다가 겨우 죽음만을 면하고, 30여년 만에 世上에 나오니 山川은 옛 것과 다름없고, 푸른 하늘 흰 구름은 變함이 없는데 어진 선비들과 知友들은 어디로 가 버렸는가? 木石의 身勢만도 못한 불쌍한 身勢로 도처를 전전하였으니, 오호라! 다시 세상에 나갈 뜻을 잃었도다. 蔓川公의 行蹟과 아름다운 글들이 적지 않았는데 불행히도 모두 燒失되어 一稿도 얻어 보기 어렵더니 千萬意外로 몇 편의 詩稿와 雜錄이 남아 있어 그 연고로 졸필로써 抄하고 記錄하여서 「蔓川遺稿」라 이름하였다. 東風이 불면 얼음이 녹고 새로운 잎이 싹트고 봄이 오면 만물이 새로이 蘇生함이 上主의 廣大無邊한 攝理로다.

⑬ 모든 宇宙眞理가 이와 같으니 太極과 無極의 차이를 크게 깨닫는 者는 上主의 뜻에 접함과 같음이니라.”<無極觀人>

⑭ 다음에 동일한 원문에 대해 어떤 번역문에 제시된 번역문은, 위 번역문과 중요한 부분이 전혀 상반되는 뜻으로 옮겨졌다. 동일한 한문 문귀에서 전혀 상반되는 번역이 교묘하게 가능한 경우도 없지는 않지만, 이 발문에서는 도저히 두 가지가 나올 수가 없다.

⑮ “평생을 죄인으로 지내다 겨우 죽음만을 면하여 세상에 풀려 나온지 어언 30여 성상이 되었다. 강과 산은 옛 그대로이고 푸른하늘과 흰구름도 그림자 하나 변하지 않았으나 옛 성현과 벗은 어디로 갔는고. 나무와 돌의 신세가 되어 세상에 붙이지 못하고 이리저리 흘러다니던 중, 슬프다! 모두 뜻밖에 세상을 떠났구료, 만천공(蔓川公)의 행적과 아름다운 글이 결코 적지 않으나, 불행히도 불에 타 버리어 한 편의 글도 얻어 보기가 어렵더니 천만 뜻밖에도 시고(詩稿)와 잡록(雜錄)과 몇 조각의 글이 남아 있기에 내 비록 졸렬하게나마 초(抄)하여 기록하고 「만천유고(蔓川遺稿)」라 이름하였다. 이는 마치 봄바람에 얼음이 풀리고 마른 나무가지가 봄을 만나 새 눈(芽)이 트는 것과 같은 것이니 태극(太極)이 곧 무극(無極)이요, 마치 잠자다 깨어난 사람이 하느님의 뜻에 접한 듯하도다.”<무극관인>

? 이제 새 번역을 시도하기(맨 끝에 나옴) 전에 오역을 피하기 위하여, 우선 원문에 대한 띄어 읽기와 각 구절의 배경을 더듬어 볼 필요가 있다.

? 우선 먼저 이 원문을 현대어로 알아듣기 쉽게 번역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이 띄어서 읽는 것이 오역(誤譯)을 피하는데 도움이 되리라고 본다. 이 띄어 읽기에 틀리면 번역도 틀리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 筆者의 拙譯을 위한 띠어 읽기.

『平生囚獄에 死免於出世하니, 三十餘星霜에 江山은 依舊하고 靑空白雲은 不變影인데, 先賢과 知舊는 何處去哉아인고! 不接木石之身勢로서 轉轉倒處中일 째, 憶! 不意移世였구나!

蔓川公之行蹟에는 儷文不少矣然이련마는, 不幸으로 於燒失하여 一稿조차 不得見이러니, 千万意外로 詩藁雜錄과 片書가 有之故로, 劣筆이나마 於秒記하여, 曰, 蔓川遺稿라 하노니, 東風에 解凍하고, 枯木이 逢春하면 芽葉이 蘇生하는 格으로, 此는 上主의 廣大無邊한 攝理也로다. 宇宙眞理가 如是하여, 太極而無極임을 醒覺하는 者는 接上主之意와 如하도다. 無極을 觀하는 者가 쓰노라.』

주해

平生囚獄 - ‘한 平生 살아가다가 보니 어쩌다가 죄수생활까지도 하게 되었다’는 뜻이지, 결코, ‘평생을 온전히, 다’라는 뜻이 아니다.

死免於出世 - 죽음을 모면하였을 뿐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서는 마침내 다시 이 세상에 나올 수 있게까지 되었다는 뜻이다.

三十餘星霜 - 이 ‘삼십여성상’은 기간을 말하는 독립부사적(獨立副詞的) 어귀이지, 결코 위의 死免於出世에 붙이거나 혹은 더 올라가서 平生囚獄에까지 붙여서는 안된다. 지금까지 나온 여러 가지 번역에서 큰 오역(誤譯)을 하게 된 것은 바로 이 점 때문이다. 혹자의 번역대로, ‘죽음만을 면하여 세상에나온 지 어언간 30여년이 지났다’고 번역이 되려면, 원문이, ‘死免於出世後三十餘星霜’이라고 되어야 하며, 또 다른 번역대로, ‘평생을 감옥생활로 보내다가 30여년만에 세상에 나와보니’라는 번역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平生囚獄三十餘星霜死免於出世’라고 되어 있든가, 아니면, ‘三十餘星霜平生囚獄死免於出世’라고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無極觀人이 말하는 ‘30여년’이란, 죄수로서의 감옥생활 기간도 아니고, 그렇다고 석방된 후부터 이 발문을 쓰는 당시까지의 기간도 아니고, 그렇다고 석방된 후부터 이 발문을 쓰는 당시까지의 기간도 아니고, 오로지 스승과 벗들이 없어진 후부터 이 발문을 쓰는 당시까지의 기간을 말하는 것이며, 이 기간에도 강산은 변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즉 1801년 신유박해 때부터 30여년이 지난 후, 즉 1830년 경에 이 발문을 Tm고 있다고 봐야 한다. 여기서 부연할 것은, 이 발문을 쓴 無極觀人을 다산 정약용으로 본다면, 3가지 번역의 역자들과 함께, 필자도 동감이고, 또 다각도로 이 「蔓川遺稿」를 검토하여 보면, 다산 정약용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다산은 신유박해(1801년) 때 강진으로 귀양가서 1818년에 석방이 되어 고향 땅 마재로 돌아왔으며, 1836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권철신, 이승훈 등이 1801년 신유박해 때 세상을 떠났으며, 그 형 약전은 흑산도 귀양 중에 牛耳島에서 1816년에 세상을 더났고, 1819년을 전후하여, 이때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다산이 그 유해를 나주로 옮겨서 관을 만들어 모셔 가지고 충주에 있는 가차산면 하담리 마을 나주 정씨 종중산 선영의 동쪽 한 옆에 있는 작은 언덕에 정남향(正南向) 즉 자좌(子坐)로 묘를 썼다. 결국 1830년 경에 이 발문을 쓰면서 회고하는 것이다.

정약용은 1836년 초에 마재에서, 그 당시 팔당 아래 구산에 있는 순교복자 김안당의 집에 머물고 있던, 중국인 유방제 신부에게서 종부성사를 받고, 세상을 떠나기 3개월 전, 조선에 프랑스인으로서는 최초로 입국한 Pierre Maubant 신부를 만나본 후, 바로 세상을 떠났으므로, 다산은 수옥(囚獄) 생활 18년을 했고, 석방 후에 18년간을 더 살았으므로, 위의 ‘三十餘星霜’을 번역할 때, 평생수옥(平生囚獄)에 결부시켜서, ‘30여년간 감옥생활을 했던 것’으로 한다거나, 혹은 ‘석방 후 30여년이 지나서 발문을 쓰는 것’으로 하면, 둘 다 큰 오역(誤譯)이 아니 될 수 없다.

결국 이 ‘三十餘星霜’이란 만천공 이승훈과 선현(先賢)으로 의미된 권철신 등이 세상을 떠난 1801년(이벽 선생은 1785년에 세상을 떠났음.) 이후부터 1830년 초까지를 말하는 것이다. 이 발문을 쓴 無極觀人을 茶山이라고 말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 바로 이 ‘三十餘星霜’이며, 이를 필자의 번역대로 아니하면서, 無極觀人을 茶山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江山依舊 - 정약용 선생이 1979년, 지금 이 발문을 쓴다면 이런 표현은 못 쓸 것이다. 왜냐하면 마재 부근은 팔당 댐이 막히면서, 초천(苕川) 마을이 수몰되어 영원히 댐 속으로 사라졌고, 강산이 많이 변해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1818년 강진 귀양에서 돌아왔을 때는 山川에는 아무 변화가 없었을 것이다. 즉 다산이 「소내사시사(召川四時詞)」에서 읊은 검단산(黔丹山)과 소내(召川), 앵자산(鶯子山)과 천근봉(天近峯)을 떠도는 흰구름, 두미협(斗尾峽)의 물살 등을 말한다.

先賢知舊 - 어질던 스승님들과 선배들, 즉 권철신, 이벽, 권일신, 이방익(李防翼, 어린 정약용 선생에게 漢文을 가르친 스승으로 아랫 두미마을에 살던 훈장(訓長)이며, 전주이씨이다.), 등을 先賢으로 표시한 것이고, 知舊는 이승훈, 이가환, 이총억,권상학, 권상문, 등 절친한 친구들을 의미한다.

不接木石之身勢 - 집을 지을 때, 지우(목수(木手)들이 톱으로 잘라버린 나무토막, 즉 서까래나 중방 끝에서 잘라버린 토막은, 아무데도 쓸데가 없어서, 발 끝에 채이며 굴러다니게 되는 것이고, 구들장이나 주춧돌로 쓰이지도 못하고, 중방 쌓는 데도 못써서, 역시 이리저리 발 끝에 채이며 굴러 다니는 돌덩이와 나무토막에 자신을 비유한 것이다.

배교선언을 한 정약용 선생은 천주교 신자들과 남인들편에도 끼지 못하고, 그렇다고 새로이 정권을 잡은 반대파, 즉 공서파(攻西派)에도 들지 못하여, 아무데도 접(接)해 있지 못한, 외롭고 처량하던 신세를 의미하는 것이다.

轉轉倒處中 - ‘이리저리 굴러다니며 거꾸러지기도 하고 쳐박히기도 하면서 떠돌아 다니던 동안에’의 뜻. 즉 正祖가 죽은 후, 살어름을 밟고 사는 듯 하다고 하여, 與猶堂이라고 堂號를 붙일 정도로 살벌한 분위기로 낙향한 신세였다가, 강진으로 귀양가서 지내던 모습을 말한 것이다. 이 발문의 시작에서 여기까지의 주어(主語)는 無極觀人 자신이다. 즉 자신이 굴러다니며 고생하느라고, 벗들이 세상 떠나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憶 - 슬프다. 애닲으고나!

不意移世 - 이승훈과 권철신, 등 선현지구(先賢知舊)가 세상을 떠난 것은 不意의 일이라는 것이다. 병으로 인한 자연사망이 아니고, 천주교 박해라는 타의에 의한 不意의 죽음이었다.

蔓川公之行蹟 - 만천공 李承薰 선생의 행한 업적과 발자취를 말한다.

儷文不少矣然 - ‘빛나는 문장들이 적지 않으련마는, 그러나…’ 여기서 矣然은 ‘~할 다름이지만 그러나~’의 뜻이다. 儷文을 ‘빛나는 文章’이라고 해석하기도 하나, 여기서는 중국 近代文學의 始祖라고까지 부르는, 文公 韓愈가 주로 쓰던 文章 形態로서, 이는 中國 六朝때 성행한 文章體 中 하나이다.이승훈 進士의 博學多識한 文章力 중에는, 儷文體가 많았다.

不幸於燒失 - ‘불행히도, 심지어는, 불에 타버리기까지 하여서’의 뜻이다. ‘於燒失’은 ‘급기야는 불에 타서 잃게까지 된 적이 있다’는 뜻으로, 특히 이승훈 진사의 아버지가 이승훈 進士의 천주교 서적과 천주교 관계 저작물들을 모두 모아서 집안 안마당에서 불에 태워버린 적이 있었는데, 이런 일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왜냐하면 戰亂이나 火災로 인한 燒失이라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一稿不得見 - 만천공의 ‘친필원고 한 장조차 얻어보지 못하다가’의 뜻이다. ‘~不得~’은 ‘~하나조차 얻어서 보지 못한다’는 의미다.

千万意外 - 박해로 燒失되고 죽고 한 후 30여년이 지난 그 당시에, 만천공의 유고(遺稿)를 발견했다는 것은 사실상 천만 뜻밖의 일이 아닐 수 없으리라고 본다. 특히 앵자마루에서 지은 詩나 용비굴에서 지은 詩, 같은 것은 이승훈 진사와 그 동료들이 천진암을 중심으로 강학회를 열던 전후이므로(1780년 봄의 시) 1779년 전후의 작품들인데, 이는 천만 뜻밖의 일이 되는 것이다.

詩藁雜錄片書 - 시 원고와 갖가지 적어 두었던 비망기, 토막글들을 말한다. 사실 「蔓川遺稿」에 들어 있는 것들은 글자 그대로 詩藁雜錄에 片書라고 할 수밖에 없다.

有之故로 - 있는 연고로, 있기 때문에.

劣筆於秒記 - 졸필이지만 간추려 배껴서…

日 蔓川遺稿 - 가로대 「만천유고」라 하노라. 즉, 「만천유고」라고 해놓는다. 만천공의 행적부터 여기까지가 이 蔓川遺稿의 내력과 배경을 말하는 것이고, 다음부터는 또 자신의 소감을 말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東風解凍 - 여기 하필이면 南風解氷이라고 하지 아니하고, ‘동풍해동’이라고 표현했을까. 물론 문학적으로 ‘동풍해동’이 가끔씩 쓰여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여기서는 특히 저약용 선생이 귀양갔다가 풀려나오게 되는 그 배경과 과정이 궁중의 政變과 직결된, 정변의 결과이기 때문으로 볼 수도 있으니, 즉 정조가 죽고 어린 순조가 즉위하였는데, 이 순조야말로 말만 임금이지 너무 어려서 김대비의 섭정을 받고 있었다. 헌종이 즉위한 후, 다산은 강진에서 18년후에 풀려나오는데, 결국 자기의 귀양을 凍事에 비긴다면, 귀양이 풀리는 것은, 바로 東風에 解凍하는 것으로 묘사함이 가장 적절한 표현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대자연의 환경면에서도, 다산 정약용이 살던 능내리 마재는 양평 鑑湖 쪽에서 불어오는 東風에 의해서 앞강 얼음이 풀리고 봄이 오게되어 있으며, 마포와 미사리 쪽에서 불어오는 西風과 함께 초겨울이 들어 닥치게 되어 있다.

枯木逢春 - ‘늙어서 거의 다 썩어 죽어가던 나무도 봄을 만나면’, 즉 자신과 권철신, 이승훈 등의 천주교 단체와 친지들의 처지를 枯木에 비유한 것이다.

芽葉蘇生之格 - ‘새 싹이 트는 격으로’, 남들이 다 늙고 썩어서 죽은 줄 알았던 고목도 겨울이 지나고 봄을 만나면 새싹이 트는 것 같이, 신유박해로 일망타진된 남인파의 자기들에게도 뿌리는 있으니, 이제부터 새싹이 트기 시작한다는 이야기다.

此亦 - ‘이 역시’의 ‘이(此)’는 동풍해동부터 아엽소생까지의 대자연의 현상을 말한다.

上主 - 왜 하필이면 上主라는 표현을 쓰는가? 전에 王을 上이라는 표현으로 썼었으나, 위의 자연현상은 바로 王정도의 地上的 人力이나 權力을 넘는 天主, 즉 上主에 의한 것임을 더욱 두드러지게 실감시키는 표현이다. 특히 우부승지나 좌부승지(오늘날의 대통령 특별보좌관에 해당되던 벼슬)로서, 왕을 모시고 측근에서 벼슬살이하던 다산이 晩年에 와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바로 같은 권력이 남의 손에 넘어가자, 바로 그 권력에 의해서 귀양살이까지 하고난 일체를 되돌아보면, 上帝나 天主보다 上主라고 표현하는 것이 얼마나 合當한 것이랴! 즉, 主上이란 말보다, 上主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廣大無邊 - 집권자들의 작고 좁은 답답한 심리보다, 大自然을 다스리는 神의 섭리는 얼마나 넓고 크고 끝이 없는 것인지를 절감한 표현이다.

攝理 - 손으로 하나하나 잘 제자리에 놓고 붙들어 주는 이치, 즉 안배의 손길이다. 하느님의 안배를 말한다.

宇宙眞理 - 온 우주 내의 모든 참된 原理와 理致, 특히 원형이정(元亨利貞)은 천도지상(天道之常)이요 인의예지(仁義禮智)는 인성지강(人性之綱)이라는, 우주 안의 모든 참된 이치를 말한다. 대자연계의 물리적 원리 뿐 아니라, 인간세계의 윤리적이면서도 철리적(哲理的)원리도 말하는 것이다.

如是 - 여기서의 ‘是’는 이 발문의 첫머리 평생수옥사건부터 시작하여 아엽소생지격까지, 모든 내용의 문장을 묶어서 지칭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 즉 귀양생활 떠나던 일, 18년 후에 풀려 나온 일, 스승과 벗들이 죽은 일, 종이 한 장 안남아 있을 줄 알았던 것이, 그래도 이 정도 少時적 작품의 일부까지 남은 일, 동풍에 얼음이 녹고 고목에 봄이 온 듯한 일, 등을 모두 가리키는 문장으로 봄이 옳겠다.

太極而無極 - 이 말은 송(宋)나라 때 도학(道學)의 대가(大家)인 주염계(周濂溪 A.D 1017-1073)가 한 말로서, 우주의 근원을 설명하는데 쓴 표현인데, 주염계는 음양오행의 생성과 인간윤리의 원리를 함께 추구하여, 우주론과 원리론을 일원론적으로 통일성을 띠고 설명해 나가고자 하였다.

즉 太極에서 陰陽으로, 陰陽에서 사상(四象)으로, 四象에서 팔괘(八卦)로, 八卦에서 萬物이 되어나오는 순서로 설명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태극을 有限의 세계에 관한 것으로 보고, 무극을 無限의 세계에 관한 것으로 보면서, 우주론을 세워 설명하고자 하는 데 쓰여진 표현이다. 쉽게 풀어 말하면, 위에서 말한 우주진리, 즉 원형이정과 인의예지의 원리가 본원적인 점에서 같은 것이니, 곧 물리(物理)와 철리(哲理)는 동일한 근원에 의한 것이라는 뜻이다. 즉, 무극은 절대무한자(絶對無限者=aeternum infinitum)를 의미하는 것이다. 필자의 생각에는 태극이나 무극이란 표현을 최초로 쓴 사람 자신도 오늘의 우리보다 더 명백한 그 의미를 깨달을 수도, 느낄 수도 없었을 것으로 본다. 그 이유는 원래 이러한 표현들은 인간 思考力의 한계 저 너머에 있는 그 무엇을 어렴풋이 짐작?면서, 인간능력의 한계 너머에 있는 境地를 기웃거리며 표현해 보려고 몸부림치는 흔적들이기 때문이다. 物理學과 形而上學과 宇宙論이나 天體物理學, 生物學, 등을 한데 묶어, 思索하던 이들의 표현이다.

醒覺者 - ‘태극이 무극임을 느끼고 깨닫는다는 자’라는 뜻이다. 즉 잠에서 깨어 일어나 태극이 바로 무극임을 깨닫는다는 것은 천주의 뜻을 깨닫고 그 뜻에 연접(連接)함과 같다는 의미다.

無極觀人 - 영원한 절대 무한(永遠 絶對 無限)을 관조(觀照)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즉 다산 정약용은 말년에 와서 철학적이며 종교적인 사색에 잠기는 일면을 우리에게 기록으로 남겨준다고 하겠으니, 초기에는 정치, 경제, 의학, 역사, 문학 등에 몰두하였던 것과는 달리, 1830년 경, 즉 이 발문을 쓰면서 그는 영원 무한의 세계에 있는 절대자의 경지를 관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각 문귀의 뜻을 대강 분석 음미하였으니, 전체적인 번역을 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한 평생을 살다보니 어쩌다가 죄수가 되어 감옥살이까지도 하게 되었다. 그래도 죽음을 모면하게 되어 급기야는 세상에 다시 나오게 되었다.

30여년이 흘러가는 동안에 강산은 옛날과 마찬가지이고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이 떠도는 그림자도 변함이 없건마는, 그 옛날 어질던 스승님들과 선배들, 그리고 절친했던 친구들은 다 어디로 가버렸기에 하나도 만나볼 수가 없단 말인가! 이렇게까지 된 것은 바로 내 자신이 아무데도 연접이 없이, 쓸데없는 나무토막이나 돌덩이의 신세가 되어, 이리 굴러다니며 넘어지고, 절리 굴러다니며 처박히곤 하는 동안에, 아! 슬프구나! 모두들 뜻밖에도 불의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구료! 만천공의 행적 중에는 여문(儷文)들이 적지 않았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심지어는 불에 타서 없어지기까지 하였으므로, 그 여러 원고 중에 단 한 장도 얻어 보지 못하고 있던 터인데, 천만 뜻밖에도, 시의 원고와 각가지 기록과 단편적인 글귀가 몇가지 남아있기에, 비록 졸필로나마 이를 추려서 베껴, 기록하여 두기에 이르게 되므로, 우선 「만천유고」라고 제목을 붙이니, 이는 마치 동풍에 얼음이 풀리고, 다 썩은 고목도 봄을 만나면 새 싹을 틔우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며, 모두가 위에 계신 주님의 넓고 크고 가없는 섭리로구나! 우주 안에 있는 참된 이치가 다 이와 같아서, 물리(物理)가 바로 철리(哲理)임을 깨달아 안다는 것은 위에 계신 주님의 뜻에 접촉함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영원한 무한을 바라보고 있는 자가 썼다.”

엄밀히 말해서, 蔓川遺稿 내용의 原文은 李檗 先生 作이 대부분이고, 筆生은 李承薰 進士이며, 30여년 후에, 조각들을 주어 모아서 한데 묶은, 編輯者는 丁若鏞 선생이니, 跋文의 내용 중에는 天眞消搖集에 중복되거나 내포되어 있는 것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만천유고를 위해서는 다행한 증명자료다.

그리고 이왕에 「만천유고」에 관하여 이야기가 났으니, 한가지 더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십계명가(十誡命歌)」의 작자(作者)에 관해서다. 위의 여러 번역문들이나 단행본 등에서 丁選菴을 丁巽菴으로 잘못 읽어서, 세가지 문헌에서 모두, 「십계명가」의 저작자를 손암 정약전(丁若銓)이라고 같이 수차 거듭 말하고 있고, 이것이 인용되는 문헌마다 같은 잘못이 거듭되고 있는데, 「십계명가」의 제목 밑에 쓴 글씨는 분명히 巽菴이 아니라 選菴이며, 따라서 정약전(丁若銓)이 아니라 정약종(丁若鍾)으로, 즉 정약전의 동생이며, 정약용 다산의 형이 되는 선암 정약종(選菴 丁若鍾)이 「十誡命가」의 저작자로 알아야 하겠으며, 거듭 인용되는 오류를 막아야 하겠다.<월간 천진암 제17호(1979. 9. 30>

입력 : 2012.04.04 오후 10:0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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