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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천주교회 창립사

Church history in Korea

복자 정철상 가롤로의 묘 조성(사진화보)

글 :  김학렬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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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천진암성지는 父子가 諡福되는 영광을 입었습니다. 2014. 12. 김학렬 신부
 
금년에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방한하시어 처음으로 우리 교회에 하신 말씀은, ‘이벽과 첫 세대 양반 원로들(Yi Byeok e i nobili anziani della prima generazione)’의 모범을 기억 속에 잘 간직하고 실천하라는 것이었습니다.(방한 첫날 한국 주교들에게 하신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첫 강론 말씀, 서울,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강당에서, 2014년 8월 14일, 목요일). 이는 분명히 한국천주교회의 창립선조들의 열정을 본받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후 광화문 광장에서 거행된 시복식에서는, 천진암성지와 관련하여 父子가 福者로 탄생하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와 그의 맏아들 정철상 가롤로 순교자가 복자로 탄생된 것입니다. 정약종 창립성현은 잘 알려져 있으나, 맏아들 정철상에 관하여서는 신자들은 물론 후손들 사이에서도 잘 기억되지 않고 있기에, 천진암성지에서 관련 자료를 알아보고, 그의 동생 성 정하상 바오로의 묘 옆에 疑墓(의묘)를 조성하여 영원히 기리고자 합니다.
1. 福者 정철상(丁喆祥-왕조실록과 사학징의에서는 성의 없이 哲祥이라고 기록하였으나, 같은 글자이지만 남보 p. 917에서 喆祥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므로 丁喆祥이 올바른 이름이다.) 가롤로는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와 李秀廷(이수정= cf. 한산 이씨, 남보 p. 65)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으로(1781년경 탄생),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 정약종의 말씀과 모범으로 천주교 신앙을 배우고, 교회 본분을 지키는 단련을 받았다(사학징의 69 - 父傳子習). 아버지 정약종은 한국천주교회의 창립자 중 한 분으로서, 천진암강학에도 참여하였고(cf. 십계명가 작성), 명례방 집회에도 참가하는(벽위편 권 2, 을사년)등, 신앙생활을 20년 동안이나 하였다(1781-1801, 신미년 1811 편지). 유명한 양반 집안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정철상은 쉽게 얻을 수 있는 세속의 명예를 업신여기고, 다만 한 가지 목적을 세웠으니, 덕이 높은 아버지에 걸맞은 아들의 모습을 보이며, 자기 영혼의 구원을 확실하게 하는 것만을 찾았다.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따라 조상의 제사에 참배하지 않았기 때문에, 할아버지(정재원)한테서 박해를 받으며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지만, 끝까지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신미년 편지). 그러자 從大夫(從大父로 작은 할아버지 丁載進을 일컫는다. - 족보 참조)가 邪學(천주교)을 금지하면서 주문모 신부를 바로 고하라는 뜻으로 송곳을 들어 찔렀는데도 과연 고하지 않았다. 갑인년(1794)에 지황이 모셔온 주신부는 몇 차례 정철상의 집에 와서 머물렀고, 최창현의 집에 가서 본 것도 여러 차례였으며, 천주교를 강론하였다(미사에 참례하였다. -사학징의 69 - 70).
2.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났을 때 그는 약 20세였으며, 아버지와 삼촌들(정약전, 정약용), 그리고 고모부 이승훈이 금부옥에 갇히게 되자, 가롤로는 관례에 따라 그들을 따라가서 옥 근처 밖에 머물며 그들의 시중을 들었고, 아버지가 순교하는 날 즉시 체포, 구금되어 문초를 받다가 고모부와 아버지가 순교한 바로 그 장소에서 참수 되었다(순조실록 권 2, 원년 2월 26일 임신-以犯上不道 捧遲晩正法; 사학징의 69, 丁哲祥 [若鐘子 辛酉二月二十六日 因鞫廳分付訊覈 四月初二日正法]). 그가 금부옥에서 시중드는 동안 재판관들은 그에게 사람을 보내어, 신부에 대한 모든 일과 신부가 숨어있는 장소를 말하도록 독촉하였으며, 그것이 아버지의 목숨을 구하는 길이라고 덧붙였다. 가롤로처럼 아버지를 향한 헌신적인 마음에 그 유혹은 무척 힘들었을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유혹에 끌려가지 않았다. 그에게 아무리 혹독한 고문을 가해도, 그 앞에서 형벌로 여러 친척들에게 고통을 가해도 그는 흔들림이 없었고, 천주교 공동체에 해가 될 수 있었던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3. 아버지 정약종이 순교한 후, 그는 한 달 남짓 옥에 갇혀 있었는데, 풍요하고 곱게만 자라왔던 이 젊은이는 그동안 자신이 먹을 음식비용을 대기 위해서 짚신을 삼아야 했다. 아마도 그는 많은 고문과 고통을 겪어야 했을 터인데, 하느님은 그에 관한 상세한 내용이 알려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가롤로는 기쁘게 형구 위에 올라갔으며, 그가 그토록 충실하게 발자취를 따랐던 아버지 아우구스티노를 만나러 갔다. 그의 시체는 가족들에 의해서 거두어졌고, 아버지와 함께 마재에 매장되었다(註; 신앙의 후손들에 의하여 수기로 수록된 정약종의 족보(문중 족보에는 정약종 집안이 아예 빠져 있다)에 의하면, 정약종은 광주군 동부면 拜謁尾리(윗두미)에 묘를 썼다가 안산 사사리로 이장되었었다. 정하상의 묘도 배알미리에 있다가 훼손되고 난 후에 천진암성지로 옮겨 모셨다. 따라서 정철상의 묘도 배알미리에 있었겠지만, 수기로 된 족보에서마저도 그는 아예 빠져있다. cf. 천진암성지 자료집 96권).
4.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는 미망인과 세 자녀를 남겨두었고(유조이 세실리아와 정하상과 그의 누나와 동생 정정혜 엘리사벳), 정철상 가롤로 역시 젊은 미망인과 아들 하나를 남겨두었다. 그들의 집과 재산은 모두 몰수 되어, 유가족들은 아무 도움도 없이 남겨졌는데, 그들의 친척은 죽음을 두려워하여 그들을 돕기를 꺼려했다. 그런데도 한 친구가 이 버림받은 유족들을 마재로 데려왔고, 친척들은 그들을 쫓을 용기가 없었다. (다블뤼 주교의 조선순교사비망기, [시복자료집 제 2집], 2006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pp. 295-297).
5. 헌종 기해 1839년 10월 18일에 척사 윤음(斥邪綸音)을 경외(京外)에 내렸는데, 이 윤음이 공포된 바로 그날, 한 용감한 여교우가 순교함으로써 덕과 헌신으로 짜여진 긴 생애의 갚음을 받았다. 그는 정하상 바오로의 어머니 유세시리아였는데, 1801년의 유명한 순교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後娶였다. 그는 남편에게서 천주교를 배워 처음 가졌던 열심을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고 보존하였다. 정 아우구스티노가 죽은 후, 유세시리아는 3명의 자녀와 함께 오랫동안 옥에 갇혀있었다. 옥에서 풀려나왔을 때는 모든 가산이 사라진 뒤였다. 아무 재산도 없으므로, 마재에 있는 시아주버니댁으로 갔는데, 시아주버니는 그를 도와주기는 고사하고 천만 가지로 집안 박해를 일으켰고, 극도의 빈궁 속에 신음하게 버려두었다. (cf. 다산시문집 제16권, 묘지명(墓誌銘), 계부(季父 丁載進) 가옹(稼翁)의 묘지명-우리 형제 3인이 젊어서 서울에 노닐었는데, 불행한 때를 만나 부형에게 근심을 크게 끼쳤다. 그런데 공이 더욱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기를 마치 불길이 집을 태우는 것처럼 하였다. 신유년(1801)에 화가 일어나자 공은 비분(悲憤)하여 살고 싶지 않은 듯하였다. 그러나 그 고아와 과부를 불쌍히 여기고 구휼하여 집을 장만해 주고 또 때때로 위급함을 구해주었다.…. 고아와 과부에게 미쳤도다 / 以及孤孀). 유세시리아의 맏딸이 얼마 가지 않아 죽었고, 순교자 정철상 가롤로의 아내와 아들도 죽었다. 그래서 그의 아들 바오로와 딸 엘리사벳 밖에 남지 않았다. 하루는 그가 꿈을 꾸었는데, 남편 아우구스티노가 그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천국에 방이 여덟 개 있는 집을 지었소. 그중 다섯은 찼는데 나머지 세 방은 아직 빈 채로 있소. 비참한 생활을 잘 참아 견디고 무엇보다도 우리 있는 데로 오는 것을 잊지 마오.’ 과연 그의 식구는 8명이었는데, 그 중 5명은 벌써 세상을 떠났으니, 아우구스티노와 그의 아들 가롤로는 1801년에 순교하였고, 아우구스티노의 딸(정하상의 누나)과 가롤로의 아내와 어린 아들은 얼마 전에 궁핍과 학대로 쓰러진 길이었다. 완전히 성취되게 되어있던 이 꿈으로 그는 많은 감명을 받았고, 새로운 용기가 솟아났다. (달레 중, 499)
 
2014년 12월 12일, 조선교구 설립자 성 정하상, 유진길 묘역에
복자 정철상 묘 추가 조성
 
천진암성지, 조선교구 설립자 성 정하상, 유진길 묘역에, 2014년 8월 16일에, 교황 프란치스코 성하의 광화문 광장 시복식에서 복자로 선출된 정철상 가롤로의 묘를, 추가로 세분의 묘를 다시 조성하였다.(2014.12.12. 오후1시경부터는 함박눈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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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자 정철상 묘를 조성한 후, 성지 부주임 이그레고리오 신부와 직원들 기념사진(2014년 12월 12일 오후 5시 38분, 오후 1시경부터 함박눈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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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자 정철상 묘를 조성한 후, 기도를 드리고 있는 성지 부주임 이그레고리오 신부와 직원들(2014년 12월 12일 오후 5시 38분, 오후 1시경부터 함박눈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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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자 정철상 묘를 조성한 후, 기도를 드리고 있는 성지 부주임 이그레고리오 신부와 직원들(2014년 12월 12일 오후 5시 38분, 오후 1시경부터 함박눈이 쏟아졌다.)
 

조선교구 설립자 성 정하상 유해(1981년 12월 31일에 이장 33년후 다시 발굴, 천진암성지 주임 김학렬 신부, 광암성당에 모심(이장하기 전)(2014.12.11)


조선교구 설립자 성 정하상 유해(1981년 12월 31일에 이장 33년후 다시 발굴), 천진암성지 주임 김학렬 신부, 광암성당에 모심(이장하기 전)(2014.12.11)
 

1981년 12월 31일 이장, 순교 복자 정하상 바오로 유해(1981년 10월 18일(일)에 여의도에서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행사가 있었습니다. 무서운 인내와 신앙의 열정으로 북경을 아홉 차례나 왕래하던, 정하상 성인의 노력으로 1831년 9월 9일에 조선교구가 설립되었던 것입니다. 교구설립 후 8년 만에 기해박해로, 1839년에 순교하신 정하상 성인은 고향 마재 건너, 천진암 성지 근처 팔당댐 옆에, 아버지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곁에 묻혀계셨습니다. 천진암성지에서는 이분들의 무덤을 확인하였고, 이내 천진암성지 구내로 창립선조들과 함께 이장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천진암을 반대하는 교회 안팎의 훼방으로 이장을 못하고 있던 중, 모 변호사의 별장 뒤란에 있던 무덤이 훼손, 소각되는 변고가 일어나고야 말았습니다. 후에 이를 인지한, 천진암성지 측에서 흩어진 치아, 발가락뼈와 관조각 등을 모아서 천진암성지로 옮겨, 조선교구 설립자 묘역에 안장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교회내외의 훼방꾼들은 성 정하상 바오로의 무덤을 그 후에도 한 번도 찾지 않았습니다(가톨릭신문 1981. 11. 22; 월보 천진암 부록 1982. 1. 1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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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 테두리 둘레석: 2,620x3,380x600(2014.12.12. 오후1시경부터는 함박눈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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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 테두리 둘레석: 2,620x3,380x600(2014.12.12. 오후1시경부터는 함박눈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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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 테두리 둘레석: 2,620x3,380x600(2014.12.12. 오후1시경부터는 함박눈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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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 테두리 둘레석: 2,620x3,380x600(2014.12.12. 오후1시경부터는 함박눈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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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 테두리 둘레석: 2,620x3,380x600(2014.12.12. 오후1시경부터는 함박눈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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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 테두리 둘레석: 2,620x3,380x600(2014.12.12. 오후1시경부터는 함박눈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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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 테두리 둘레석: 2,620x3,380x600(2014.12.12. 오후1시경부터는 함박눈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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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 테두리 둘레석: 2,620x3,380x600(2014.12.12. 오후1시경부터는 함박눈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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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 테두리 둘레석: 2,620x3,380x600(2014.12.12. 오후1시경부터는 함박눈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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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정하상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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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 테두리 둘레석: 2,620x3,380x600(2014.12.12. 오후1시경부터는 함박눈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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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자 정철상 가롤로 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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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 테두리 둘레석: 2,620x3,380x600(2014.12.12. 오후1시경부터는 함박눈이 내렸다)공사후, 묘봉분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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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4.11.29 오전 10: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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