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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천주교회 창립사

Church history in Korea

한국천주교 초기교회사의 쟁점연구에 대한 소견

글 :  김학렬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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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천주교 초기교회사의 쟁점연구에 대한 소견
 
2015. 7. 9. 김학렬 신부.
 
1. 일 년 전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방한에 앞서, 교회내외에 물의를 일으킨 발표가 있었다.
‘윤민구, 초기 한국천주교회사의 쟁점연구, 2014 국학 자료원’. 이란 글이 발표된 것이다.
교회사는 역사학과 신학의 종합이므로, 사목적인 면에서 교회의 인가(Imprimatur)를 받아야만 출간이 가능하다. 그런데 이를 무시하고, 추정에 의한 자신의 주관적 견해만이 진실이고, 타인의 견해는 오류라며 자신을 내세운 것이다.
그러나 추정에 의한 주관적 논리는 논자의 생각일 뿐,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격이 되고, 기초가 부실한 沙上樓閣사상누각으로서, 올바른 논거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다음과 같은 사례로 밝혀보고자 한다.
 
2. 논자는 서문에서, 모든 자료가 1930년을 전후로,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거짓 자료라고 미리 결론을 내려놓고, 그 근거로 아오스딩이라는 철자법이 시기를 푸는 열쇠라며, '1920-30년대는 와스딩과 아오스딩이 혼용되면서 차츰 아오스딩으로 변환되던 시기였던 것 같다. 그러므로 아무리 빨라도 혼용되던 시기인 1920-30년 이후에 쓰여졌다고 볼 수 있다’고 하였다. (p. 292-297)
 
반론; 가. 경향신문의 별지 부록으로 발간된 보감 (1906년) 은 처음부터 현대적인 풀어쓰기를 하고 있어, p. 6 에서만 아오스딩과 그레고리오를 9회나 현대적 표기법으로 풀어서 쓰고 있다.
        나. 1895을미년에 간행된 치명일기에서, 223. 손 니고나오 와 444. 홍 다니스나오, 622. 김 비오의 경우에도 그대로 풀어서 쓰고 있으므로, 1800년대에도 벌써 현대적인 철자법이 혼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897년에 감목 민와스딩 감준으로 발행된 [일과절요]의 련옥도문에서, 셩 마토ㅔ라 하면서도 셩 니고나오는 (p.63) 풀어서 쓰고 있다.
이러한 사례는 1900년에 민와스딩 감준으로 발행된 [텬쥬셩교공과]의 련옥도문에서도 그대로 이어져, 셩 마토ㅔ라 하면서도 셩 니고나오는 (p.62) 풀어서 쓰고 있다. 여기서 성 제르바시오와 성 쁘로다시오의 경우에는 셩 열왜(熱爾瓦削 제르바시오)와 셩 뵤(玻羅大削 쁘로다시오) 라고 하였다.(p. 63; 경향잡지 1920, p. 56 참조)
      다. 탁덕 한바오로 역주 四史聖經(1910초간 1922년판)에서도, 한바오로와 민와스딩과 같이 혼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마태오 10장에서 종도를 간택할 때도, 그 이름을 다 현대적 철자법으로 쓰고 있다.
      라. 1700년대 말에 번역되어, 신유박해시에 압수되었던 한글본 성년광익에서도, 현대적인 표현이 혼용되고 있다. [성년광익 I] 춘계 제 이편의 목록에서 ‘십구일셩어서비오쥬교, 일이일 셩나사로현슈’라 하였고(p. 258), 본문에서도 그대로 어서비오와 나사로로 표현하고 있다.(p. 321, 332).
1700년대에 번역되어 1800년대에 필사되었을 [성경직해광익] 한글본의 성모승천 첨례성경에서도, ‘엇디 에사오를 보디 못하엿나냐’하면서 에솨라고 하지 않았다. 11월 3일 성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의 경우에는, ‘셩 바아랑시스구 사베뤼 셩 이나쉬로 표현하고 있다.(천진암성지자료집 113권, p. 325; 111권, p. 266, 268.)
그러나 [성교감략, 1897년 민 와스딩 감쥰]에서는 인노성시오, 방지거 사베리오 원션시오로 풀어서 쓰고 있다.(p.80, 86, 89, 99).
 
대안; [니벽전]에서는 ‘뎡유 뎡아오스딩셔우등셔졍이라’ 하였고, [유한당언행실록]에서는, ‘경자납월 뎡아우스딩 셔우슈표’라 하였고, [한글본 성교요지]에서는 ‘임신년 뎡아오스딩 등셔우약현셔실’이라고 하였다.
이런 사본들은 용지의 통용시기와 간지의 기록 등,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1900년대를 전후로 한, 1897정유년에 [니벽전]을 필사하고, 1900경자년에 [유한당 언행실록]을, 1932임신년에 한글본 [성교요지]를 필사하였다고 여겨진다.
한국천주교회의 창립과 이벽 성조에 대하여 말레시아 페낭신학교에서 교육을 받아(신학교 역사교과서 참조), 초기교회의 역사적인 사실을 잘 알고는 있었으나, 모두 다 배교자로 여기는 교회내의 분위기 속에서 1900년대를 전후한 시기를 살았던, 정규하(1863 - 1943) 신부를 필사자로 추정하여 볼 수 있겠다.
정규하 신부는 자신이 쓴 영세대장 등에서 와스딩이라고 자신의 본명을 쓰면서도, 라틴어의 S. Augustinus를 알고 있었기에 [유한당 언행실록]에서는 무의식 중에 아우스딩이라고(라틴어의 발음을 모르면서 아우스딩이라는 발음을 쓸 수는 없을 것이다.) 표현했으리라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3. 논자는 인명과 지명에서 개신교 성경의 용어가 등장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가짜이며 사기라고 표현하였다. (p. 62- ).
 
반론;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특히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가정에서, 세례명을 그냥 이름으로 부르다가, 아예 호적에 기록되는 이름이 되기도 하였다. 한국인 신부들의 이름에도, 한자 세례명(본명)을 이름으로 그대로 쓰는 사례가 1900년대를 전후하여 나타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32번째로 서품된 이 若瑟(1895-1961) 요셉 신부는 1919년에 대구 유스티노 신학교를 졸업하고 신부로서 서품을 받았다.
75번째 송남호 요셉 신부(?)는 宋 若瑟이란 필명으로 [소주교의 수기문]을(1835.10.20에 서거한지 100주년을 맞아) 가톨릭 청년 1935년 9월호와 10월호에 번역하여 발표하고 있다.
서울 교구의 83번째 양기섭(1905-1982)베드로 신부는 [가톨릭청년]이 1933년 6월에 창간되었을 때, 梁 彼得이란(성교요지4절 見彼得後書 참조) 필명으로 <비오 11세와 출판물>을 썼으나, 다음 호부터는 梁基涉이란 실명으로 글을 올린 것으로 보인다.
또한 88번째 김 彼得(1907-1954) 베드로 신부는 황해도 풍천 출신으로, 11세에 용산 예수성심 신학교에 입학한 후 1930년에 서품을 받았다. 그는 1930년대에 金 彼得이란 필명으로 [가톨릭 청년]에 많은 글을 쓰며 활동하였다(1934년 5월호에 [천국의 존재]를 시작으로, 1935년 3월,4월,5월,9월,10월호 등).
82번째 이복영(1905 -1958) 요셉 신부는 이문근 신부의 삼촌으로서, 수원 (북수동) 본당신부로 사목하다가 선종하였다. 그는 [이스라엘은 어디로]란 제목의 가톨릭청년 1935년 8월호 글에서, ‘예호아(天主)의 간선하신 백성 유태민족(猶太民族)은 구세주 예수를 학살한 죄벌로 말미암아.. 유태인’으로 표현하고 있어, 1900년대를 전후하여서, (즉 만천유고 등에 관한 문헌들이 필사되던 시기에도,) 천주교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던 개신교의 용어도 자유롭게 사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예:성년광익, p. 469 나자릣 => 나사렛, 가톨릭청년 1933. 10월호 p. 15, 17.=빠리 외방선교회 송세흥 신부의 글).
이는 당시의 우리 신부님들이 열교라고 부르는 개신교의 성경을 읽거나 참고하였을 리는 만무하고, 용어들이 변화하여 가는 과정에서 개신교의 용어와 같은 것들도 천주교회에서 사용하였던 결과라고 판단된다.
오히려 개신교의 성경이 천주교의 성경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증거를 확인할 수 있다.
당시 개신교식 필명과 용어로 글을 썼던 여러 신부님들이 열교(개신교)의 용어를 사용하고 있으므로, 이를 두고 논자의 추정대로라면 다음과 같이 쓸 수 있을 것이다.
‘열교의 신자들이 가짜 세례명(피득, 약슬, 보록)으로 위장하고 신학교에 들어와 신부가 되었고, 또 사기를 치기 위하여 [가톨릭 청년] 등에 글을 썼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최초로 개신교 중국어 성경을 번역한 로버트 모리슨은 개신교 목사로서, 파리외방선교회의 쟝 바쎄 신부의 백여년전 번역을 저본으로 하여, 모리슨역으로 번역하여 출판하였다.
그는 1819.11.25.자 편지에서, ‘제가 처음으로 인쇄한 사도행전은 앞서 말씀드린 중국어 성경사본에 의한 것으로, 이 사본은 신실한 로마교회 선교사가 쓴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교육받은 어느 중국인 로마 가톨릭교인이 불태워버렸습니다. 이 책을 내가 번역한 이단서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이환진, 19세기와 20세기 중국어 성서, 2000, p. 51).
 
대안; 중국어의 성경과 기도문에서 인명과 지명은 끊임없이 변화하여 왔다. 중국 북부의 예수회의 번역에서는 예수와 아멘이라고 하였으나, 중국 남부의 파리외방선교회의 구역에서는 이를 여수와 아믄으로 바꾼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유 빠치피코 신부의 성모경은 아래와 같다.
 
Da una lettera cinese del P. Pacifico Ju, L‘Ave Maria in Coreana.
<야우 마리아, 만피 에라지아쟈, 쥬여이어 녀즁이위찬미, 이여수, 병위찬미,
(亞物 瑪利亞, 滿被 額辣濟亞者, 主與爾偕焉 女中爾爲讚美, 爾胎子耶蘇, 並爲讚美,
텬쥬셩모마리아, 위아등죄인, 금긔텬주, (지?)아등사후 아믄.>
天主聖母瑪利亞, 爲我等罪人, 今祈天主, 及我等死候 阿們.)
 
우리말로 아멘과 아믄을 중국어로 표기함에 있어, 처음 라명견 역본에서는 亞明이라 하였고, 이마두 역본에서는 亞孟이라 하였다.
영국 Cambridge 대학에 있는 Jean Basset 신부의 필사본에서는 아직도 亞孟이라고 하였으나, 로마Casanatese 도서관에 있는 Jean Basset의 필사본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필레몬서 25절 등에 이르는 말미에서 阿孟이라고 표기하였고, 이후 개신교의 모리슨 역(1823)에서는 口亞口門이라 하였고, 유 빠치피코 신부는 阿們이라 함으로써 아멘의 중국어 표기가 꾸준히 변화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4. 논자는 왜 이 시기에 그런 사기극들이 많이 벌어졌을까에 대한 이유로, ‘1925. 7. 5일에 있었던 순교자 79위 시복식을 계기로, 순교자들과 천주교회사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었기 때문이라 하였다.
또한 1930년 이후부터는 청구학회가 발족되어 논문들이 본격적으로 쏟아지기 시작하여, 순교자에 대해 더욱 깊은 지식과 정보들을 얻을 수 있었다며, 이를 빙자한 사기를 치는 무리들이 많이 생겨났던 것 같다.’고 하였다.(p. 302-303).
그러나 논자는 사기를 쳐서 사본을 만드는 원본의 구체적인 논거를 제시하지 못한 채(!), 마치 청구학회의 글들이 이벽 성조를 순교자로 만들어내는 위작의 원본이나 되는 것처럼 주장하고 있다.
 
반론; ‘1785년은 조선 내에 첫 순교자(김범우)의 광영을 주었을 뿐 아니라, 또한 이승훈 이벽 같은 중견인물들이 돈좌(頓挫=갑자기 세력이 꺾임)되는 불행한 참상을 뵈여주었다.---이벽도 가정에서의 박해에 패배자가 되고 말엇스니, 배교를 [死]로서 逼迫핍박하는 자기 부친의 위협에는 불복할만한 膽力담력이 없던 것이다.’(가톨릭청년, 1933년 10월호 p.16).
이와 같이 1900년대에는 이벽이 배교자로 치부될 뿐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하는 상태가 계속 유지 되어 왔었다.
1967년에 [만천유고]에 관한 글들이 가톨릭 시보에(1967. 8. 27일자, 제 582호) 실릴 당시에도, 보감과 달레의 교회사(1874년에 출판된 프랑스어본이 100 여년 후인 1979년에 한국에서 한글로 번역 출간됨)에 실린 바를, 레옹 피숑 신부가 그대로 인용한 것과 같이, 한국천주교회 창립선조들을 배교자들로 치부하며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이벽 성조의 족보와 묘도 확인되지 않았던 상태였다.(유홍열, 한국천주교회사, 1962 초판발행이 있었으나, 이벽의 순교사실은 아예 빠져있다.)
1963년에 이르러서야 남상철 회장이 주재용 신부와 정원진 신부의 부탁으로 주어사를 찾아 경향잡지에 게재하게 되었고, 이어서 김양선 목사의 [만천유고] 수집사실이 1967년에 발표되어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1963년부터 주재용, 정원진 신부와 남상철 회장 등이 답사하며 그토록 애타게 찾고 있던 내용들이, [이벽전]에는 가족 상황과 함께 이미 자세히 실려 있다.
[이벽전]에, 부친의 호가 사연이며 휘는 부만이고, 포천 태생으로 3형제이며, 부인이 권씨라는 사실도 실려있다.
이밖에도 다양한 사실의 확인은 [만천유고]가 발표된 지 십여년 후에야, 비로소 변기영 신부의 관심과 끈질긴 노력으로 족보를 찾게 되고, 이어서 묘가 발굴되면서 확인되었던 것이다.(1979년)
 
대안; 교회사의 사건을 다루는데 있어서는, ‘사건이 일어났던 시대로 돌아가서 그 시대의 분위기 속에서 조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시대의 기준으로 판단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초기 한국천주교회의 창립자들과 관련하여서, 우리들이 자주 착각하는 오류중의 하나가 바로, 우리시대의 잣대로 그들을 재단하는 것이다.
한국천주교회의 창립선조들은 신앙초기의 열성으로 천주교를 찾고자하던 분들이었지, 지금의 박사들(?)과 같이 많은 신학을 배우고, 성경을 따로 배워서 완벽한 신앙지식을 갖춘 분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 시대의 상황으로 돌아가서, 그 시대의 부족한 신앙지식으로 그들이 표현할 수 있는 글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감안해야 하는 것이다. 끝.
입력 : 2015.07.09 오후 4: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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