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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천주교회 창립사

Church history in Korea

하느님의 종 이승훈 베드로

글 :  김학렬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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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9월에 평화방송 TV에서 방영될 하느님의 종 이승훈 베드로 녹화 자료
교회사의 원칙을 통해 본 한국천주교회의 창립선조.
 
-하느님의 종 이승훈 베드로-
 
1.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인용한 황사영 백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선출되신 다음날 아침 일찍 성모 설지전성당을 찾아 성모님의 도움을 청하셨다. 이어서 다가온 부활절에는 베드로 대성전 지하 동굴로 베드로 사도의 묘소를 찾아 참배하시면서, 로마교회의 창립자들이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임을 확인하셨다.(에우세비우스의 교회사 참조). 한국천주교회의 창립사실을 잘 알고 계시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2015. 3. 12. 로마교회의 창립자인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의 묘소를 찾아 참배하는(Ad Limina) 한국 주교님들에게, ‘한국의 첫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신앙을 교회의 성사생활로 온전히 나타내기 전부터, 이미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이루어, 신앙과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습니다.’(사도 4, 32 참조)고 하였다. 또한 이에 앞서 2014. 8. 14에, 방한 중 한국주교님들께 하신 말씀 속에서도, ‘이벽과 첫 세대 양반 원로들은 평신도들이었고, 그들 스스로 개척해 나갔습니다.’(일어나 비추어라, p. 21)고 하였다. 이러한 말씀의 의미는 한국의 첫 신자들이 물로 세례를 받기 전부터, 이미 예루살렘 공동체처럼 신자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례로 신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신자가 된 사람이라야 비로소 세례를 받는 것으로서, 신앙이 세례보다 앞선 행위임을 강조하신 것이다.(교의헌장 Lumen Gentium 14항-성령의 감도를 받아 교회에 결합되려는 명백한 의사를 표명한 세례 준비자는 이 소망 자체로써 교회와 결합되는 것이므로, 자모이신 교회는 그들을 이미 자기 자녀로 알아 사랑하고 돌보아 주며 감싸주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 말씀의 근거는 황사영 백서였다. 백서 101-102행(김시준역 벽위편 p. 306)에, ‘동방의 우리나라에 내리신 주님의 은혜는 다른 나라보다 월등하게 컸습니다. 일찍이 전교자가 온 일도 없이, 주님께서 친히 특별하게 성교교리를 가르쳐 주셨고, 이어서 성사를 베풀어 줄 이를 주시는 등, 내리신 갖가지 특은을 손가락으로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101/主恩之於東國 可謂逈越尋常 初未嘗有傳敎者來 而主特擧斯道而親
102/卑之 繼又以授聖事者予之 種種特恩 指不勝屈.
 
또한 한국천주교회의 첫 공식 기관지인 보감(1906)에서는, ‘조선에 천주성교회 창립하니라’. 하였다. 그러므로 이승훈 베드로가 북경에서 세례성사를 받기 이전에, 이미 한국천주교회는 천진암강학으로 창립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성 요한 바오로 II 교황께서는, ‘한국천주교 발상지(탄생지, natali loco) 천진암성지의 새 성전 머릿돌에 교황강복을 베푸노니, 하느님이 보우하사, 온 겨레가 영원히 화목하기를 비노라’. (1993. 9. 21)하며 강복문을 보내셨다.
 
2. 천진암성지에는 한국천주교회 창립선조 5위의 묘와, 조선교구설립자들인 정하상 성인과 유진길 성인의 묘역, 창립선조들의 가족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한국천주교창립자들은 친인척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 정하상 성인의 부친 복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고모부 하느님의 종 이승훈베드로, 큰댁의 큰 엄마(공인 이씨 묘지명 참조)의 동생 하느님의 종 이벽 세례자 요한, 그리고 정하상 성인의 엄마 유조이 세실리아 성녀의 외가쪽 친척이 하느님의 종 권철신 암브로시오와 권일신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인 것이다. (한양 조씨의 족보를 보면, 조동섬 유스티노의 형 조동욱의 손자가 복자 조숙 베드로이다. 복자는 권일신의 따님 권천례 데레사 복녀와 함께 15년 이상을 동정부부로 살면서, 친척이 되는 정하상 바오로 성인의 북경여행을 보필하였다.)
 
3. 역사학에는 진실을 판단하는 원칙이 있다. 시공상 가까운 기록을 우선시하고, 반대자들의(이기경, 홍낙안) 주장을 핑계를 대고 감추려는 옹호자들(정약용, 순교자들)의 주장보다 우선시하여 진실에 가깝다고 판단한다. 그러므로 교회사를 연구하면서, 여러 가지 주장이 있을 수 있으나, 무턱대고 자기주장이 옳다고 우겨서는 안 되고, 이러한 원칙에 따라서 진실을 가려내야 한다.
 
교회사는 역사학과 신학의 종합이다. 역사학만 알고 신학을 모르는 자들은 정약용 사도 요한 승지의 참회생활과 종부성사, 그의 맏아들 학연의 세례와, 누이동생의 성사생활을 거짓으로 생각하며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부족함을 드러내고 만다.(달레 중, 186) 편협한 자신의 주관적인 판단으로 역사를 왜곡하게 되는 것이다. 교회사의 판단 근거는 도표와 같다.
 
* 시간 = 일기 > 회고록(묘지명=미화) + 공간 = 국내(다블뤼 비망기) > 국외 자료(달레)
* 박해자들의 주장 > 신자들의 변명 = 이기경의 벽위편 > 정약용의 묘지명
* 고문에 의한 자백 = 증거 효력 상실 + 순교 = 박해자들의 신앙증오로, 죽음!
 
진실 = 일기 > 회고록(정약용의 묘지명은 자구적 의미가 아니라, 수수께끼를 풀 듯해야한다.)
 
초기 한국천주교회의 창립사는 상당부분 문도공 정약용 사도요한 승지의 기록에 의존한다. 정약용은 500여권의 기록을 남긴 대 저술가이다. 그러나 많은 부분이 회고록의 성격을 띠는 것으로서, 멸문지화를 방지하면서도 후대인들에게 최소한의 기록을 남기려고 하였으므로, 우리가 그의 글을 이해하려면 그 이면에 숨어있는 의미를 수수께끼를 풀듯 해야 한다. 예를 들자면,
 
가. 여유당 시문집 15권, 선중씨 정약전 묘지명에, ‘임인1782년 가을에 우리 형제는 윤모(尹某=윤지충, 이종 4촌간으로, 윤지충의 고모가 정약용의 어머니 해남 윤씨이다. 제사를 폐지하여 순교하였기 때문에 지충이란 이름을 밝히지 못하고 있다.)와 함께 봉은사(奉恩寺)에서 경의과(經義科)를 익히고 15일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 이듬해 1783봄 백중계(伯仲季) 삼형제가 함께 감시(監試)에 합격하였으나, 회시(會試)에는 나만이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다.’며 글을 남겼다. 이렇게 측근들에 관하여 정약용은 자세히 많은 기록을 남기면서도, 천주교와 관련된 인물들에 대하여서는 최소화 하였고 묘지명도 남기지 않았다. 그러므로 역으로 묘지명을 남기지 않은 측근들은 순교자들이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얻게 된다. 예컨데, 집안사람들에 대한 묘지명이 모두 있으나, 바로위의 형 정약종, 이종 4촌 윤지충(그의 6촌 남고 윤참의 윤지범의 묘지명은 남기고 있다.), 자형 이승훈, 사돈 형 이벽 순교자에 대해서는 묘지명이 없는 것이다.
 
나. 작은 아들 학유에게 주는 가계에, [매양 열흘쯤이 되면 집안에 쌓여 있는 편지를 점검하여 번잡스럽거나 남의 눈에 걸릴 만한 것이 있으면 하나하나 가려내어 심한 것은 불에 태우고, 덜한 것은 노(끈)를 꼬고, 그 다음 것은 찢어진 벽을 바르거나 책의를 만들어 정신이 산뜻해지도록 해야 한다.
 
편지 한 장을 쓸 때마다 모름지기 두번 세번 읽어보면서 기원하기를, “이 편지가 사거리의 번화가에 떨어져 있어 원수진 사람이 열어보더라도 나에게 죄가 없을 것인가?” 라고 하고, 또, “이 편지가 수백 년 뒤까지 유전(流傳)되어 허다한 식별력 있는 사람들에게 보여 져도 나에게 비난이 없을 것인가?”라고 한 뒤에 봉함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정약용이 남긴 글은 교회 역사에 관한한, 축약된 최소한의 글이므로, 다른 기록과 일치하면 바로 확대하여 해석해도 되는 것이다. (예; 한국천주교회의 발상지(locus natalis)가 천진암성지임을 정약용의 ‘講學于天眞菴 주어사설중 이벽야지 장촉담경’이란 글과, 성 다블뤼 주교의 비망기에 나오는 ‘Ardus et difiiciles’ 란 표현을 통하여 확증할 수 있다.)
 
4. 이승훈의 가문은 평창 이씨 가문으로, 많은 사람이 정계에 진출해 있었다.
 
이승훈(1756-1801)은 부친 이동욱(1738-1794)과 모친 여주 이씨(이가환의 누나)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이동욱은 영월 도호부사(이벽전에 나오듯이, 재임 당시 영월 자규루 상량문을 썼다)를 지냈고, 의주부윤(종 2품)에 이르렀다. 이승훈의 집은 남문 밖의 염초(=화약고)천 다리에 있어, 지금의 죽림동 지역, 반석방에서 태어나 蔓草川 부근에 거주하였기에, 호를 蔓川(蔓溪)이라 하였다. 마재의 정씨 가문에 장가를 들어 세 아들을 낳았다. 1780년 24세에 진사에 급제한 그는, 외삼촌 이가환(1742-1801)과 그의 종조 성호 이익의 영향을 받으며, 권철신의 문하에서 이벽, 정약용, 정약전, 이윤하(?-1793), 이기경(1756-1819) 등과 학문적 교류를 통해 성장하였다.
 
정약용의 선중씨 묘지명을 보면, 이승훈도 당시의 강학에 참석하였음을 유추할 수가 있다. 정약전 묘지명에, ‘약전이 與李潤夏,李承薰,金源星等。 등과 돌같이 굳은 친분을 맺고 (定爲石交) --약전이 녹암(鹿菴) 권철신(權哲身)의 문하(門下)로 들어가 가르침을 받았다. --그때 그곳에 모인 사람은 김원성ㆍ권상학(權相學)ㆍ이총억(李寵億) 등 몇몇 사람이었다. --이때 이승훈도 자신을 가다듬고 노력하였으므로(當此時 李承薰亦淬礪自強), 함께 서교(西郊)로 나아가, 향사례(鄕射禮)를 행하니, 모인 사람이 백여 명이었다.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사람 또한 많았다.’ 이렇게 강학을 전후하여 이승훈의 활동이 묘사되고 있으며 이들과 함께 하고 있으므로, 이승훈도 강학에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cf. 주재용, 옹위 54.)
 
천진암강학에서, 어떤 책을 가지고 어느 정도까지 공부하였는지를 말해주는 것으로는, 벽위편에서 하빈 신후담이 천학초함을 읽고 조목조목 비판하고 있는 글이 실려있는 것으로 보아 강학회자들이 얼마나 깊이 천학을 연구하였는지 유추해 볼 수 있다. 정약용이 학연에게 주는 가계에서도, 마테오 릿치 신부를 도와 일한 徐光啓(1562-1627)가 편찬한《농정전서(農政全書)》까지 읽고 인용할 정도라면, 천학초함을 비롯한 모든 서학서를 다 읽고 공부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5. 천진암강학으로 한국천주교회를 창립한 근거 문헌은 여러 가지다.
 
가. 聖 Maubant 신부가 1838년 12월 3일에 龍仁 양지 공소에서 쓴 편지에, 조선에 그리스도교의 창립(l'etablissement)에 관하여, 이벽과 이승훈이 노력하였다고 적고 있다.
 
나. 권철신 묘지명에서, 석재기해동 講學于天眞菴 주어사설중 이벽야지 장촉담경이라 하였다. 기해1839년박해가 있기 60전인, 같은 기해년 1779년에 한국천주교는 창립되었다.
 
다. 우리나라의 3번째(정규하, 강도영, 강성삼) 신부님들부터 배운 말레시아 페낭신학교의 역사 교과서에도 그런 내용이 들어 있다.
 
6. 이승훈의 북당 세례
 
아버지인 동지사 서장관을 따라 자제군관으로 5개월 가량의 여행 중, 북경에 머무는 40 여 일 사이에 세례까지 받았다는 것은, 이승훈이 이미 잘 준비되어 갔음을 의미한다.
 
가. 우선 하느님의 섭리는 이승훈의 북경행을 두 배의 확률로 아버지를 동행하도록 안배하셨다. 정조실록 1784년, -02-17, 동지 겸 사은 정사 황인점·부사 유의양이 장계하다에서,
‘올해 정월 초1일 5경(更)에 신들이(동지 정사 황인점, 부사 유의양) 서장관 이동욱 및 사은 정사신(謝恩正使臣 =정사 홍낙성, 부사 윤사국, 서장관 이노춘)과 함께 두 사행의 정관(正官) 49원(員)을 거느리고 대궐에 가서 태화전(太和殿) 뜰 서반(西班)에 들어가 저들의 동반·서반 및 유구국의 사신과 마찬가지로 행례(行禮)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동지사가 사은사를 겸하여 한 번에 가던 통례와는 달리, 이번 사행에서는 사행 인원이 거의 두배에 가까웠고, 두 팀이 한 번에 출발하여, 이승훈이 쉽게 연행에 참여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나. 북경의 북당 서십고 성당 순례방문하여 미사를 봉헌하였는데, 2013.3. 이었다. 그 당시 필자의 강론내용은, 이승훈 성현이 북당에서 (물로 씻는)세례를 받은 것은 유효하였으나, 세례집전 자격이 부족한 신부가 세례를 주었기 때문에 부당한(validum sed illicitum) 것이었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예수회의 적응주의를 두고 중국에서는 이미 제례논쟁이 일어났고, 영화 Mission 과 같은 배경에서 권력층의 미움을 샀던 예수회는 1773년에 이미 해산되었다.(나폴레옹의 실각이후 예수회는 1814년에 복원되어 현재에 이른다.) 그런데 10년 전에 해산된 예수회의 신부인 그라몽(양동재) 신부가 북당에 식객으로 머물러 있으면서, 주변 신부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승훈에게 그냥 세례를 주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승훈은 제사금령도 알지 못한 채 2월 22일(? 베드로 사도좌 축일)에 세례를 받고 돌아왔다. 제사 금령을 본격적으로 시행한 사람은 뒤늦게 1785년에 북경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온 구베아 주교였다. 그는 포르투갈 출신의 프란치스코 회원으로서 수학자였다. 그러므로 구베아 주교는 이승훈에 관하여 이야기 할 때마다 수학에 관한 사항을 강조하여 말하고 있다. 이승훈에게 부당한 세례를 주었다고 생각한 구베아 주교는 그라몽 신부를 바로 추방하였고, 다시 북경에 돌아올 수 없었던 그라몽 신부는 마카오에서 선종하였다.
 
다. 이승훈은 미리 준비되어 북경에 파견되어 갔고, 결국 세례를 받고 돌아왔다. 아무리 주변 신부들이 반대하였다고는 하나, 40일 만에 필담으로 교리를 배워 영세하였다는 것은, 이벽이 잘 준비하여 보낸(꾸며서 보낸 =裝送이승훈) 사실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잘 준비하였음을 보여주는 문헌으로는, 황사영의 백서44행에, (布衣李檗大奇之-承薰 李檗密托曰 北京有天主堂 堂中有西士傳敎者--求信經一部 幷請領洗--必勿空還.) ‘이승훈은 벼슬하지 않는 선비인 이벽이 아주 기특히 여기고 있어, 이벽이 이승훈에게 은밀히 부탁하였습니다. 북경에 가면 천주당이 있고, 성당에는 서양 전교자가 있으니, 기도서를 구해오고 더불어 영세를 청하여 받고, -- 빈손으로 돌아오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김시준역 벽위편 p. 153. 신해진산의 변중, 24. 거상중의 신, 이기경의 상소(1791.11.13)에서, [1783계묘년 겨울에 승훈이 중국에 들어갈 때, 신이 또한 전별차 나아갔는데, 승훈이 말하기를, ‘내가 서양서적을 구입하려고 하는데 재력이 부족하니, 혹 서로 도울 길이 있겠는가?’. 신이 대답하기를 ‘내가 무슨재력이 있겠는가’하고 돌아와 하필이면 서양책인가 하였습니다.] 이렇게 나중에 박해자 편에 서게 된 친구 이기경은, 이승훈의 북경행을 알면서도 돕지 않았다.
이만수의 토사주문 (1801. 10. 27 실록)에서, ‘정약종이 공초(供招)하기를, ‘맨 처음에 이벽이 서양학(西洋學)이 있다는 것을 듣고는 이승훈(李承熏)이 그 아비 이동욱(李東郁)의 공사(貢使) 행차에 따라가도록 행장(行裝)을 꾸려 보내어(추국일기 1801.2.18 권철신 공초에서도, 以日身之門徒 裝送之時--裝送之事 하며, 윤유일을 치장하여 보냈다고 한다.) 양인(洋人)이 거처하는 천주당(天主堂)에 들어가 양인과 더불어 친교를 맺고 양서(洋書)를 구입하여 돌아왔는데, -- 이승훈이 구입해 온 사서(邪書)를 언문(諺文)으로 번역하여 널리 전파하였으니, 이가환이 실제 주관하였습니다’(토역반교문, 若鍾供。原初 李蘗聞有西洋學。裝送李承薰).
 
라. 달레 상, 306- 에서도, 잘 준비시켜 보낸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하늘이 주신 기회, 천지창조와 종말, 천체의 움직임, 영혼육신의 결합, 강생구속과 천당과 지옥의 상선벌악의 내용을 교육하면서, 우리 민족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섭리라고 하였다. 그래서 승훈은 몇권의 책을 읽어보았고, 천주당을 찾아 서양선비에게 신앙 실천방법을 배워오게. 우리 민족의 큰 문제가 자네 손에 달려 있으니, 부디 경솔하게 행동하지 말게! 하는 이벽의 부탁을 받고 떠났다.)
 
마. 성세를 주기 전에 많은 문제를 물어보자(찰고) 모두 잘 대답하였다. 그리고 세례를 받으면서 선교사와 약속을 한 내용은,
 
1. 배교강요에는 모든 형벌과 죽음도 감수하겠다. 여러 여자를 데리고 사는 것도 않겠다. 2. 고향으로 돌아가면 인간의 공명을 버리고 가족과 함께 시골로 물러가서 영혼구령에만 전력하고자 한다. => 그러나 이 약속은 적극적 선교자의 활동으로 바뀐다.
 
3, 해마다 소식을 전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출발하기 전에 (베드로 사도좌축일 2월 22일?)아버지의 승낙을 얻어 세례를 받았고, 사신들도 그들의 왕에게 ‘서양 사람들을 그 나라에 불러들이기를 제청하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 마태오 릿치가 세례를 준, 이응시 보록의 북경 첫 세례와 같이(서약문을 제단에?)
 
7. 귀국과 연구, 그리고 세례식과 선교.
 
이승훈은 1784년 봄에 귀국하는 즉시 이벽에게 책과 성물을 전달하였고, 이벽은 조용한 곳으로 물러가 6개월 동안 연구(천진암 독서처에서 10년 이상 공부하였고, 승훈 귀국후 4월부터 9월까지)를 계속하게 된다. 그런 다음 선교여행으로 감호를 다녀왔고, 이어서 가을 9월에 수표교의 이벽 성조 자택에서 첫 세례식이 거행되었다. 이승훈이 이벽과 권일신, 정약용, 정약전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승훈이 쓴 1789년 편지에, ‘내가 un Savant성현을 만났사온데, 그분은 어려운 교리까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박해로 내가 형제들 모임을 떠나게 되어, 세례를 베풀도록 지명한 2명 가운데 한 명은 바로 그 성현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일년후인 1785(/6?)년 가을경에 박해로 죽었습니다.’ (김범우를 말하며, 이벽의 순교는 1785. 6. 14. 여름=cf.이벽전)
 
마재에서 기제사후 선상 선교를 먼저 하였는데(선중씨 묘지명),
 
갑진년 4월 15일에 맏형수(+1780)의 기제(忌祭)를 지내고 나서, 우리 형제와 이덕조(李德操)가 한배를 타고 물길을 따라 내려올 적에 배 안에서 덕조에게 천지(天地) 조화(造化)의 시작(始作)과 육신과 영혼의 생사(生死)에 대한 이치를 듣고는 정신이 어리둥절하여 마치 하한(河漢)이 끝이 없는 것 같았다. 서울에 와서 또 덕조를 찾아가 《실의(實義)》와 《칠극(七克)》등 몇 권의 책을 보고는 비로소 마음이 흔연히 서교(西敎)에 쏠렸으나, 이때는 제사지내지 않는다는 말은 없었다. 신해년 겨울부터 나라에서 더욱 서교를 엄금하자, 공은 드디어 서교와 결별하였다. 그러나 맺은 것은 풀기 어려운 것이어서 화(禍)가 닥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으나 피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 골육(骨肉)을 서로 해쳐가면서까지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는 것이 어찌 그 화를 받아들여 천륜(天倫)에 부끄럼없이 하는 것만 하겠는가. 후세에 반드시 공의 마음을 알아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처남 정약용이 듣고 적용한 수원 화성의 방화수류정 서쪽 벽에 새겨 넣은 십자가 86개!)
 
양근 감호 갈산에서 강의와 토론을 하였는데,
 
과거(1784. 9월/cf. 달레상 311=양근 갈산에서 강의!) 이벽(李檗)이 처음으로 서교(西敎)를 선교(宣敎)할 때 따르는 사람이 많아지자, (문효세자(文孝世子 1782.10.- 1786. 6.)를 가르치는 동궁(東宮)의 관원(官員)이 된 권철신의 집이 있는) 양근 감호를 방문하여, “감호(鑑湖)는 사류(士類)가 우러러보는 사람이니, 감호가 교에 들어오면 들어오지 않는 자가 없을 것이다.” 하고, 10여 일을 묵은 뒤에 돌아간 일이 있었는데, 그때 공의 동생 일신(日身)이 열심히 이벽을 따랐다.
 
1784년 9월에 수표교의 이벽 성조의 자택에서, 이승훈은 이벽, 권일신, 정약전, 정약용에게 세례를 주었다.(추국 1801. 2.18.조 + 달레상 307) + 이어서 중인 계급의 최창현, 최인길, 김종교 등 학식과 덕망이 뛰어난 이들을 입교시켰다.(달레상 308).
 
인천에서 권일신이 권철신에게 쓴 편지를 읽고(추안1801 1차 심문중/주재자 흠숭 +삼혼설+4근본원소... 그래서 이몸도 그 책들을 보았습니다.), 권철신도 암브로시오로 세례받았다.(달레상, 311). 1790. 10. 16. 구베아 주교의 편지에는, 천명도 넘는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다.
 
* 이벽과 이가환, 이기양과의 교리 논쟁!
 
이가환: 백서 47-52행/ 이가환이 갑진-을사무렵(겨울/정헌 묘지명)에 이벽에 굴복당하여, 천학초함과 함께 성년광익까지 가져다 거듭 읽고는 믿기로 결심하고, 제자들을 권유하여 교리를 가르치고 아침저녁으로 이벽 등과 비밀리에 왕래하며 열심히 하였다. (1789년에 윤유일이 밀사로 갈 때 은자 500냥(현 5천만원 정도=징의 232)을 봉헌하였고), 1799년에 충청도 보령에서 압수된 신자 연명부에 이가환이 우두머리로 실려있고(벽위편), 부연사가 되어 직접 북경에서 영세하려 하였다. 신유박해를 맞아 권철신과 함께 장폐로 순교하였다.
 
이가환이 회담 날자를 정하여 이벽의 집에 모였다. 호사가들의 한떼가 이 굉장한 토론을 참관하여, 사흘 동안 진행된 끝에 이가환이 패배하여, ‘ 이 도리는 훌륭하고 참되다. 그러나 이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불행을 갖다 줄 것이다.’ 하였다.(달레상 308)
 
그 후 이기양도 토론을 견뎌낼 수 없었다(달레상 310). 이기양이 안순암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안정복도 신자가 되도록 설득하려고 하였다.
 
1. 안순암이 권철신과 이사흥에게 보내는 편지 1784년 (12월?)
 
2. 안순암이 이사흥에게 답하는 편지 을사 1785년 봄, ‘저번에1784년(?) 성오 (권일신)이 힘써 이 학문을 내게 권하였지만, 내가 귓전에 지나가는 바람을 듣듯이 하였네!’
 
8. 을사1785년 박해와 이벽 성조의 순교
 
천진암성지의 기도공동체수표교의 세례 공동체가 되었고, 양반 외에 중인들까지도 모일 수 있도록, 중인 김범우의 집이 있는 명례방의 기도 집회로 진화하였다.
 
‘을사 1785년 (3월)봄에 이승훈은 정약전, 정약용 등과 함께 장례원(=한글본 성교요지 용지) 앞에 있는 중인 깁범우 집에 모여 집회를 가졌다. 이벽이라는 자가 있어, 푸른 두건으로 머리를 덮어 어깨까지 드리우고, 아랫목에 앉아서, 이승훈과 정약전,정약종,정약용 삼형제 및 권일신 부자가 모두 제자라 일컬으며, 책을 옆에 끼고 모시고 앉았는데, 이벽이 설법하고 깨우쳐주는 것이 우리 유가에서 스승과 제자간의 예법보다 더욱 엄격하였다. 날자를 약속하여 모이는데 두어달이 지나니 양반과 중인 가운데 모이는 자가 수십 명이 되었다. 추조의 금리가 -- 드디어 체포하고 예수의 화상과 서적들 및 몇가지 물건을 추조에 바쳤다. 추조의 판서 김화진은 그들이 양반의 자제로서 잘못 들어간 것을 애석하게 여겨서 타일러 보내고 다만 김범우만 가두었다. 권일신은 그의 아들과 이윤하와 이총억 과 정섭 등 다섯 사람을 데리고 바로 추조에 들어가서 성상을 돌려달라고 여러 차례 호소하였다. -- 꾸짖고 달래어 내어보내고, 다만 김범우를 신문하여 정배시켰다.(김시준, 벽위편 95)
 
1785을사박해로, 이벽 성조는 성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와 같이 아사벌에 이은 독살로 순교하였다. 그리고 양반 집안들의 문중박해는 (이승훈, 정약용/권철신은 父亡!) 계속되었다. 이승훈의 1789년 편지에서, ‘박해가 4/5곳에서 일어나 체포되어 감옥에 같혔고, 10명 넘게 피를 흘리며 증거하였다.’고 하였다. 이승훈은 북경 선교사와의 약속대로 1784말에 그라몽신부에게 편지를 썼으나, 전달자가 1785년 4월에 돌아왔으나 이미 박해가 시작되어 그라몽 신부의 답장과 책들을 빼앗겼다.
 
9. 이승훈의 벽이시. 문은 오히려 천학의 깃발을 드는 글이라고 1791.11.13. 거상중의 이기경 상소문에서 밝히고 있다. ‘그러자, 이승훈의 아비 이동욱과 정약전의 아비 정재원은 비로소 그의 아들이 사학을 배우는 것을 알고, 크게 놀라 죄를 다스리고, 친지들의 집을 두루 다니며 스스로 뉘우치고 깨달았음을 말하게 하고, 또 이승훈으로 하여금 사학을 배척하는 글을 짓게 하여 스스로 변명하게 하였다’.(벽위편). 아버지의 焚書에 대한 벽이시와 (天彛地紀限西東 暮壑虹橋唵靄中 一炷心香書共火 遙瞻潮廟祭文公 = 이는 지금 보아도 배교시가 아니다.) 벽이문을 두고, 이기경은 1791.11.13.거상중의 이기경 상소문에서, 불교와 같다는 것을 배척하는 것뿐으로, 오히려 천주교의 깃발을 드는 것이라고 했다. 僞天主云云者 只斥其非天學 --爲眞天學立幟而不見其闢之也. (이기경 벽위편, p.146; 김시준역 벽위편, 156 ; 주재용, 가톨릭사의 옹위, p. 59, 100).
 
이에 대하여 백서 45행에서는, 아버지의 엄한 반대와 악우들의 비방에도 끝까지 참고 성교를 봉행(隨後厥궐父嚴禁 惡友亂謗 承薰猶忍耐奉敎) 하였다고 전한다. 그후 오히려 1786년에 권일신이 조동섬과 함께 8일동안 용문산사에서 피정한 후에, 모방성직제도를 세워 열심히 기도하며 전교하는데 함께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24세로 1780년에 진사에 급제한 이후 泮會에 자주 출입(물이 3면을 반달 모양으로 싼 동소문 부근)하였는데, 1787 정미 반회사건이 있을 때(옹위 55, 77; 벽위편 103), 漢枌楡社(한고조의 고향 느릅나무 신 = 地神에 제사)에 대한 시를 거부하고 있다.(벽위편 155).
 
이승훈의 양심이 표현되는 1789년 편지에서도, 자신의 배교에 대한 언급이 없다. 모방성직제도의 죄만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오히려, 윤유일이 권일신과 이승훈의 1789년 편지를 가지고 북경에 갔을 때, 왕명을 받은 관리였던 오 요한은 북경에서 직접 세례를 받았고, 선교사를 초빙하여, -선교사의 미사도구 등의 물품을 왕의 짐짝 속에 들여왔다. (구베아 주교의 편지; 정조실록 1790.3.3.에서 의주 부윤 이이상이 정사 이성원에게 보내는 왕의 (특별문서)諭書를 어천 찰방 조형수가 책문에까지 급히 달려가서 전달하려는 것을 막았다고 보고한다. 유서의 의미는 왕의 짐짝 속에 있는 물건을 책문에서부터 검사하지 않고 통과시키라는 특별 유서였을 것이다.결국에는 발각되지 않고 전해졌으므로 죄를 묻지 않은 것으로 하였다.) 또한 1890년(6월) 이승훈의 답장에서, 집안이 아직도 박해의 손아귀에 있어 자유롭지 못한 상태로 노력하는 것은 저의 의무이나, --현 상황에서 신자들을 돌보기는 불가능하니 이 의무에서 면제를 요청하고 있다.’ (1790년 년중 7주일에 씀= 6월 초!)
 
이승훈은 천주교를 배척하지 않았고,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이기경이 이르기를, 承薰-- 晝夜誦經 --累十卷冊子裏以錦袱 納之櫃中-- 早夜誦早晩課經 / 승훈이 주야 송경하고, 더욱이 수십 권 책자를 비단보에 싸서 궤 속에 넣어두고, 주야로 [조만과경]을 외우더라.’(주재용, 옹위 p. 100 ; 이기경, 벽위편, 1978 한국교회사 영인본, p. 91.). 뿐만 아니라 바로 몇 달 후인 임자1792년 봄에 빚어진 [평택안핵사]는,
 
평택 안핵사에 김희채(그는 이승훈의 6촌 재종 매부)가 임명되었는데, 정조는 평택 안핵사에 김희채를 임명하여(벽위편 188 + 순조실록) 얼버무렸고, 결국 나중에는(일성록 1793. 12. 27일/ 박향영(朴向榮)을 자여 찰방으로,) 이승훈(李承薰)을 양구 현감(楊口縣監)으로 삼았다.
 
이에 대하여 순조 1년 신유(1801,가경 6) 12월24일에 대사간 유한녕(兪漢寧)이 상소하여 논하기를, “채제공(蔡濟恭)은 지난 을묘1795년에 포장(捕將)을 은밀히 사주해서 세 흉도(凶徒)를 하룻밤 사이에 때려죽이고, 오직 여러 역적이 성명(姓名)을 노출시킬까 두려워했고, 주문모(周文謨)가 나오자 숨은 곳을 가리어 감추었으니,--- 김희채(金熙采)는 이동욱(李東郁1738-1794)의 종서(從婿)로서, 자신이 안핵사(按覈使)가 되어 오로지 이승훈(李承薰)을 엄폐하였고, 성묘(聖廟)에 절하지 않은 일은 온 세상에서 분개하고 한탄한 지 오래 되었습니다.” 또한 정조 임금에게 보고하는 선상에 있던 사람도 이동욱의 (4촌)종형 이동현 승지였다.
 
이에 대하여 백서에서는, ‘이승훈은 1790년 가을에 평택현감으로, 1791년에 체포되어 배교하고 성교를 비방하는 글을 여러 번 썼으나, 그것은 모두 자기 본심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을묘1795년에 신부가 이 나라에 온다는 말을 듣고, 회개하고 성사의 은혜를 받기 위한 준비를 하였으나, 얼마 안되어 박해가 일어나(1795 예산 유배) 다시 움츠렸습니다. ---겉으로는 세속을 따랐으나, 항상 다시 떨치고 일어날 생각을 -- 선사인지 더 두고 조사해 봐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백서45-46행)
 
사학징의 에서는, 유관검 신문기록에서, ‘대저 주문모를 영입하려던 계책은 이가환, 홍낙민, 이승훈, 지황 등이 주장한 바에서 나왔습니다. 만약 신부가 아니라면 7성사를 거행할 수가 없고, --큰 배가 오는 것은 아득히 먼일 -- 중원에서 한 신부를 모셔오는 방편만한 일이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사학징의 92).
 
이렇게 1795을묘년 실포사건 직후, 이가환을 충주목사로, 정약용을 금정찰방으로, 이승훈을 예산으로 유배시켰고, 이때에 이승훈이 유혹문을 지었다고 하나 이는 1785, 1791, 1795, 1801년 진술에서도 똑같이 나오는 내용이다. (cf. 원재연 p. 64; 옹위 p. 80). 이런 글을 이기경은 1791.11.13. 상소문에서, 은근히 자기 변호를 하는 말이라고 지적하였다. 이를 두고 조광은 4대 교리중 주재자 천주만 남기고, 삼위일체와 상선벌악 등을 부정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원재연 64). 그러나 당시 반대파들의 공통된 견해는 [벽이문,시]는 결코 배교의 뜻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데 이견이 일치하였다.(옹위 82)
 
이와같은 상황은 정약용도 1797년에 단오일배 이형유천진암 이후, 동부승지 사직소를 제출하였으나, 그 다음날 정조 왕의 질문에 검열 오태증이 이르기를 ‘ 정약용이 아직도 그 사학을 버리지 않았나이다하니, 임금이 대소하며 가로되; 네 말이 과연 옳도다.’ 하였다.
헌신적인 주문모 신부님의 활동과 신자들의 적극적인 전교 활동 덕분에, 얼마 지나지 않아 신자 수는 1천여 명에서 무려 1만여 명으로 늘어났다.
 
10. 1801년 신유박해
 
천주교 탄압에 그나마 온건적이었던 정조 임금이 49세로 급작스레 세상을 떠났다.(정약용은 고금도 장씨에 대한 기사에서, 시의에 의한 독살을 언급한다.) 이때가 1800년 6월 28일이다. 정조에 이어 왕위에 오른 조선 왕조 23대 순조 임금은 11살의 어린 나이로, 정조 임금의 계모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임금이 나이가 어려 나라를 다스릴 수 없을 때 궁중의 제일 웃어른이 대신 정치를 하는 것)을 하였고, 정순왕후는 정조 임금의 장례가 끝나자, 바로 박해의 칼을 빼들었다.
 
*신유박해의 현장 기록을 보면, 이승훈은 55도의 곤장을 맞아, 정신이 혼미하므로(복자 신태보의 경우 야소도 모른다고 대답한 것을 후회), 고문에 의한 자백은 증거 능력이 없는 것이며, 제정신으로 증언한 것이 아니어서 현대에도 재판에 채택되지 않고 있다.
마지막 결안이 결정적인 죄목 문서로서, 박해자들이 신앙에 대한 증오로 순교(죽음) 이르는 형벌을 가하였으면, 순교자가 되는 것이다.
 
=이기경, 벽위편 2, 신유박해 p. 247 -
 
1월 9일 / 부신계 - 이가환, 이승훈, 정약용을 잡아들이라고 함 = 不動終不悛改承薰
 
2월 10일/ 대왕대비 殿傳曰 推鞫 - 죄인 이가환, 이승훈, 약용 原情(사정을 하소연!)
 
2월 11일/ 국청죄인 이가환 형문 13도, 이승훈 30도, 정약용 30도, 최창현 30도, 권철신 5도, 최필공 원정.(심문 첫날부터 우선 곤장을 치며 시작하고 있다.)
 
2월 13일/ 三司合啓 -정약종 윤패상지죄 + 원정후 형문 13도, 임대인 조동섬 홍낙민 원정.
 
2월 14일 / 이승훈과 최창현 面質. 김백순 원정// 신봉조 상소 p.263 -‘신이 추국하는 자리에 참석하여 친히 눈으로 보니, 승훈등 3인은 똑같이 완악한 패기가 서려있고, 魔祟마수로써 이용하기를 상습으로 삼고, 刑具차꼬보기를 초개같이 하고 형륙에 나아가기를 낙지에 나감같이 하고-- 죽자하고 실토치 않으니 如草芥就刑戮如樂地 -- 抵死而不吐!’. 이는 1795년에 윤유일 등이 緘口無一言 한 것과 같다.
 
-- 15일 / 승훈 갱추후 10도, 김백순 24도, 이가환 홍교만 정약전 오석충 홍獻榮 원정.
 
p.270 16일 / 李學逵 원정, 이가환 이승훈 정약용 更招, 김백순 4도, 홍교만 20도.
 
p.272 17일 / 정약종 16도, 이존창 原情.
 
p. 275 / 16일에 지사 권엄 등 연명 上疏.
 
p.283 17일/ 이가환 갱초 12도, 이존창 30도, 최창현 6도, 오석충 30도.
 
p.285 18일 / 이가환 30도, 오석충 20도, 이승훈 15도, 권철신 갱초.
 
p.285 19일 / 권철신 30도, 오석충 30도 후 이가환과 면질.
 
p.289 20일 / 조동섬 임대인 홍교만 정약전 홍낙민 갱초, 오석충 2도, 김백순 이기양 原情.
 
--- 21일 / 권철신 이존창 이기양 최창현 更招. / 이익운 上疏
추국일기 22일/ 권철신 물고 -장폐 // 25일 기시(묘지명, 정헌은 24일)-cf. 박광용 p.149.
 
p. 308 26일/ 이기양 更招.
 
--- 27일 / 이가환 遲晩후 物故, 권철신 物故. 최필공 부대시참 西小門外.
 
이승훈 정약종 최창현 홍교만 結案正法. / 이존창은 공주목에 압송 정법.
 
조동섬 30도, 홍낙민 30도 결안정법, 김백순 30도, 이기양 오석충 갱초.
 
p. 310. 26일 죄인 창현 --지만/ 죄인 승훈 운운--矣身親受領洗 --부동유일 --결연약종 --外稱革面 內實蠱고心妖黨醜類 --矣身爲敎主爲代父 -遲晩.
 
판결안이 확실한 순교의 증거이다.
 
판결안; 이 몸은(矣身) 직접 영세를 받았고, 만리 밖에서 책을 구입해다가 모든 친척들에게 전파하여 서울과 시골의 멀고 가까운 데에까지 미치게 했으며, 이것도 오히려 부족해서 서양사람과 왕래하며, 다른 무리들을 얽어 뭉쳤고, 흉악하고 비밀한 계책은 윤유일과 같이 하였으며, 음험하게 속이는 자취는 정약종과 연결하였습니다. (나는 겉으로는 유교로 회개하는 척했으나, 그 속 마음은 실로 고혹적인 천주교를 품은자로서) 요망하고 추한 무리들은 나를 보고 교주라고도 하고 대부라고도 하였는데, 요서와 요언은 모두 무리를 침혹하는 도구로 사용하였습니다. 자백을 받고 참에 처하였다. (옹위, 76. ; 김시준, 266,410.)
 
11. 순교시와 4대를 잇는 순교 집안
 
순교시: 月落在天 水上池盡
 
기해 박해 때에 그 아들 기원(이신규)이 붙잡혔다가 죽기를 면하고 병진1856년에 무사로 징을 쳐서 석방을 입었고, 음참봉을 하였다가 무진1868년에 또 붙잡혀 참형을 당하였다.(그의 조카 이재의도 또한 붙들려 참형되었다.)
 
이승훈 베드로 성현의 신앙은 후손들에게 그대로 이어졌다. 셋째 아들 신규와 맏손자 재의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증손 연구, 균구는 1871년에 각각 순교했지요. 이승훈 성현의 아들과 손자와 증손자들 4대로 이어진 순교는, 우리 모두에게 이승훈 베드로 성현이 말로 다하지 못한, 많은 진실을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고종 5년 무진(1868, 동치7) 윤4월 2일(기유)에,
 
영풍군(寧豐君) 최우형(崔遇亨)이 상소하였는데, 서학을 궁구하여 우리나라 화근의 선두가 된 자가 바로 이승훈(李承薰)입니다. 저 승훈은 그의 아비 동욱(東郁)을 따라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적에 몰래 사교(邪敎)의 책을 사와 그와 친한 이들에게 전파하여 스스로 교주가 되어 점점 물들게 하였고 더욱 퍼지게 하였습니다.
 
또한 그 아들 신규(身逵)는 그 가르침을 물려받아 추악한 무리들의 종주가 되어 처의 상을 당하자 그 아들에게 미친 병이 있다 하여 상복을 입히지 않고 3년상을 마치게 하였으니, 바로 이 한 가지 일은 이미 그의 단안(斷案)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조카(=이재의)가 또한 흉범의 공초에 나오니, 한 집안이 곧 사악한 무리의 소굴로 되어버린 것입니다.
권복 형제는 바로 신유년 장형(杖刑)으로 죽은 죄인 철신(哲身)의 손자입니다. 끝.

입력 : 2015.08.28 오후 9:2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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