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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천주교회 창립사

Church history in Korea

다산 정약용(사도 요한) 선생에 대한 평화방송 인터뷰 내용

글 :  김학렬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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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약용을 포함한 한국천주교회의 창립선조들은 새 하늘과 새 땅을(묵시록21,1) 꿈꾸며 민족의 행복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우리 후손들이 정의와 평화, 사랑이 넘치는 하느님나라의 행복을 누리기를 간절히 소망하였습니다. 사도요한(약망) 정약용 승지는 500여권이 넘는 저술 가운데, 특히 12서로 국가개혁을 모색하며, 한국 근대화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목민심서는 행정가들이 읽고 그 정신으로 백성을 사랑하기를 바랐습니다. 흠흠신서는 법관들이 읽고 참고해야 할 것이고, 경세유표는 입법자들이 참고로 삼아야 할 제도개혁서라 할 수 있습니다. 2012년에 정약용 탄생 250주년을 맞아 평화방송과 인터뷰한 내용을 여기에 다시 올려봅니다.
 2012128() 용인대리구장 김학렬 사도요한 신부 인터뷰 내용.
방송일시 : 20120128일 토요일 0730.
섭외 및 질문지 작성 : 평화방송 보도국 서종빈 취재1부장(정치부장)
[앵커] 올해는 조선의 실학자로 위대한 사상가였던 다산 정약용 선생의 탄생 250주년입니다. 글로벌 경제위기와 사회갈등과 혼란의 시대여서 그런지 실사구시 사상으로 조선시대 변혁을 꿈꿨던 다산 정약용의 사상이 연초부터 집중 재조명되고 있는데요. 오늘 [문화 라운지]시간에는 천주교 신자로서 다산의 생애를 짚어보고, 천주교 박해 시대 다산은 왜 천주교 가치관으로 새로운 변화를 모색했는지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 교회내 다산 연구가인 수원교구 용인대리구장이신 김학렬 신부님 전화 연결합니다. 신부님 안녕하십니까?
 +R. 네 안녕하십니까.

1. 올해 다산의 삶과 사상이 다방면에서 재해석되고 있는데요. 천주교에서도 많은 연구가 이뤄진 걸로 알고 있습니다. 우선, 다산의 사상이 탄생 250주년을 맞아 재조명되는 이유는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R. 요한(약망(若望)) 정약용 승지는, 임금으로 모시던 정조대왕과 함께 조선 문예부흥기의 분수령을 맞아, 정치 사회 경제 문학 과학 종교 등 전 분야에 걸쳐, 중국의 마태오 릿치 신부님을 비롯한 선교사들이 쓴 책을 읽고 눈이 열림으로써, 실사구시의 개혁과 변화를 통해 조국의 근대화를 염원하며, 그 기틀을 마련한 분이 바로 문도공 요한사도 정약용 승지입니다. 200 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나라는 정치 사회적 혼란을 겪고 있어, 현실에 대한 바른 판단과 과감한 개혁이 더욱 필요하기에, 다산의 정신이 지금도 요구된다고 봅니다. 수차례 진사시에 낙방하던 1782년에, 나의 하소연이란 <술지>시에서 정약용은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 우리나라 사람들 애닯다 마다/ 주머니 속에 처한듯 궁벽하거니,
- 삼면으로 바다가 에워쌌는데 / 북방에는 산맥이 누르고 있어,
- 사지 삭신 언제나 펴지 못하니/ 욕망 염원 그 어찌 채울 수 있나,
- (마태오 릿치 같은) 성현은 만 리 밖에 멀리 있거니/ 뉘 능히 이 어둠을 밝혀 주려나!
하며 읊고 있습니다.

2. 다산 정약용 선생은 천주교 박해 초기시대 요한이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한 천주교 신자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요. 어떤 계기에서 천주교 신자가 됐는지요?
+R. 한국 천주교의 창립 주역은 바로 이벽 세례자 요한 성조입니다. 그런데 이벽 성조의 누님이요, 또한 16세에 과거에 급제한 황사영의 부인 정명련 마리아의 어머니 되시는 분이, 바로 정약용의 큰 형수님입니다. 따라서 이벽 성조는 정약용 보다 8살 위의 사돈 형이 됩니다. 1885년에 발행된 페낭 신학교의 역사교과서 등에 의하면, 이벽 성조가 집안의 선대 할아버지들이 중국에 다녀오면서 가져온(소현세자를 모시고 귀국한 이경상), 천주교 서적들과 천학초함 등을 읽으며, 15년 동안 공부하던 절이 천진암입니다. 다산은 어려서부터 평생동안 수시로 이곳 천진암을 찾아와 머물며 이벽 형에게 배웁니다. - 석경세여선/ 바위사이로 난 오솔길은, 석아동시유/ 내가 어릴 적에 뛰어 놀던 곳인데 - 따라서 다산은 이벽 성조의 천진암/천학당에서 서양의 과학과 신앙을 일찍이 배웠었는데, 자형인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온 후, 서울로 입경한 이벽성조의 집 수표교 모임에서 세례를 받았고, 형 약전(바오로)과 함께 요한사도(약망)라는 세례명을 받았습니다.(니벽전 + 추안 참조. *이벽성조 순교 후, 모방성직제도를 실시할 때(1786)는 함께 신부로서 활동하였다.)
 
3. 다산 정약용의 천주교 신자 논란이 그동안 끊임없이 제기돼 왔습니다. 어떤 이유에서 그런 문제들이 제기됐었나요?
+R. 역사자료의 수집과 분석 연구에서는, 자료의 신빙성이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됩니다. 역사학의 원칙에 의하면, 시간과 공간적으로 가까운 자료가 더 사실에 가깝다고 판단되고, 회고록 같은 다산 자신의 주장보다는 그 반대자들의 주장이 더 진실에 가깝다고 봅니다.
정약용의 천주교에 관한 기록은 대부분 자기 방어적인 회고록으로서, 박해의 빌미가 되는 신앙내용에 대하여는 감추기에 급급하므로, 박해자들의 주장과 상소 내용이 오히려 더 진실에 가까운 것입니다. 예를 들면 벽위편 기록에, 다산이 1797년에 동부승지 사직소를 제출하고 나자, 그 다음 날에 동료 승지들 가운데 하나는, “ 이 사람이 아직도 사학/천주학을 버리지 않았나이다하였고, 정조왕도 웃으면서 네 말이 과연 옳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강진 귀양이 풀려 마재로 돌아온지 10년 후에도, 윤극배라는 사람은 1828 년에 상소를 올려, 귀양지에서나 마재에서나 사람들을 모아 천주교를 가르치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다산은 시종일관 천주교 신자였지만, 조상제사문제에 관하여서는, 릿치 신부가 중국문화를 수용한 보유론에 따라 제사를 끝까지 견지한, 소위 보유론 신자였습니다.

4. 일부에서는 다산 정약용 선생의 병자성사를 부정하고 있는데요. 병자성사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됐다고 하던데요? 어떤 내용인가요?
+R. 다블뤼 주교는 사목자로서, 요한 정약용이 선종한지 10여년 만에 김대건 신부님과 함께 입국하였는데, 20 여 년간 역사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한 결과, 다산의 참회생활과 교회활동, 종부성사와 아들 정학연의 세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cf.달레중, 186). 그런데 이 기록을 두고, 어떤 연구자(김상홍)는 부족한 천주교 지식을 가지고 자신의 잣대로, 다산의 신앙을 판단하여 <外儒內儒>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자기 본당 신자들 마음속의 신앙을 판단하는데 있어, 주교님이나 본당신부님 보다 더 확실히 아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다산의 종부성사에 대한 그 연구자의 반박 글을 보면, 종부성사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죽어가는 사람의 최후를 지켜보아야만 하는 성사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또한 날자 계산의 잘못으로 유방제 신부님은 이미 추방되어, 다산의 종부성사 현장에 있을 수 없었다고 오해하고 있지만, 사실 유신부님의 출국일은 3명의 신학생들과 함께 마카오로 떠나는 1836123일 이후였습니다. 이 날짜는 정약용이 1636222일에 운명하고 난 후이므로, 유 신부님의 병자성사 집전이 충분히 가능했던 사실을 곡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5. 신부님의 말씀을 들어보니까요. 문득 바오로 성인의 회심이 떠오르는데요. 다산 정약용 선생도 그런 의미로 받아들여도 될까요?
+R. 바오로 사도가 편협한 민족주의적 유다이즘으로부터 보편 세계를 향하여 선교의 일꾼이 되는 체험이, 바로 다마스커스 길의 회심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후 이방인의 사도가 되어, 하느님의 발자취를 인간 이성으로 체득한 그리스(헬라) 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발전시킵니다. 문화적 수용이요 적응주의였습니다. 이와 똑같이, 중국에 선교사로 와서 옛 유교의 상제/하느님 신앙을 받아들이면서, 문화적으로 적응한 사람이 바로 마태오 릿치 신부였습니다. 전자기기의 ADAPTER 처럼, 이태리 말로 ADATTAMENTO 로서, 동양의 문화를 수용하고 적응한 것을, 우리말로는 보유론이라고 합니다. 리치 신부는 선진 유학에서 일컫던 상제를 천주, 상주란 이름으로 (하느님) 불렀고, 조상제사와 공자배례(()()()()) 등도 동양의 고유한 문화로서 다 수용하였던 것입니다.
이러던 것이 동양에 관하여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고, 서양 우월적인 시각에서 동양 풍속을 반대하여 문제를 일으킨 것이 후발자들이 야기한 동양의 제례 논쟁이었고, 그 결과로 조상제사를 미신이라고 금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천주교회의 창립선조들이 천주신앙을 받아들일 당시에는, 릿치 신부의 보유론에 따라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던 조상제사가, 천주교를 신앙하고 난 후 10여년 후에 이런 문제가 불거지니까, 다산과 같은 선각자들은 즉시 이를 알아들었습니다. - 이는 본질적인 교리가 아니라, 언젠가는 다시 바뀔 수 있는 규정에 불과하다고 말입니다. - 과연 그의 예견대로 제사문제가 결국엔 풀리지 않았습니까! - 그래서 그는 끝까지 자녀들에게 조상제사를 강조하였습니다. 다산 요한은 보유론 신자였습니다.(cf. 中庸講義補 / 中庸自箴).
 
6. 다산 정약용의 가계는 한국천주교회사 뿐만 아니라 세계 가톨릭 역사 안에서도 보기 드문 천주교 집안이다이런 평가가 있던데요. 다산 가문과 천주교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 겁니까?
+R. 한국천주교의 시작은 이벽 성조의 집안과 정약용, 이승훈 집안이 결혼으로 맺어짐으로써, 모두 천주교 집안이 되면서 이루어졌습니다. 이들 중 조선천주교 창립의 주역들인 이벽과 이승훈, 정약전과 정약용 등은, 앞서 말한 보유론 신자들로서 문중에서부터 박해를 받았습니다. 한편 조금 늦게 신앙에 합류한 정약종과 조카사위인 황사영 등은, 조상제사문제에 있어서도 교회의 지시에 그대로 순종함으로써, 제사를 폐지한 무군무부의 패륜적인 사학집단으로 매도되어 순교에 이르게 됩니다.
 
7. 다산 정약용과 한국 천주교 발상지인 천진암성지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곳인데요? 한국교회사에서 천진암강학이 갖는 의미는 어떤 것인지요?
+R. 작년에 제가 <한국 천주교회의 뿌리> 라는 제목으로 논문을 냈습니다. / 그동안 <강학우천진암 주어사설중 이벽야지 장촉담경> 이란 다산의 묘지명 글을 놓고, 학계에서는 여러 가지 해석과 주장이 있었습니다. 첫째, 한국 천주교회 창립이 천진암강학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입니다. 둘째로는 천주교적인 강학이지만 주어사강학이라는 교회 내 일부 학자들의 주장입니다. 셋째로는 어느 강학이든 천주교와 관계가 없는, 유교적인 강학이라는 일반 사학계의 주장입니다. 이 세 가지 학설 중에 첫째 주장인 천진암강학을 여러 가지로 연구검토하여 결론을 내린 것이 저의 논문입니다.
 
8. 모진 고문과 유배에도 오롯이 신앙을 지킨 다산 정약용의 믿음이 오늘날 우리 신자들에게 주는 가르침은 무엇이라고 보시는지요?
+R. 지금 서울 동호대교를 건너, 옥수동 산자락에는 조선시대의 국립연구소에 해당하는 독서당/동호당 터가 있습니다. 다산은 천진암에서 이벽 성조가 15년 동안 천학을 공부하던 장소를 독서처라고 명명하고 있습니다. 다산은 강진에서의 귀양살이 18년을, 우리 민족에게 비젼을 제시할 수 있는 독서당의 기회로 삼았고, 그리하여 500여권 이상의 저술을 할 수 있었습니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그의 집이 물에 잠기지 않았더라면, 더 많은 자료들이 전하여 졌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만, 고난과 시련의 시기가 영원의 시각에서 보면, 오히려 큰 은총의 시기라는 것을 다산의 생애를 통해서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9. 다산 정약용 선생과 가문의 천주교 신앙의 유산들은 많이 보존돼 있나요?
+R. 다산 자신과 가문의 몰락을 피하기 위하여 숨겨놓아야만 했던, 신앙고백의 표현들이 도처에 숨어 있습니다. 후학들이 수수께끼를 풀듯, 보물찾기를 하듯이 밝혀내야 하는 것들입니다. 수원 화성의 방화수류정 서쪽 벽에 새겨진 86개의 십자가 문양이 그러하고요, 강진 귀양지를 찾아 가서 다산에게서 공부하였다는, 이승훈의 아들 이택규와 윤지충의 양자인 윤종영(한국교회사 연구소 참조= 평화방송 2001. 12. 18 뉴스), 그리고 십자가 문양이 새겨진 인장들이 있습니다. 다산이 남긴 천진소요집의 싯귀 등, 글 속에 숨겨진 내용들도 자세하게 밝혀내야 할 것입니다. 다산이 지은 의학관계 저술로서, 마과회통의 부록으로 실린 신증종두기법상실도, 다산이 북경을 왕래하던 조카 정하상이나 신자들과 꾸준히 신앙 안에서 만나, 도움을 주고받았다는 증거가 되고 있습니다.
 
10. 다산과 천주교 신앙에 대해 올해 특별히 계획하고 계신 일들은 있으신가요?
+R. 천진암성지를 중심으로 다산의 시비 건립계획이 있고, 탄생일이 1762616일이지만, 이벽 성조를 비롯하여 천주교 창립자들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요일과 양력을 사용하므로, 승지 요한 정약용의 탄생일을 양력으로 바꾸어 85일에 기념하고 있습니다.
 
11. , 지금까지 올해 탄생 250주년을 맞아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다산 정약용의 천주교 신앙에 대해 말씀 나눠봤습니다. 도움 말씀에 수원교구 용인대리구장 김학렬 신부님이였습니다. 말씀 고맙습니다. <>.
 
입력 : 2016.12.20 오후 10:5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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