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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母 마리아의 反共主義 敎訓

Holy Mary of Anti-communism

최보식 기자의 李熺性(이희성) 전 계엄사령관 인터뷰: "全斗煥은 12·12와 상관있고, 5·18과는 無關" !

글 : Msgr. By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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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urch History, No. 411, 최보식 기자의, 李熺性(이희성) 전 계엄사령관 인터뷰 - "全斗煥은 12·12와 상관있고, 5·18과는 無關", 2016-05-17, 조회 1759
<2016-05-17 오전 9:56. 조갑제닷컴에서 퍼온 글>

최보식 기자의, 李熺性(이희성) 전 계엄사령관 인터뷰-"全斗煥은 12·12와 상관있고, 5·18과는 無關"-

 <1980년 이른 봄,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임시총회에서는,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추기경 보좌주교였던, 경갑룡 주교를, [한국천주교회 200주년기념준비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임하였고, 경갑룡 주교는 ,수원교구 신장본당 주임으로 한국천주교 발상지 천진암 성지 개척을 시작하여 동분서주하며 집중하고 있던 변기영 신부를 위원회 사무국장으로 추천하여, 소속 교구장 김남수 주교의 동의를 받아, 그 해 5월 16일에, 자필 서한으로, 사무국장으로 임명하였다(천진암 자료집 머릿말 참조).당시 정국은 광주를 비롯한 호남지역에서, 이른 바, 당시 보도의 표현으로, [광주 사태]가 일어나던 때였다. 
그래서 마치 요동치는 파도에 흔들리는 배 위에서 한국교회 생일잔치상을 차리라는 주교회의 결의를 따라 5개년계획을 입안하고 구체화시켜, 승인을 받아 집행하던 실무자로서,아직도 의문점과 논란이 있는, 당시 우리나라와 겨레가 겪었던, 이른 바, [5.18.광주 사태]에 관한 최고 책임자였던, 당시 전국 계엄 사령관 이희성 장군과 최근 최보식 조선일보 원로 대기자의 인터뷰 내용은 오늘의 한국교회 현 구성원들과 후학들도 알아야 할 일이기에,참고하도록 여기에 옮기기로 하였다.-Msgr.Byon > 

 

 

2023년 11월 23일, 全斗煥 前 大統領 逝去 2주년을 맞으며!

2021년 11월 21일 全斗煥 前 大統領 逝去 소식에,

 

全斗煥 前 大統領 逝去 소식을 듣고, 당일 오전 즉시, 卞基榮 몬시뇰은 곡수리 공소 소성당에서, 11월 위령성월 평일 미사에 나온 직원들과 수녀님들 몇분과 함께,향년 90세 천수를 누리시고 먼저 저 세상으로 가시는 全斗煥 前 大統領을 추모하면서, 慰靈月 맞아,앞서간 모든 이들과,특별히 고인의 영혼을 위하여 기도하며, 위령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2021년 11월 23일 오전 9시>


필자가 [한국 천주교회 주교회의]에서 한국천주교회200주년주교특별위원회 사무국장 겸 한국순교복자103위시성추진부장을 겸하고 있을 때,선 후배 동료 사제들 중에 군종사목 근무 중인 신부들과 여러 신자 장교들로부터,"전두환 장군은 정부 요직에서 일하면서도, 종종 흔히 있을 수 있는 일부 대기업가들로부터,돈을 받는다든가 돈을 모으지 않는, 또 여성 문제의 잡음이 전혀 없는,아주 깨끗하고 매사에 아주 엄정하고 명확한 장군"이라는 소리가 종종 들렸었다.국군보안사령관이나 대통령 시해사건에 합동수사본부장으로는 가장 적임자로 보였고, 그는 천주교 신도가 아니고, 불교에 가까운 무관으로 보였는데도, 천주교 성직자들을 존경하였으며,천주교회 일에 매우 협조적이었다는 평판이 있었다. 

 

이제 全斗煥 前 大統領 逝去를 맞이하여 그 분의 功過와 偉業 되새기며,曲水里 公所 小聖堂에서 慰靈祭를 봉헌하고서, 一筆 奉呈을,,,!<2021년 11월 23일 오전 10시 卞基榮 몬시뇰>

 

心慮淸明, 光風霽天,<심려청명 광풍제천>

平生爲民, 死生報國,<평생위민 사생보국>

泰山虎嘯, 猶然苦海,<태산호소 유연고해>

早舟一孤, 萬古聖君,<조주일고 만고성군>

正義勇將, 眞實無言,<정의용장 진실무언>

乘秋忽飛, 乾坤双涕,<승추홀비 건곤쌍체>


그대는 마음과 생각이 바르고,맑고, 굳세고, 밝아서,

빛과 바람처럼 어둡던 하늘도 개이게 하였으며,

한 평생 백성들 위한 일만 하느라고, 죽고 사는 모든것 하늘에 맡기고,

나라에만 바칠 따름이었지!태산도 요동치던 호소(虎嘯)소리는,

그제나 이제나 괴로운 이 천지간에 외로움만이 늘 벗이었고,

노젖는 고닲음 달래는 새벽 바다 위의 한 척의 조각 배처럼,

만고에 길이 빛날 성군들의 발자국 밟고 가고자,

옳고 바른 용장 앞에 진실은 무언으로 천지도 진동하니,

늦가을 짧은 해 뒤로 하고,문득 훌쩍 날아가시매,

하늘과 땅도 한쌍이 되어 애닲은 눈물 흘린다오 !

 

 卞基榮 몬시뇰


*註: 虎嘯 (호소):

큰 산의 호랑이가 산 능선에서 낮잠을 푸욱 한숨 자고 나서, 출출하고 시장하여 먹이를 잡으러 나가기 전에, 낮잠 자던 펀펀한 바위에 일어나 몸을 풀 겸 기지개를 켜면서,두 앞 발로만 딛고 앉아서,꼬리를똬리처럼 뚜르르 말았다가 갑자기 풀고 펴면서,꼬리로 바위 바닥을 때리며, 마치 올벼 익어가는 논에 참새 떼 쫓듯,태기를 치면, 온 산골짜기가 울리는 소리를 '호소(虎嘯), 즉, 호랑이 꼬리의 휘파람 소리'라고 하는데, 唐詩나 聯珠詩에서는 종종 명인 명사들의 출세(出世)하는 계기를 뜻한다. 그 한 예를 들면, 장자방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도 박랑사에서 진시황을 습격한 후부터였으니,당시 백성들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소문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도대체 장자방이라는 사람이 누구길래, 글쎄, 호위무사 대군을 몰고 가는 진시황을 쳤다네 그려 !"


예컨데,


方未虎嘯(자방미호소)할제,

破産不爲家(파산불위가)라,

滄海得壯士(창해득장사)하여,

槌秦泊浪沙(퇴진박랑사)하더라.


번역문:


子方이 아직 이름이 알려져 출세하기 전에,

가산을 팔아서 집안 일에는 전혀 쓰지 않고,

滄海지역의 壯士들을 매입하여 泊浪沙에서 대기시켰다가,

지나가는 진시황을 습격하였으나 성공하진 못하였다"는

이야기에서 나온 글이다."


2021년 11월 23일 오전 10시, 龍門山, 牛頭山 자락, 曲水里 公所 小聖堂에서慰靈祭 올리고나서, 卞基榮몬시뇰-作 兼 譯述.


No. 192 全斗煥 前 大統領 逝去 소식에,卞基榮 몬시뇰, 당일 오전 즉시, 직원들과 몇몇 수녀님들과 함께, 곡수리 공소 소성당에서 위령미사 봉헌 ! Msgr. Byon 2021-11-25 방문자 수 973 명

 

 故 全斗煥 前 大統領 在任 中 歷史的 業績, 善業, 功績 小考   

 

1. 위대한 국가원수 故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신속 철저 수사, 범인 체포 구속 재판, 처형.

2. 國家危機 管理, 國憲 遵守, 國權 守護, 정권과 사회 질서 확립,야간통행 금지법 최초 해제.

3. 全 휴전선과 동.서.남 3面 全 해안선 철책담장 완공 (당시 700억(?) 예산 투입). 반공 保 최 于先.

4. 당시 50 억불내외 국가 악성 외채 완전 상환 후, 최초로 外債 全無한 國家 政權 확립.

5. 大邱-光州, 嶺南과 湖南 고속도로 완공, 반도체 산업 경제발전 장기 기획 착수. 최초 무역 흑자국 달성.

6. 한국천주교회 103위 殉敎福者 서울 諡聖式에 교황 요한바오로 2세 訪韓 공식초청 執典 거국적 후원.

7. 서울 올림픽 유치, 준비에 만전, 체육경기 세계 3위 성적, 경기운영 세계 올림픽 사상 최초 흑자 거행.

8. 대통령 단임제 창안 발의 국민투표로 최초 확정 실시, 야당 지도자들도 장기집권 예방 조치.

9. 세계 7대 무역대국, 세계 10대 경제 자립 대국 건설.

 

寸 評  

 

자주국방 확립, 안보 대통령

민족문화 승화, 문화 대통령

외채상환 완납, 경제 대통령, 

 

No. 192 全斗煥 前 大統領 逝去 소식에,卞基榮 몬시뇰, 당일 오전 즉시, 직원들과 몇몇 수녀님들과 함께, 곡수리 공소 소성당에서 위령미사 봉헌 ! Msgr. Byon 2021-11-25 방문자 수 973 명  ,,,,, ! 

     

<추후 계속> <2021년 11월 23일,오전 10시, 

龍門, 牛頭山 자락, 曲水里 公所 小聖堂에서 

慰靈祭를 올리고나서> Msgr. 卞基榮 作,譯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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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위령성월에 6.25 대 전적지, 破虜湖를 순례하며!


1951년 봄, 지평, 가평, 용문산, 화천 지역에서 의 대격전 파로호 대첩은, 북한 공산당 인민군이 1950년 6월 25일부터 기습 남침하여 3일만에 빼앗았던 수도 서울이 1950년 9월 15일, 국군 특수부대 요원들의 참여와 지원을 받으며 미군의 인천상륙 작전 대승과 함께, 1950년 9월 28일 국군과 UN군이 서울을 완전히 수복하고, 평양을 점령하고, 앞록강까지 진격하자, 100만이 넘는 중공 대군이 북한 공산군을 지원하기 위하여, 특히, 남침 3일만에 기습 점령하여 빼앗았던 서울을, 빼앗긴 후 3개월 만에 다시 국군과 UN군에게 빼앗기자 이를 다시 최종적으로 빼앗기 위하여, 모택동의 오른 팔과 같이 중국 공산화 유혈혁명의 대장정 동료 팽덕회가 지휘하는 중공 집단군 3개사단 약 4만 5천여 명~5만 여명이 지평과 용문에 대규모로 집결하여 1951년 2월 13일 경부터 10여일간의 혈전을 시작으로 5월말까지 가평과 화천 지역에서 국군과 UN군에게 대패하였다.

 

특히 지평과 용문산 전투 최종 3일간은  피아 쌍방의 실탄이 모두 소진되고, 식량도 떨어져 굶어가며 소총을 꺼꾸로 잡고 몽둥이 삼아, 이른 바, 백병전으로 처절하게 난투극을 벌였으나, 그래도 국군 6사단과 8사단 일부가 지평에서 재집결 편성한 국군이 미군 특전 기갑연대와 프랑스 육군 1개 대대 6백여 명은 제공권을 장악한 미공군이 공중 투하하는 비상 대용식량 통조림으로 허기를 면할 수 있었으나, 중공군은 수송차량이 전혀 없이 도보로 이동하며, 낮에는 숨어서 자고, 밤에는 분대별, 소대별, 중대별로 아군을 기습하며 발악을 하였으나, 아군은 미 공군의 폭격과 미군 기갑부대의 지원을 받으며 중공군 약 2만여 명을 사살하면서, 중공군의 한국 수도 서울 재 점령 작전계획을 사전에 방어하면서, 오늘의 휴전선까지 중공군 대부대를 퇴각시켰다. 

 

이 후 중공군은 더 이상 다시는 남하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한국군 6사단(사단장 장도영 준장) 지상군 장병들의 결사적인 반공 투쟁의지와, 제공권을 장악한 미8군 공군의 무서운 지원 폭격 공습과, 더우기, 미군 기갑 부대의 지원에 힘입어, 특히, 공산주의 침략을 막아내기 위하여, 당시 프랑스 육군 현역 3성 장군 몽클라르 중장이 600명의 병사들을 위한 한국 지원병 부대 대대장을 맡기 위하여, 스스로 3성 장군의 현역 육군 중장 계급을 사임하고, 육군 중령 계급을 자청하여 붙이고, 대대장으로 취임하여 한국에 도착한 후, 우선 미 8군에 배속하여 지평리 전투에 참여하였는데, 실로 출중한 프랑스 장병들의 전투력으로 4만 5천여명~5만여명 중공군 3개 사단에 포위된 지평리 전투에서 미군 1개 연대에 불과한 3천여명 남짓한 소수 병력과 함께 대승을 거두자, 수만명이 사살된 중공군(총사령관 팽덕회)은 전의를 상실하고,오늘의 휴전선까지 북으로후퇴하면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계속된 패배로, 바로 휴전을 제의하게 되었다.     

 

1950년 7월과 8월에낙동강 다부동 전투는 아군이 주로 인민군 육군 부대만을 상대하며 싸우던 전투였으나, 이와는 달리, 지평과 용문산에서의 전투는 주로 약 5만여 명에 달하는 중공군과의 격전이었고, 우리국군을 지원하는 미군과 프랑스군이 U.N. 이름으로 함께, 특히 1951년 2월 13일부터 10여일간 지평과 용문산 전투에서는 약 2만 여명의 중공군을 사살하며 대승을 거두어, 가평, 청평, 화천에 이르는 중공군 대부대를 추격하며 격파하여, 오늘의 휴전선까지 퇴각시킨 최대 승전 기념비로 이승만 대통령은 [화천호]를 [파로호 (破虜湖)] 로 명명함과 동시에 승전 기념비를 세웠다.

 

破虜湖의11월은 위령성월입니다. 천주교회에서는 먼저 세상을 떠난 조상님들과 친척들과 모든 영혼들을 기억하며 매일 기도하고 미사를 올리며, 많은 이들에게 잊혀진 불쌍한 영혼들을 위하여, 무덤이나 연고지를 찾아 순례하며, 기도하는 달입니다. 

 

70 여년 전 지평, 용문, 가평. 청평. 화천, 등지에서 우리나라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전 세계 인류의 자유를 위하여, 反의 깃빨을 드높이 휘날리며 용감히 싸우다가 거룩히 전사한 약 5 백 여명의 우리 국군 용사들과, 특히, 나이 어린 학도병 무명 순교 용사들과, 더욱이 고국을 떠나와서, 이 심산궁곡에서 공산주의자들과 싸우다가 끓는 피로 젊음을 불태우며 목숨을 자유의 씨앗으로 이곳에 뿌리고 간, 미국과 프랑스의 천사적인 1 천여명의 UN군 전사자 장병들의 영혼을 위하여그리고, 또 이국 땅 한국에 와서, 고향의 부모 형제들을 그리워하며, 애타게 어머니만을 찾으며 부르면서 죽어간, 이름도 모르는 불쌍한 중공군 수만명,약 5만 여명에 이르는 전사자들의 영혼을 위하여도, 이들을 모두 자비로우신 하느님께 맡겨드리며, 오늘 아침 곡수리 공소 성당에서는 파로호 격전지 순례 길을 떠나기 전에, 우리 직원들이 위령미사를 바쳤답니다

 

또한,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지구상의 어디에서도, 결코, 절대로,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고, 또 기도하며,이처럼 한조각 돌이라도 세워서 우리 후대를 가르치는 선인들께도 감사하며,,,!!! - 변기영 몬시뇰 - <추후 계속>

 

1951년 봄 지평, 용문산,가평, 화천 지역에서 중공군 5만여명 대부대를 격파하고 수도 서울 의 재 점령 작전계획을 사전에 완전 방어하며, 오늘의 휴전선까지 중공군을 최종 격퇴시킨 승전 대첩의 기념비 화천 파로호 순례 !

 

1951년 봄 지평, 용문산, 중공군 격파전투 승전 기념비 화천 파로호 

[변기영 몬시뇰 사랑방,www. Servant Hall of Msgr. Byon. org] 직원들 순례.

(파로호 자유수호탑을 순례하는 변기영 몬시뇰, 2021.11.12)

 

 

1951년 봄 지평, 용문산, 중공군 격파전투 승전 기념비 화천 파로호 

[변기영 몬시뇰 사랑방,www. Servant Hall of Msgr. Byon. org] 직원들 순례.

(파로호 자유수호탑을 순례하는 변기영 몬시뇰, 2021.11.12)

 

 

1951년 봄 지평, 용문산, 중공군 격파전투 승전 기념비 화천 파로호 

[변기영 몬시뇰 사랑방,www. Servant Hall of Msgr. Byon. org] 직원들 순례.

(파로호 자유수호탑을 순례하는 변기영 몬시뇰, 2021.11.12)

 

 

1951년 봄 지평, 용문산, 중공군 격파전투 승전 기념비 화천 파로호 

[변기영 몬시뇰 사랑방,www. Servant Hall of Msgr. Byon. org] 직원들 순례.

(파로호 자유수호탑을 순례하는 변기영 몬시뇰, 2021.11.12)

 

 

1951년 봄 지평, 용문산, 중공군 격파전투 승전 기념비 화천 파로호 

[변기영 몬시뇰 사랑방,www. Servant Hall of Msgr. Byon. org ] 직원들 순례.

(파로호 자유수호탑을 순례하는 변기영 몬시뇰, 2021.11.12)

 

 

1951년 봄 지평, 용문산, 중공군 격파전투 승전 기념비 화천 파로호, (변기영 몬시뇰 사랑방, www. Servant Hall of Msgr. Byon. org. 직원들 파로호 자유수호탑 변기영 몬시뇰과 직원들과 함께 순례 2021.11.12)

 

 

1951년 봄 지평, 용문산, 중공군 격파전투 승전 기념비 화천 파로호, (변기영 몬시뇰 사랑방, www. Servant Hall of Msgr. Byon. org. 직원들 파로호 자유수호탑 변기영 몬시뇰과 직원들과 함께 순례 2021.11.12)



1951년 봄 지평, 용문산, 중공군 격파 승전 기념비 화천 파로호 순례(천진암성지 전 사무국장 박희찬 2021.11.12)

 


1951년 봄 지평, 용문산, 중공군 격파 승전 기념비 화천 파로호(2021.11.12)

입력 : 2021.11.25 오후 10:49:45

변기영 몬시뇰 사랑방, www. Servant Hall of Msgr. Byon. org 직원들 순례(2021.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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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에 나지 않은, 최보식 기자의, 李熺性(이희성) 전 계엄사령관 인터뷰:
"全斗煥은 12·12와 상관있고, 5·18과는 無關"
 
"光州 수습되고 3개월 뒤 전두환이 대통령 돼… 안 그랬으면 光州 문제에 전두환 이름 안 나왔을 것." "전두환은 새카만 후배… 내게 '형님' 하며 어려워 해" "날 뛰어넘어 越權했다?… 내 성격 알면 이런 말 안 나와."
 
"법정에서도 '지휘 체계가 이원화됐다'는 말들이 있었소.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나 몰래 따로 보고받고 지시했다는 소리인데, 그건 범죄요. 그러면 내가 그냥 두고 볼 것 같소. 내가 있는데 있을 수 없는 일이오." "1996년 재판 당시 광주 현지까지 내려가 조사를 벌였으나 발포 명령을 내린 지휘관이 없었어요." "(재판은) 내 입장에서 보면 허무하게 진행됐소. 공판 과정에서 내게는 질문이 거의 없었소. 오직 전두환에게만 하고. 당시 정국을 총괄한 계엄사령관에게는 별로 질문할 것이 없었던 모양이오."  
 
[(편집자 注)광주 5·18 사건 36주년을 앞두고 崔普植 조선일보 기자가 진압작전의 최종 지휘자였던 당시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 李熺性(이희성) 씨를 인터뷰하였다. 월요일마다 조선일보에 실리던 '최보식이 만난 사람'은 어제 나오지 않았다. 이희성 씨는, 당시 신군부의 실력자였던 全斗煥 합동수사본부장 겸 중앙정보부장이 광주 진압 작전에 개입한 적이 없었다고 했다. 李 씨는 '병사들이 혼란 속에서 위험을 느껴 쏜 것일 뿐, 발포 명령도 없었다'면서, '광주 사태가 불처럼 他지역으로 번져 전국에서 民亂이 일어나면 나라가 어떻게 될까, 그때 우리 군에서는 그런 국가 위기 상황을 걱정했고, 절실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인터넷을 통하여 알려진 인터뷰 全文은 다음과 같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5·18에 대한 유감 표명과 광주 망월동 묘역 참배설(說)이 보도됐을 때, 그쪽 관계자는 이렇게 해명했다.
 
'광주 방문은 와전된 것이다. 5·18에 본인 책임이 있다는 뜻도 아니다. 당시 희생자가 있었고 대통령이 된 뒤로 충분히 수습을 못 한 데 대해 아쉽다는 표현이다. 지금까지 그는 광주의 가해자로 잘못 인식돼왔다. 이는 사실관계에서 명백히 틀린 것이다. 본인이 가장 억울해하는 대목이다.'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광주 학살 주범'인데, 반성 없이 억울해하니 그답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판단과 해석 문제가 아니라, 사실관계 문제라면 기자(記者)로서 한번 확인해볼 필요성은 느꼈다. 1980년 당시 정국을 관장한 李熺性(이희성) 전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을 만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첫 인상이 단아했다. 경기도 과천시 갈현동의 전원주택에 살고 있는 그는 방문객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게 무엇이 궁금하오? 하나하나 질문하면 답변드리지. 늙어서 생각이 잘 날지는 모르겠소.'
 
 나는 곧바로 본질로 들어갔다.
 
―당시 계엄사령관이라면 5·18 상황을 전체적으로 가장 잘 알 수 있는 위치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렇소. 전국 계엄 상황이었으니, 국방장관과 대통령께 주요 사안은 보고했지만 내가 全權을 쥐고 통괄했다고 할 수 있소.'
 
―1996년 '역사 바로 세우기' 재판에서 5·18과 관련돼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았지요?
 
'그렇소. 계엄사령관이었기에 책임을 진 거요. 5·18을 어떻게 보느냐를 떠나 결과적으로 피해가 크지 않았소. 희생자와 유족이 많이 생기지 않았소. 국가적으로 이를 추스르는 차원에서 이들의 요구와 주장을 감안해야 하는 거요. 내가 높은 자리에 있었기에 그걸 피할 수는 없는 거요. 도의적 책임을 진 거요(8개월 복역하고 특별사면됨).'
 
―당시 국정 수반인 최규하 대통령도 도의적 책임이 있습니까?
 
'그건 아니오. 군의 작전 상황이니 계엄사령관과 국방장관에게 있지, 군을 잘 모르는 대통령께서야 책임질 일이 아니오.'
 
―도의적 책임은 그렇고, 실제적인 책임은 누구에게 있습니까? 5·18 당시부터 대학가에서는 '광주 학살 주범'으로 전두환을 특정했습니다.
 
'그건 군의 작전 지휘 계통을 정말 모르고 하는 소리요.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5·18과는 무관하오. 그는 12·12(1979년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수사를 이유로 정승화 육참총장을 강제 연행한 사건)와는 상관있지만 5·18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소.'
 
―계엄군 출동과 발포 명령을 그가 배후 조종했다는 게 통설입니다.
 
'법정에서도 '지휘 체계가 이원화됐다'는 말들이 있었소.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나 몰래 따로 보고받고 지시했다는 소리인데, 그건 범죄요. 그러면 내가 그냥 두고 볼 것 같소. 내가 있는데 있을 수 없는 일이오.'
 
―계엄사령관이 위계상 높지만 당시 모든 힘이 전두환에게 쏠리지 않았습니까?
 
'전두환은 새카만 후배였고 내게 '형님, 형님' 하며 어려워했소. 나를 뛰어넘어 감히 월권해? 내 성격을 알고 이런 관계만 알아도, 그런 소리가 안 나옵니다. 전두환은 밝은 사람이지, 음습하지 않아요. 몰래 그렇게 하는 스타일이 아니오. 내 단호히 얘기하오. 광주에 관한 한 전두환 책임은 없소.'
 
―그렇다면 5·18에 전두환을 지목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라고 봅니까?
 
'광주가 수습되고 3개월 뒤 그가 대통령이 됐기 때문이오. 대통령만 안 됐으면 전두환 이름이 그 뒤로 나오지 않았을 거요.'
 
―전두환이 아니라면, 누가 5·18에 대해 책임이 있는 겁니까?
 
'지휘 계통의 최고위에 있는 계엄사령관인 나와 국방장관(周永福)이오. 그래서 법적 책임을 지지 않았소. 전두환에 대해 과대평가하고 있어요. 그는 보안사령관이었고, 내 참모에 불과했소. 참모로서 내게 건의할 수는 있었겠지만, 작전 지휘 체계에 있지 않았소. 진압 작전에 개입할 수 없었소. 그는 광주에도 내려간 적이 없소.'
 
―적극적인 스타일인 전두환이라면 광주에서 그런 사태가 벌어졌으니 오히려 한번 내려갈 만하지 않았습니까?
 
'현지 보안 부대를 통해 보고가 올라오니까 그도 광주 상황을 알고 있었소. 내려가 본들 뭘 하겠소. 부대장에게 격려금이나 건네주는 게 고작이잖소. 당시 정호용 특전사령관은 내게 보고하고 광주에 내려간 적 있소. 광주 현지 부대에 배속시킨 공수여단 격려차 간 것이오.'
 
―전두환이 육사 동기생 정호용을 통해 작전 지시를 했다는 설도 있었습니다.
 
'재판에서 그런 말이 나왔는데, 정말 군대 체계를 모르고 하는 소리요. 특전사령관도 광주에 파견된 자기 부하들을 지휘할 수가 없소. 작전 책임과 지휘권은 배속된 부대 지휘관에게 있소. 조언은 할 수 있겠지만, 이래라저래라 작전 지휘를 하는 것은 군법에 어긋나는 거요.'
 
―'역사 바로 세우기' 재판에서 검찰 측 증인으로 나와 '1980년 5월 21일 '자위권(自衛權) 보유 천명' 담화를 발표할 때 보안사 참모가 초안을 건네줬다'고 진술하지 않았습니까? 이를 전두환의 5·18 개입 증거로 볼 수 있지 않습니까?
 
'내가 검찰 조사를 서너 번 받았어요. 꼭 밤중에 잠 안 재우고 심문을 했어요. 졸려서 정신이 몽롱해질 새벽에 진술서 서명을 받아요. 검찰이 신사인 줄 알았는데 그런 트릭을 써요. 그래서 보안사 참모인지 계엄사 참모인지 헷갈렸던 거요. 계엄사 참모였다고 하더군요. 설령 보안사 참모라고 해도 그런 건의를 해올 수 있는 거요. 결정은 내가 하는 것이오. 애초에 담화 발표 구상은 나 혼자서 한 거요.'
 
―왜 그런 구상을 했습니까?
 
'계엄군이 일방적으로 공격당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오. 다만 담화 내용에 대해 신경을 썼어요. 장차 법적으로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고 봤으니까. 그래서 참모들을 불러 문안을 검토한 뒤 발표했소.'
 
―장차 법적인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자위권 보유 천명'이 '발포 명령'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걸 그때 예상했다는 건가요?
 
'재판 과정에서 '사정을 모르는 병사들은 자위권을 발포 명령으로 알았을 것'이라는 말이 나왔소. 그런 해석은 오버요. 공격을 받아 신변의 위협을 느낄 때 개인마다 정당방위 차원의 '자위권'이 있다는 것이오. 피동적인 것이오. 발포 명령과는 다르오. 더욱이 담화문에서 '자위권이 있다'고 한 게 아니라 '자위권이 있음을 경고한다'고 했소. 예방 목적이지, 자위권을 적극적으로 발동하겠다는 뜻이 아니었소.' ―자위권을 천명한 담화 발표 뒤 계엄군에게 실탄이 지급됐습니까?
 
'실탄 지급은 일선 부대 지휘관 차원에서 이뤄지는 거지, 계엄사령관이 이래라저래라 할 사안이 아니오.'
 
관련 재판 기록을 보면 '자위권 담화'가 있기 전에 실탄 발사가 이미 있었다. 5월 19일 시위대에게 포위된 계엄군 장교가 위협사격을 한 게 첫 발포였다. 20일 밤 광주역에서는 실탄 사격으로 4명이 숨졌고, 21일 담화 발표가 있기 전에도 총격전이 벌어졌다.
 
―누가 발포 명령을 한 겁니까?
 
'1996년 재판 당시 광주 현지까지 내려가 조사를 벌였으나 발포 명령을 내린 지휘관이 없었어요.'
 
―총 맞은 시민들이 있는데 발포 명령자가 없다는 게 과연 말이 됩니까?
 
'전투라는 게 우발적이고 부화뇌동해서 일어날 수도 있소. 겁에 질려 있는 사병들이 막 쏘고, 어디서 날아온 총알에 누가 맞았는지도 가릴 수 없었소. 한밤중에 아군끼리 교전도 있었소. 다만 5월 27일 전남도청 재진입 작전은 적극적이었소. 도청 지하실에 TNT와 수류탄 등 무기가 있었고 무장한 주동 세력이 있었기 때문이오. 당시 북에서 이를 이용 안 할 리가 있었겠소.'
 
―당시 담화문에 '상당수의 다른 지역 불순 인물 및 고정간첩들이 사태를 극한적인 상태로 유도하기 위해 광주에 잠입해…'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근거가 있는 겁니까?
 
'첩보는 있었지만 확증을 잡지 못했소. 확증이 없는데 어떻게 얘기하겠소. 다만 무기고를 털고 시위대를 조직적으로 이끄는 등 민간인이 할 수 없는 행동이 있었소.'
 
―광주가 수습된 뒤 왜 조사를 하지 않았습니까?
 
'그때는 뒤처리와 민심 위무(慰撫)가 시급해 그런 조사에 착수할 수 없었소.'
 
―공수부대를 투입해 초기에 과잉 진압을 함으로써 사태를 악화시켰다는 주장이 있었는데요?
 
'당시 공수부대는 소요 진압 임무가 있었소. 5월 18일 아침 휴교령이 내려져 있는데 학생들이 들어가겠다며 전남대 정문에서 군인들과 충돌한 게 발단이었소. 학생들은 가방에 넣어온 돌을 던졌고 군인들이 무방비로 맞은 거요. 그 뒤 시내에서 학생들이 집결하자 군인들이 뒤쫓아가며 진압봉으로 두들겨 팼소. 이를 본 시민들은 공수부대원들이 무자비하다고 흥분한 거요. 어떤 세력이 '경상도 공수부대가 전라도 사람 씨를 말리러 왔다'며 악성 루머를 퍼뜨렸소.'
 
―광주가 수습된 뒤인 6월 초 정부 합동조사단이 현장 조사를 마치고 '초기 진압 작전의 과오 책임을 물어 당시 현장 지휘관을 군법회의에 회부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올린 게 맞습니까?
 
'그건 맞소. 하지만 내가 반대했소. 현장 지휘관은 잘못한 것이 없는데…. 결과적으로 많은 피해자가 생겼으나 그건 앞서 말한 대로 불가피한 상황도 없지 않았소. 나는 지금도 작전 실패는 아니라고 봐요.'
 
―숱한 사상자를 낳은 국가적 비극을 초래했는데?
 
'한 사건을 이쪽·저쪽, 위·아래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르오. 광주 사태가 불처럼 타 지역으로 번져 전국에서 민란이 일어나면 나라가 어떻게 될까, 그때 우리 군에서는 그런 국가 위기 상황을 걱정했고, 절실했습니다.'
 
―1996년 '역사 바로 세우기' 재판에서 그 나름대로 진실 규명이 이뤄졌다고 봅니까?
 
'내 입장에서 보면 허무하게 진행됐소. 공판 과정에서 내게는 질문이 거의 없었소. 오직 전두환에게만 하고. 당시 정국을 총괄한 계엄사령관에게는 별로 질문할 것이 없었던 모양이오.' 
 
 삼류작가 (2016-05-17 오전 9:56)의 댓글(?)
 
 
내가 지금까지 광주사태의 진상에서 가장 의문점을 가지고 있던 일이었습니다. 정말 전두환이 광주사태진압을 지휘했는가? 좌파세력들의 주장처럼 '학살원흉'인가? 전두환이 발표명령을 했나? 아니면 그의 지시를 받은 부하가 내린 것인가? 그런데 청문회를 하고 그렇게 철저하게 이잡듯 뒤지고 했는데도 그에 대한 증거도 안나왔고 발포명령자조차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몇십년이 흐르도록 말이죠. 아무래도 이상하다, 전두환은 광주사태의 진압책임과는 무관한 것이 아닌가? 의도적으로 신군부가 광주사태를 조장 학살을 자행했다는 좌파세력들의 주장이 틀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안들수가 없었죠. 이제서야 좀 알것 같군요. 아, 당시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그동안 왜 그렇게 좌파들의 타깃에서 벗어나있었는지도 알것 같습니다. 사회 정치적 기류가 어떻게든 전두환을 '광주학살의 원흉'으로 지목하고 그에게 모든 책임이 있는 것으로 해야했으니, 팩트는 사실 그다지 중요하지가 않았던 거라고 보입니다. 그가 광주사태의 책임자가 아니어도, 그가 모든 책임을 다 뒤집어쓰고 돌팔이매질을 당해줘야 문제가 매듭이 지어지고 이 일이 봉합될 수가 있었으니까요. 그렇지 않은게 팩트라고 밝혀지는걸 피해당사자들이나 좌파세력들이나 국민들까지도 용납할 수가 없었을겁니다. '광주사태 사망자들이 어디까지나 '악랄한 살인마 전두환'의 직접 지시로 인해 숨진 순교자여야 하는데, 그게 사실이 아니고, 전두환의 지시와는 무관하게 우발적인 총격으로 인해 숨졌다는게 사실로 밝혀지는 것을 피해자 유족들이나 좌파세력들이나 야당들이 받아들일 수가 없었을거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 인터뷰 기사가 조선일보에 실리는게 거부된것 같은데, 아직도 그런 분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우리 사회인것 같습니다. 아마 전두환씨가 관속에 들어가고도 한참은 시간이 지나야, 적어도 그가 광주사태와는 무관했다는게 인정될것 같습니다.<2016-05-17 오전 9:56, 조갑제 닷컴 헤드 라인>
<2016-05-17 오전 9:56. 조갑제닷컴에서 퍼온 글>
입력 : 2021.11.03 오후 9: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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