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와 오키나와(류구국)와 조어도(釣魚島) 지역의 천진 도태수가 세종대왕, 연산군, 등. 조선 임금님들에게 연례 인사차 바치던 예물 참고.
對馬島 박다(博多)의 자운사 주지 천진(慈雲寺住持 天眞島태수(?)
[天眞]이라는 낱말은 불교계에서도 암자 이름이나 인명으로 사용되는 경우를 찾아보기 매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오십여년 전 한국 천주교 발상지 천진암 성지를 처음 개척할 때, 천주교 내의 역사가들과 저명인사들의 모임에서도 몇년 동안 자주 거론되되면서 적지 않은 저명 인사들의 모임에서 모두 이구동성으로 인명이나 지명이나 거물명으로 사용되지 않는다고 하였으며, 다만,단군 성조의 초상화를 [천진]이라고 부르는 경우는 민족 종교 계통에서 주로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한국천주교 발상지로 밝혀진 천진암과, 대마도의 박다 지역에 있다는 자운사 주지명이 천진이라고 알려져서, 그 내력을 알아보려고 꽤 여러 차례 노력해 보았으나 별로 이렇다할 해답을 얻지 못하였다. 앞으로 후학들이 밝혀줄 때가 올 것이므로, 자료 부족으로필자의 소견은 차후로 미루고자 한다. [천진] 이라는 인명이나 건물명이나 기관명이 거의 없다시피한 경우로서, 이에 관심있는 분들에게 우선 참고하시도록 한두가지 소개합니다.<계속>
오키나와(유구국), 대마도의 박다(博多)의 자운사 주지(慈雲住持) 천진 도태수 (對馬島
天眞 島太守(?)가 수차례 세종대왕과 연산군, 등 조선 임금님들에게 바치던 조공 품목.
태종실록 2권, 태종 1년 9월 29일 을묘 기사 1401년 명 건문(建文) 3년 일본의 대마도 임시 태수 종정무 등이 말·석고·백반을 바치다 일본국(日本國) 권 대마도태수(權對馬島太守) 종정무(宗貞茂)가 사자(使者)를 보내어 말 6필을 바치고, 대마 주수(對馬州守) 사미 영감(沙彌靈鑑)이 사자를 보내어 말 4필을 바치고, 박다(博多)의 자운 주지(慈雲住持) 천진(天眞)이 석고(石膏) 5근과 백반(白礬) 30근을 바쳤다.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12장 출처 : 팜인사이트(http://www.farminsight.net)
■태종실록 2권, 태종 1년 9월 29일 을묘 기사 1401년 명 건문(建文) 3년 일본의 대마도 임시 태수 종정무 등이 말·석고·백반을 바치다 일본국(日本國) 권 대마도태수(權對馬島太守) 종정무(宗貞茂)가 사자(使者)를 보내어 말 6필을 바치고, 대마 주수(對馬州守) 사미 영감(沙彌靈鑑)이 사자를 보내어 말 4필을 바치고, 박다(博多)의 자운 주지(慈雲住持) 천진(天眞)이 석고(石膏) 5근과 백반(白礬) 30근을 바쳤다.
출처 : 팜인사이트(http://www.farminsight.net) 참고.
[617년 전 오늘 - 축산 소식81] 일본 대마도에서 말 60여두를 조공하였다
남인식 편집위원 승인 2018.11.07 10:54 댓글 0
제 18-97호, 양력 : 11월 6일, 음력 : 9월 29일
[팜인사이트= 남인식 편집위원] 조선시대 연해안을 침입하여 약탈을 자행하던 일본의 해적 집단을 왜구(倭寇)라 하였는데, 이들은 조선 건국 전 40-50여년 동안 가장 많아 500여척의 대선단(大船團)을 이끌며 그 규모가 수만명에 달하는 경우가 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이들의 근거지는 일본의 서해도 일대와 규슈(九州)지역으로 대마도(對馬島), 일기도(一岐島), 송포(松浦)가 가장 심했습니다.
세종(世宗)대에는 이들 대마도 사람들이 왜구로 돌변하여 약탈을 자행하자 당시 상왕(上王)으로 있던 태종(太宗)은 대마도를 정벌하게 하였는데, 병선 227척과 병력 17,285명이 동원되어 100여 척의 적선을 소각하고 1,939채의 가옥을 불태웠으며 114명의 왜적을 참수하고 131명의 중국인 포로를 색출해 오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이후 왜구의 노략질은 거의 소멸되었으나 생존 모색을 위해 불법적인 어업, 밀무역 대신에 합법적인 교린(交隣) 체제를 통하여 살 길을 찾기 위해 자주 사신을 보내 조공(朝貢)하고 교역(交易)을 요청하였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세종(世宗) 21년 한 해에만 대마도(對馬島), 일기주(一岐州), 일향주(日向州) 등의 일본 여러 섬 지역에서 자주 왜사(倭使)가 찾아와 그 숫자가 1,300명에 달하였으며, 사신 접대에 어려움이 있어 조선의 임금을 찾아와 인사하는 절차인 왜사숙배절차(倭使肅拜節次)를 정할 정도였습니다.
한편, 이들 사신들은 주로 조선에 토산물(土産物)을 예물로 바치고 쌀이나 콩과 같은 곡물이나 인삼(人蔘), 흑마포(黑麻布), 백저포(白苧布)등 포물(布物)을 답례품으로 받아갔는데, 특히 대마도에서는 정종(定宗)대에 32두, 태종대에 21두, 세종대에 6두, 성종(成宗)대 2두등 10여 차례에 걸쳐 60여두의 말을 조공하기도 하였습니다. 617년전 오늘의 실록에는 일본 대마도 태수(太守) 등이 말 10두와 석고, 백반을 바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태종실록 2권, 태종 1년 9월 29일 을묘 기사 1401년 명 건문(建文) 3년
홍길동은 오키나와로 건너갔을까.
2023. 4. 7. 09:42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전기
류큐는 지금은 일본 영토지만 40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독립왕국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와 역사적으로 아무 관련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이 섬에 조선인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흔적에서 『홍길동전』의 주인공인 홍길동의 모델을 추정해봅니다.
역사학자 가데나 쇼도쿠는 청년시절 도서관 사서였습니다.그는 오키나와의 역사를 체계화시킨 인물로 1973년에 오키나와 현립 도서관장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그는 도서관사서로 있을 때 어떤 질문에 모른다고 했을 때 도서관 직원이 그것도 모르느냐는 핀잔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그는 50이 넘은 나이에 역사를 공부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그가 만든 역사지도에는 조선사신이 묵은 조선관, 제주마을, 조선인 묘지가 표시되어 있었습니다.
오키나와 민속학을 연구하는 엔도 쇼지 교수 역시 홍길동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유구열도 도래인 중에 홍길동 같은 인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홍길동이 1400년 이전에 왔다면 오키나와 본토에서 세력을 폈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지만 오키나와의 본토세력도 만만치 않았으니 본토에서는 세력을 떨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만일 홍길동이 왕이 되었다면 가능성이 높은 지역으로 자신이 있는 곳으로부터 100㎞ 떨어진 구미도라는 섬과 남서쪽 300㎞ 떨어진 궁고도 그리고 석원도 세 지역 중의 하나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길동이 대궐을 향하여 사배 하직하고 아무대로 가는 줄 모르더라. 이 날 길동 삼천 적군을 거느려 망망대해로 떠나더니, 성도라 하는 도중에 이르러 창고를 지으며, 궁실을 지어 안돈하고, 군사로 하여금 농업을 힘쓰고 …’ 『홍길동전』
한편 소설에서는 힘을 키워 율도국을 친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럼 궁고도가 혹시 홍길동전에 나오는 율도국은 아닐까 생각하는데 이 곳은 현재 토지가 비옥하고 쌀이 많이 나와 먹고사는 데 풍족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이 섬에는 14세기 후반 1000여 명의 무리가 침략해 들어왔습니다. 이들은 전에 볼 수 없는 독특한 전투방법으로 섬을 점령했습니다. 그들은 외부에서 온 세력이란 뜻으로 요나하 바로라고 불리웠고 섬 사람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어디서 왔는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또한 이 무리가 홍길동의 세력이라는 증거는 없습니다. 하지만 조선인의 표류기록은 찾을 수 있습니다. 바로 김비 일행이 15세기 말 여나국도에서 유구로 와서 나하의 항구 근처에 있는 조선인 마을에 수용된 것입니다. 표류되어온 사람과 그 외의 이유로 온 사람들도 그 수용소에서 함께 살았습니다. 그래서 조선과의 교류는 어느 정도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들 사람 중에는 유구사회에 동화돼 버린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조선인 수용소가 많았다는 것은 그만큼 조선으로부터 표류해온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들의 표류는 대부분 1월과 2월 사이에 이루어졌습니다. 그것은 계절에 따라 바람의 방향 때문입니다. 어쩌면 홍길동도 이 바람을 타고 유구로 오지 않았을까요. 1400년 경 오키나와 본토는 통일되지만 궁고도 같은 섬은 여전히 지방세력이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섬지방의 왕이 되는 경우는 기록으로 찾아볼 수는 없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며 조선 사람이 건너와 왕이 되는 이야기도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령 이 곳에 남아 있는 성의 일부(구지천성)는 유구의 전통방식과 다르다고 하며 아마 그 주변의 삼국(조선, 중국, 일본) 중 하나의 모습이 들어온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한편 엔도 쇼지 교수는 홍길동에 왕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곳으로 구미도로 꼽고 있습니다. 그가 왔을 때에 순식간에 큰 성이 3개가 생겼으며 섬 전체를 지배하는 왕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만 당시 왕이 외부에서 들어왔으나 어디에서 왔는지 불분명하다고 합니다. 구미도는 중국과 조선, 일본을 잇는 해상교통의 요지라고 합니다. 한편 이러한 구미도에는 지나왕의 장남이 세웠다는 우강성터가 남아 있습니다. 바다로 굽어보는 성으로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바람이 강한 곳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곳에서 100여 년간 왕성하게 해외무력을 했다는 흔적이 나왔으며 그런 것 중에 하나가 중국과 조선의 자기가 발견된 것입니다. 구강성터에는 도래인 왕이 조선인임을 알려주는 사실이 있는데 산정상에는 대형우물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우물이 만들었을 시점이 『홍길동전』이 쓰여지기 100년 전으로 정체 불명의 외부세력이 들어와 100년간 통치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곳에서 조선자기같은 조선과 관련되었으며 성을 쌓는 방법에서도 조선의 축성술을 확인할 수 있고 또한 돌로 된 닻이 발견되었는데 조선의 대표암석인 화강암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렇듯 유구에서는 조선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조선이 유구로 왔다면 허균은 유구국을 율도국의 문학적 배경으로 사용하여 『홍길동전』이 저술할 수 있습니다.
그럼 조선은 당시 유구국을 인식하고 있었을까. 한편 1471년에 「해동제국기」를 펴냈는데 이는 허균의 『홍길동전』이 나오기 150여 년 전입니다. 그리고 이 자료에 ‘유구국지도’의 일부가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1389년 고려 창왕 때 유구국왕은 왕자를 보내 스스로 신하의 나라라 칭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후에 한반도(조선)와 유구는 밀접한 관계를 맺었습니다. 한편 1458년 세워진 만국 진량의 종에는 아시아의 중심 국가인 유구가 만국의 평화를 기원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삼한의 뛰어남을 모아서’라는 문장이 나오는데 이는 조선을 의미하며 ‘조선의 빼어남을 모으고 명나라를 보차로 삼고 일본을 순치로 한다.’라 하면서 조선을 첫째로 언급하니 조선과 유구는 친밀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유구국은 오랫동안 부족국가 단계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2세기에 산남, 중산, 산북이라는 세 왕조가 나타났고 이들 국가의 형태로 발전하였습니다. 이 중 가장 세력이 컸던 것은 바로 중산 왕조이었는데 1406년 쿠데타가 일어났습니다. 제상이었던 파지가 당시 중산왕이었던 찰도의 아들 무녕을 몰아내고 새로운 왕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1429년에는 산북과 산남을 멸망시키고는 통일을 이룩하였습니다. 그리고 1430년에는 명나라의 책봉을 받아 중산국왕이 되었으며, 그와 더불어 상(尙)이라는 성씨를 하사받았고 이로써 상씨왕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때에는 조선은 세종이 다스리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면서 허균은 아마 이러한 상씨왕조의 탄생 시기에서 문학적 영감을 얻어 홍길동을 탄생시켰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전적으로 상파지에만 의존하여 홍길동을 탄생시킨 것으로 보고 있지는 않습니다. 세종 2년에는 문과에 급제한 홍일동이라는 인물이 있어 당시 조선의 임금인 세조가 거짓으로 그를 죽이겠다고 칼로 위협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연산군일기」에는 도적 홍길동을 잡았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아마 허균은 이러한 인물들을 복합적으로 엮어 홍길동을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남쪽에 율도국이란 나라가 있는데, 기름진 평야가 수천 리나 되어 실로 살기 좋은 나라이고, 길동이 마음속으로 늘 그리던 곳이었다. 모든 사람들을 불러 당부하기를 '내가 이제 율도국을 치고자 하니, 그대들은 최선을 다하라'라고 하고는 그날 군대를 이끌고 떠났다.’
『홍길동전』
소설의 결말과 관련하여 조선후기에 나온 『해동이적』이란 책에서는 홍길동이 "하루아침에 갑자기 도망가 버렸다"면서 "필시 해외로 도망가서 왕이 됐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연산군일기」에는 붙잡힌 홍길동이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 기록이 남아 있지 않고 1500년부터 사라진 사람이 되었는데 『홍길동전』에는 그가 병조판서의 자리를 받은 뒤 해외로 떠납니다. 그러면서 오키나와에서 홍가왕이 나타나 활동하게 되니 그 시기가 바로 홍길동이 조선에서 체포되었다가 사라진 시점인 1500년 경입니다. 하지만 이런 홍가왕이 열도 최남단의 작은 섬에서 출생되었다고 하니 홍가왕이 홍길동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신중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