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성월에 성모 발현을 기다리며 고대하는 분들에게.
천상에 계신 구세주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께서는 지난 2 천년 세월 동안 종종 지상의 신자들에게 발현하시어, 우리 모두에게 위로와 용기와 희망을 주시며 기쁨과 사랑을 더해 주셨다. 그런데 근세에 오면서, 발현하신 성모님의 발현은 지상의 온 교회와 온 세상이 모두가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엄청난 광경과 상상을 초월하는 결실을 이룩하여 주시며, 성모님께서는 지상 교회 우리 신도
들과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밝히 입증하여 보여주시므로 지상 교회는 모두가 우리의 감사와 찬미와 공경을 금치 못하고, 노래하며 찬미하고 있다.
그래서 우선 전란이 그치지 않고, 전 인류의 죄악이 차고 넘치는 현실에서, 근세에 와서 발현하시는 성모님을 뵈왔던 목격자들을 간결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그 이유는 성모님의 발현을 기다리며 고대하는 일부 신도들을 위하여, 이미 성모님의 발현을 목격하였던 신자들은 어떠한 분들이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우선 여기서 필자가 알아본 최근세에 대표적인 성모 발현 목격자들의 공통점은 모두가 어른들이 아니었고, 10세 전후의 어린이들이었으며, 따라서, 중.고등학교나 대학을 다닌 그 이상의 박학다식한 지성인들이 아니었을 뿐 아니라, 유명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아주 소박하고 순진한 어린이들이었다. 더군다나 속된 우리말 표현으로, 대부분 어느 어린이들은 째지게 가난한 집의 어린이들이었다.
1850년대에 들어오면서 프랑스 서남쪽 삐래네 깊은 산골의 물레방아간 헛간을 빌려서 임시로 살고 있던 베르나뎃다는 열 살이 넘도록 하나, 둘,부터 다섯까지는 세면서 여섯부터는 잘 세지를 못하여, 저녁을 먹은 후, 엄마는 베르나뎃다에게 하나, 둘, 셋, 넷, 숫자를 동생들처럼 열까지 한동안 반복하며 가르쳐 나가야 했다고 훗날 한 연구논문은 밝히고 있다. 특히, 바위 동굴에서 발현하는 부인의 이름이 무엇인지 물어서 알아오라는 본당신부님의 말씀을 따라, 열세살 난(14세?) 천진난만한 산골 소녀는 아주 순진하게 본당신부님의 질문을, 발현 하신 성모님께 전하였고, 성모님은 빙그레 웃음을 띤 모습으로, '나는 원죄에 물들지 않은 태에 잉태된 여인'이라고 알려 주었다.
그런데 '앵마슐레 콘셉시옹(Immacule' Conception)'이라는 이름은 벨라뎃다뿐 아니라, 그 당시 산골 성당에서는 대개 처음 듣는 말이고, 그 산골 성당에는 그런 본명으로 부르는 어린이도 물론 없었다. 라틴어에 뿌리를 둔 이 유식한 신학 용어는 약 3, 4 년 전 (1853년을 전후하여) 로마 교황청에서 전 세계 교구장 주교들에게 보낸, '성모 무염시태' 교의에 관한 공문에나 나오던 말인데, 이 말을 들은 본당신부들 만이 그래도 알고 있던 터이므로, 깊은 산골 물레방아깐 창고 헛칸을 한 두 해씩 빌려가며, 임시로 살아가던 빈민집 소녀가 알리가 없었다.
그래서 동굴에서 발현하신 부인한테 들은 이름을 잊지 않고 기억하려고, 벨라뎃다는 바위동굴에서 약 500여 m 떨어진 본당 신부 사제관까지 같은 물도랑을 징검다리로 지그재그식으로 몇차례 건널적 마다, 성모님이 일러주신 그 이름을 잊지 않으려고 입밖으로까지 되풀이하며 소리를 내면서 소녀는 사제관 본당신부님께 가서 틀리지 않고 되풀이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 본당 신부는 벨라뎃다가 갑자기 쏟아지는 소낙비를 피하려고, 가끔씩 잠시 머무는 바위 굴이라고 알려주는 동굴에서 발현하신다는 부인의 이름에 놀랐다. 그래서, 동굴에서 벨라뎃다에게 발현하신다는 그 부인은 분병히 천국에 계신'무염시태'의 성모 마리아'이심을 깨닫게 되었으며, 긴장한 신부는, 바로, 소속 교구장 주교님에게 즉시 보고하게 되었다.
약 반세기 후, 1917년 봄 (5월 13일), 당시 유롭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 속하는 폴투갈의 불모지 파티마에서 여섯살, 여덟살, 열 살돤 어린이들 3명, 히야친타와 프란체스코와 루시아는 양들을 돌보며 술레잡기도 하며 놀다가 동편 하늘에서 오는 둥근 원형모양으로 맑고 밝은 빛덩이 속에서 성모님의 발현을 목격하게 되었고, 그 후, 두 어린들은 일찍 세상을 떠났으나. 루시아는 커서 후에 가르멜회 수녀가 되어 몇년 전에 선종하였다.(97세로 ?)
유롭과 특히 파티마에는 여러 차레 공무로 순례하였던 필자는 지난 1996년 가을 1 주일간 파티마에서 필자 자신의 사제서품 25주년을 기념하는 은경축 행사는 하지 않고, 그 대신 파티마 성지에 와서 갠인 피정신공을 하였었는데, 그 때, 루시아 수녀가 노라에 병환이 심하시다는 소식을 듣고, 갈멜회 수녀이며, 또 병세가 좀 심하여 일체 직접 면담식 문병은 어려우나, 당시 우리 한국의 남북관계가 국내에서는 전쟁위험으로 치닫고 있을 때라서, 필자는 원장수녀님을 통하여 루시아 수녀에게, 한국에서 남북전쟁이 안나도록 성모님께 기도 청탁을 할 겸, 문병인사를 드릴 기회가 있어, 파티마에서 약 100 여 킬로 떨어진 고임부라갈멜 수녀원으로 가서, 우리 조국을 위한 특별 기도청탁을 하면서, 루시아 수녀 문병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사실 고임부라 읍내는 일찌기 중세기부터 교육열이 높아 고임부라 신학대학에서 30대 초반에 수학박사 좋은 성적으로
학위까지 받은 라자리스트회 출신의 알렉산델 구베아 신부가 프란치스코 3회 회원신부로 입회하고, 북경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물론 조선은 아직 교구도 본당도 없이 북경 교구에 소속되어 북경교궁에서 관리하고 있을 때다. (구베아 주교의 북경교구장 재임기간,1782~1808).
그 시절 조선에서 북경을 가는 신자들이 북경에서 영세하고 오도록 강조하며, 청하여도, 북경교구에서는 허락할 수가 없었으니, 조선에는 천주교 신부가 1명도 없었고, 또 천주교 박해로 인하여 사제는 조선에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에, 혹시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조선인이 조선에 귀국하면, 조선에 사제가 없어서, 주일 미사참례도 못하므로, 주일미사를 궐하는 대죄만 범하게 되고, 사제가 없어서 고백성사도 받을 수가 없으므로, 대죄만 더욱 가중하여 중첩되므로 북경교구에서는 조선인 영세가 허락되지 않는 때였다.
그런데 교황청으로부터 수도회 해산명령을 받은 예수회 일부사제들 중에는,1784년 2월, 예수회 소속 사제로서 북경에 와서 식객 손님신부로 머물던 프랑스인 선교사 그라몽 신부가, 당시 북경 교구장 부재 중에 허락없이 조선인 이승훈 진사에게 세례를 주었으니, 이런 경우, 세례성사 거행은 부당한 거행이지만, 세례성사 자체만은 유효하기 때문에,뒤늦게 나중에서야 이를 알게 된 북경 교구청에서는 (Sacramentum illicitum, sed,validum), 더우기 구베아 주교의 진노와 엄명으로, 그라몽 신부에게 즉시, 북경교구 관할 밖으로 퇴출명을 내려, 마카오 교구로 내려와서 프랑스 신부들 사제관에만 머물면서, 죽을 때까지, 북경에도, 다른 지방 교구에도. 더우기, 또한, 자신이 영세준 이승훈 베드로의 눈부신 활동을 전해 듣고 애태우며 가보고싶어 하던 조선의 한양(현재의 서울에도) 방문도 모두 북경 교구 관할이라서 가보지 못하며 살다가, 마카오에서 한많은 일생을 마쳤다. 자신이 영세준 이승훈 베드로 진사의 고향 조선의 한양 방문을 애타게 그리워하고 갈망하며 추진하다가 선종하여, 그라몽 신부의 무덤은 아직까지 마카오에 있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