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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소리

WIND BELL

丁若鏞 글의 [權哲身寓居 走魚寺] 語意 이해와 意味

글 :  천진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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權哲身의 [寓居 走魚寺] 語意 이해와 意味 부여에 대한 견해- 정약용 선생 글의 참된 의미-

1. 走魚寺라는 단어는 丁若鏞의 權哲身 墓誌銘과 丁若銓 墓誌銘에서 꼭 한번씩 나오는 것이 전부로서, 현재까지 문헌상 기록은 丁若鏞의 글에서 2번 나오는 것이 전부입니다. 특히, 신빙성 있는 무게를 지닌, 다른 어떤 관변 기록에도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2. 그런데, 더구나 走魚寺에서 講學이 있었다는 기록은 위의 거기에도, 또 어디에도 없으며, 다만, 鹿菴이 [寓居走魚寺하던 그 시기에] 講學이 있었다는 문장 하나를 가지고 확대해석을 하고 있을 뿐 아니라, 나아가, 權哲身의 이름이 거론되는 簡札이나 墓誌銘 등에 나타나는 1768년 겨울, 1770년 여름, 1773년 겨울, 1777년 겨울, 1779년 겨울, 등의 강학을 모두 走魚寺에 가져다가 붙이는 것 뿐입니다. 권철신의 生長鄕이며, 書堂이 있던 楊根 葛山里에서 이루어진 일들을 모두 엉뚱하게 走魚寺에 끌어다가 붙이고 있는 것입니다.

2. 寓居라는 말은, 隱居나, 蟄居나, 同居나, 獨居나, 別居, 등에서 보듯이, [잠시 거한다]는 뜻으로, 居하는 기간과 시기를 표현할 뿐입니다. 그래서, 그 기간은 짧게는 몇 시간이나(여름 소나기 올 때 원두막에 寓居한 후), 몇일 간, 길어야 한 달 미만을 뜻하는데, 결국 녹암 공이 주어사에 寓居하던 시기를 말 할 뿐으로, 그 시기에 講學이 있었다고하여, 강학도 우거하던 주어사에서 하였다는 해석은 확대오류의 큰 잘못입니다. 녹암 공이 주어사에 잠시 거하던 시절에 강학은 그 주변의 天眞菴이나 鳳泰庵이나 日出庵이나 石伊庵이나 楊根 鑑湖나 葛山, 등에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寓居는 계속해서 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경우에는 칩거니, 은거니, 하는 표현을 쓰게 마련입니다.

3. 모든 기록은 현장 대조와 일치해야 하는데, 走魚寺 터의 狹小한 地形으로 보아, 선비들의 빈번한 장기적인 모임은 物理的으로 不可能한 곳임을 三尺童子라도 알만한 곳입니다. 특히, 氷泉은 北向溪谷에만 있는 것으로, 走魚寺 터처럼 東南向 계곡에는 없는 것입니다. 즉, 走魚寺에서는 적지 않은 선비들이 老少가 한데 모여서 수차 꽤 여러날씩 講學할만한 場所도, 居處도, 食水도, 生活用水도, 모두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곳입니다. 결국 해운당 대사 등, 面壁十年의 참선하는 高僧이나 道士 한두 분이 寓居할 수는 있어도, 꽤 여러 선비들이 모여 講學까지 할 수 있는 곳은 못됩니다.

4. 茶山은 천진암에서의 讀書處(오늘의 硏究所)나 豪士昔講讀, 등에서 보듯이, 아주 많은 기록을 남기며, 자신들의 母校처럼, 수차례, 심지어 늙어서까지도 찾아가 머물며, 추억의 詩文을 많이 남기고 있으나, 走魚寺에 대하여는 녹암이 우거하던 시기가 고작입니다. 사실 30여년 전에 천진암을 반대하기 위해서 출발하였던 성격이 강한, 走魚寺에 의미 부여나 중요시함은 매우 虛脫한 결론에 이를 수 밖에 없습니다. 走魚寺 기록이 너무 없고, 특히 당시의 實學과 天學에 관 기록에 있어, 가장 비중 높은 정약용 선생의 기록에 全無합니다.

5. 楊根 葛山이나 鑑湖가 走魚寺보다는 비할 수 없이 더 의미있는 곳으로, 특히 당시 權哲身과 權日身 같은 大學者들을 스승으로 섬기는 선비들이 嶺南(洪儒漢 子弟 洪樂質, 등)과 湖南, 등에서, 즉 전국에서 많이 모여들어, 勉學하던 학문의 전당이 있던 葛山은, 實學運動과 天學(=天主敎) 傳播에 매우 의미있는 곳이며, 더욱이, 乙巳年 迫害(1785년)와, 辛亥年 迫害(1791년),또 乙卯年 迫害(1795년)와, 辛酉年 迫害(1801년)의 피비린내 나는 박해 현장이기도 합니다. 특히, 權日身 형제들의 가옥을 불태워 버릴 정도로, 녹암공은 1791년부터 1801년까지 10년간 杜門不出하며 집밖에를 나오지 못할 정도였습니다(丁若鏞).

6. 최근 혹자들의 글을 보니, 이미 30여년 전, 논쟁하던 때의 최석우 신부님의 주장과 별다른 발전이 없는 내용들입니다. 그리고, 丁若鏞 선생이 15세로 결혼하던 丁酉年(1777년)에 천진암에 와서 스승이신 이벽 광암 공에게 결혼 인사차 지어 드린 詩文(다산전집 제1권 첫머리)부터 65세의 노구를 이끌고 丁亥年(1827년)에 와서 며칠씩 머물며 지은 저 많은 詩文들(제2권)을 아직 다 제대로 읽어보지 않은 것이 분명합니다.

7. 결론: 走魚寺는 한국천주교회 創立史 면에서나, 實學運動史 면에서나 그리 큰 의미를 발견할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러기에, 丁若鏞 선생도, 유배생활 前이나 後나, 走魚寺를 찾은 적이 전혀 없습니다. 남긴 기록도 全無합니다. 다만 천진암 성역화 위원회의 碩學들과 몇차례 의논한 적이 있었는데, 모두가 雪中李檗夜至 張燭談經의 광암 공 열성을 되새기는 순례자들을 위한 標石을 세우고자 한 적이 있습니다.

8. 또 천주공경가 제목 밑에 쓴 주어사 운운은 후대인들의 가필(최석우 신부)임이 분명하므로(당시 변기영 신부 공감 표명), 문헌고증학상 그리 중요시할 것이 못됩니다. 이는 마치, [始聞西敎見一券書,,,] 문장을, 대부분의 識者들이, [初聞西敎見一券書,,,]로, 확대 오해하던 것과 유사한 경우이니, "始務式, 始球式,,,등에서 보듯, "비로서, 맞이하여, 바야흐로, 당하여, 즈음하여,,,등"의 뜻을, 마치,"初行 길, 今時初聞, 初婚, 初面,,,등"에서 보는, 엉뚱한 뜻으로 확대오해하던 것과 유사한 경우라 하겠습니다.

-천진암 성지 변기영 몬시뇰 -
입력 : 2011.06.22 오전 12:0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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