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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들이 외치는 소리

Voice of Martyrs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ée

글 : Msgr. By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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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5월 6일, 서울, 여의도 5.16 광장에서 거행된 한국순교복자 103위의 시성식 광경.당시 언론과 보도기관에서는 100만여명으로 보도하였으나, 필자는 55만명~60여만명으로, 내한한 성청 인사들에게 보고 하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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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a Santità Giovanni Paolo II aveva concelebrato la messa per la canonizzazione dei 103 Beati martiri coreani, con molti Cardinali, Arcivescovi, Vescovi, sacerdoti e fedeli cattolici - circa 500.000 - a Seoul il 6 maggio 1984. Per quella canonizazione, il Rev. Byon, rettore di Chon Jin Am, il luogo natale della Chiesa, aveva servito per 5 anni (1980~1984) come segretario esecutivo generale della commissione episcopale per la canonizzazione dei 103 Beati Martiri coreani.(Photos by Baeck - Nam-Shick).

1983. 2. 26. 변기영 신부가 교황 알현 후, 103위 한국 순교복자 시성을 위한 기적심사 관면 전체 총회(Romana Rota)에서 심사 실무에 임한은  교황청 대법관15명과 함께 교황 접견실에서 기념사진 촬영에 함께 하였다(교황 바로 뒷줄 좌로 2번째).

Daveluy 주교의 한국순교자 비망기 머릿말 첫머리;
 
朝鮮天主敎會 殉敎者들의 歷史 집필 計劃
 
 
제목: 극동 또는 19세기 조선 왕국 주님의 증거자들 (혹은 그 어떤 제목도 좋음)
 
아직 제목은 정해지지 않았다. 책의 제명(題銘)은 Crux de Cruce로 한다. 십자가는 십자가에 의해 세워진다(는 뜻이다). 권두언으로는 Justorum animæ in manu Dei sunt(義人들의 영혼은 천주님의 손 안에 있도다.), 그리고 히브리서 11장 39절에 나오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 alii distenti sunt 등이 커다란 글씨로 자리잡는다. 헌정사는 포교성성 장관 추기경님께 바친다. 서론 부분에는 일본 전쟁(임진왜란) 시기의 몇몇 조선인 신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넣어야 하고, 조선에 천주교 서적들이 도입된 전말을 다루어야 하며, 끝에 가서는 생애 말년에 천주교를 처음 실천했고 분명 세례받지 못한 채, 李檗의 저 위대한 講學(les grandes conférences de Ni Pieki) 에 세상을 떠난 홍유한의 생애에 대해 몇 마디 언급을 해야 할 것이다.
 
일본 전쟁(임진왜란) 때의 천주교 신자들에 관한 역사는 이곳에 없으며, 프랑스에서 교회 역사 기록들 속에서 그 편린을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이곳의 신자들은 앵베르 주교로부터 들었다면서, 당시에 차부제품 또는 부제품까지 오른 조선인이 한 사람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전승이 어디서 온 것인지 찾아보아야 한다. 천주교 서적들이 조선에 도입된 전말은 매우 불분명하며, 그에 관해 내가 찾을 수 있었던 것은 거의 없다. 근거 자료가 있다면 아마 몇몇 외교인 집안의 오랜 문헌들에서 찾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 작업은 오랜 시간이 소요될 것이고, 신앙의 자유를 얻고 나서야 조금이라도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외교인들에게서 많은 문서를 빌리기가 불가능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의미의 (朝鮮天主敎會) 歷史는 李檗의 저 講學으로부터 시작된다(L'histoire proprement dite commence aux conférences de Ni Pieki,,,.) 그 이후의 일들에 대해서는 지극히 단편적으로만 알고 있으며, 우리 생각에, 이러한 공백들은 결코 메워지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탐구를 계속하고자 원한다면 조금씩 조금씩 무엇인가 얻게 될 것이다. 일부 명문 대가에서 소장하고 있는 문서들, 그리고 특히 형조의 고문서들 속에서 뒤져보면 될 것이다.
 
이 두 가지 원천은 지금으로서는 우리가 접근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간혹 가다가 어떤 작은 조각을 얻을 수 있는 일도 무척 힘이 드는 것이지만, 장차 언젠가 천주교가 허락되게 되면 끈기있고 총기있는 연구들로부터 커다란 성과를 기대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연구는 분명 섭리에 의해 우리 후계자들에게 맡겨져 있다. 우리는 순교자들의 역사에 이 나라 역사와 풍속에 관한 자료들을 끼워 넣으라는 재촉을 사람들로부터 많이 받았다. 고백하건대 우리는 이 부분을 잘 알지도 못할 뿐더러, 완전히 별도의 작업을 요하게 될 그러한 일을 수행할 시간도 수단도 우리에게는 없다. 한 나라의 풍속은 눈과 귀를 통해 익히는 것인데, 이 나라에서 배척 당하고 있는 우리의 처지, 그리고 언제나 시급한 사목 업무들로 인해 이 두 가지 감각을 사용할 수가 없는 형편이다. 지금처럼 갇혀 사는 처지에 우리가 직접 볼 수 있는 것은 거의 아무것도 없으며,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가운데에 우리에게 풍습이나 관례를 익히게 해 줄 수 있는 유식한 사람도 거의 없다. 게다가 우리가 천주교를 실천하는 백성들과 접촉하는 일도 항상 스쳐 지나가듯 남몰래 이루어진다. 그러니 한 나라에 대해 명확하고 분명한 생각을 이룬다는 것을 어찌 기대할 수 있겠는가? 중국과 그 이웃 나라들에 대해 옛날에도 최근에도 많은 글들이 씌어졌다. 그 저자들마다 많은 연구를 한 다음 선의를 가지고 글을 썼으리라고 우리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다만 오늘날 부분적으로 인정되고 있듯이 수많은 사실들이 그릇된 색깔로 칠해졌었음을 고백해야 한다. 우리 자신도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우리로 하여금 지극히 신중한 자세를 요구하고, 이 주제들에 대해 한 마디라도 꺼내는 것에 떨도록 만든다. 원한다면 순교사를 시작하기 전에 조선의 옛 왕조들과 그 분열에 대해, 그리고 현재의 문민 조직과 군사 조직에 대해 먼저 몇 마디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몇 쪽에 걸쳐 우리가 역대 임금들의 계보, 그리고 여러 고위직과 지방 수령직을 보여 주는 도표를 옮겨 놓은 것이 경우에 따라 무엇인가를 제공해 줄 수 있겠지만 그것은 매우 무미하고 건조한 것일 것이다. 우리가 풍속에 대해 몇 가지 사실들을 실로 묶은 종이에 적어 끼워놓은 것은 이용하라고 감히 말하지 못하겠다. 우리가 위험에 빠지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순교자들의 역사 끝부분에서는 내용을 간단히 몇 줄로 다시 요약하게 될 것이고, 마지막 문장은 책 전체를 요약하는 te martyrum candidatus laudat exercitus가 되어야 할 것이다.
 
진기한 자료들이 담긴 어떤 책을 읽어보면, 1631년 신미년에 북경에 사신으로 간 정두원이 Niouk Jean(Jean Luc?)이라는 이름의 97살 된 서양인을 보았는데, 아직도 건강하기 이를 데 없었고, 마치 신선들(노자를 따르는 종파에서 영생의 복을 누리는 자들) 가운데 하나인 듯 하였다고 한다. 그 사람은 분명 리치 신부의 동료들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그는 이 서양인으로부터 서양인이 만든 많은 학문 서적들, 그리고 권총, 망원경, 시계 등과 같은 진기한 물건들을 받았다.
 
이수(이수광?)는 호가 신풍으로 순교자 이 가롤로의 조상이며 조선 역사상 가장 유명한 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데, 자신의 글에서 리치 신부가 쓴 <천주실의>(천주에 대한 진정한 원칙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는 이 책을 분석하면서 동시에 교황이 지휘하는 천주교회의 체제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1720년 경자년에는 또한 이이명이 북경에 사신으로 가서 여러 선교사들을 만났으며, 천주교에 대해 이야기를 남기고 있다. 그는 천주를 섬기고자 개심하려는 우리의 방법이 유생들의 종교가 권하는 방법들과 꽤 유사하며, 천주교를 노자의 종파와 동류로 보아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 다음 그는 그리스도의 강생을 Foë(역자 주,불교?) 교리와 비교하고 있다.
 
호가 성호이고 이가환의 종조부인 이익도 자신의 글에서 천주교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천주교인들의 신(神)은 유생들의 상제(上帝)와 다를 바 없고 천당과 지옥은 Foë 교리에서 빌어온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또한 칠죄종을 이기기 위한 칠성덕을 다룬 책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이 집안의 회고록들 속에 기록되어 있는 바에 의하면, 천주교 서적들이 처음 도입된 것은 사신단이 일본에 갔다가 한 He에서 서양인들을 만나, 망원경과 다른 진기한 물건들과 함께 받아 가져왔다고 한다.
 
이름이 약용인 정 요한은 천주교가 조선에 알려진 것이 李檗의 저 講學(les conférences de Ni Pieki)이 있기 200여년 전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량이라고도 불리는 홍유한의 생애
 

<주: 본문 시작>
 
(朝鮮에 있어서 천주교의 起源에 관한 대부분의 사실을 우리가 얻어낸 자료들은 丁若鏞에 의해 수집된 것이다. 丁若鏞에 대해서는 자주 언급되는데, 그는 요한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고, 천주교에 관한 거의 모든 일에 처음부터 관계하였으며 거의 모든 천주교 지도자들과 인척이거나 친구 사이였다. 학문과 관직에 있어 뛰어난 인물이었으나 천주교를 저버리는 나약함을 보였음에도 1801년 유배를 면치 못했다. 수년 후에 赦免을 받고,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면서 신심행위와 모범적인 苦行의 실천에 오랫 동안 온 힘을 기울였으며, 지극히 천주교신자다운 모습을 보이며 죽었다. 한 편으로 그는 天主敎에 관한 몇 가지 글을 남겼는데, 우리가 한 일은 대단히 잘 쓰여진, 그러나 애석하게도 너무나 짧은 그의 기록들을 단지 옮겨 엮은 것에 불과할 뿐이다.)
朝鮮王國에 天主敎를 胎動시키기 위해 하느님께서 사용하신 도구는 字를 德祖라 하고 號를 曠菴이라 하는 李檗이었다. 李檗은 慶州 李씨로, 高麗朝 때부터 이미 지위가 높았던 그의 조상들 가운데에는 학문이나 벼슬로 뛰어난 사람들이 여럿이었다. 그의 家門은 증조부 이후로 武官職에 종사하였고, 이 새로운 부문에서 중요한 직책들을 맡아오고 있었다. 檗은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많은 資質을 갖추고 태어났다. 그가 어렸을 때부터 부친은 武官 벼슬을 얻는 데 필요한 활쏘기, 말타기 등의 훈련을 시키고자 하였으나 檗은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하지 않겠다고 말할 정도로 끈질기게 거부하였다. 이 일로 그는 부친의 애정을 잃었고, 부친은 지나치게 고집이 센 그의 성격을 가리키는 ‘벽’이라는 이름으로 그를 불렀다. 자라면서 檗은 힘이 세고 체구가 건장해졌다. 키가 8척에, 한 손으로 백 근을 들어올릴 수 있을 정도였다. 활달하고 잘 생긴 그의 風采는 당당하였고 당연히 모든 사람의 시선을 끌게 되었다. 그의 재주도 이처럼 뛰어난 外樣에 지지 않을 정도여서, 유창한 言辯은 도도한 강물의 흐름에 견줄 만하였고, 모든 면에서 월등한 智力을 타고난 그는 오직 事物의 理致와 學說의 참된 토대만을 추구하였다. 언제나 事物의 根本을 파고드는 데 몰두하였으며, 어렸을 때부터 經典을 공부함에 있어 그 깊은 뜻을 파악하려고 애썼다.
이처럼 좋은 소질은 개인적으로는 빛나는 미래를 그에게 보장하고 있었다. 그는 일찍부터 당대의 가장 유명한 학자들이 쓴 책을 연구하는 데 몰두하였고, 자신의 일에 성공을 기하기 위하여 학문에 있어 자신을 도와주고 이끌어주고자 하는 모든 지식인들과 交分을 맺고자 노력하였다. 그는 관습이나 예의에 거의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고귀하고 고상한 느낌을 주었고, 그러면서도 농담을 좋아하였으며, 직업적인 학자들을 구별시켜주는 벼슬을 한 번도 한 일이 없었다.
이상이 당시 자료들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李檗의 모습이다.
때는 1777년(丁酉年), 유명한 학자 權哲身이 丁若銓과 학문을 사랑하는 다른 여러 학구적인 양반들과 함께 심오한 학문연구를 위하여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거기에만 몰두하고자 어떤 절(pagode)에 들어갔다. 이 사실을 알게된 李檗은 기쁨으로 가득찼고, 그 뛰어난 사람들의 가르침을 누릴 수 있으리라 기꺼워하며 즉시 그들을 찾아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때는 겨울이었다. 도처의 길은 눈에 덮여있었고, 거리는 백 리도 더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난관들이 학문과 지혜를 그토록 갈망하는 열렬한 마음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그는 바로 길을 떠났고, 험난한 길들을 나아가면서도 피로를 느끼지 않았다. 지는 해도 그가 열망을 실현시키는 것을 늦추게 할 수는 없었으며, 그는 밤길을 계속하여 마침내 자정 무렵에 한 절(pagode)에 다다랐다. 그러나 자신이 절(pagode)을 잘못 찾아왔고 산너머 반대편으로 가야함을 알았을 때 그가 얼마나 낙담했겠는가! 하지만 그는 용기를 잃지 않고 다시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밤중에 넘어야 할 산은 거대한 산이었고, 눈더미에 덮여있었으며, 수많은 호랑이가 접근을 막고 있었다. 그래도 상관없다! 檗은 모든 승려들을 깨워 자신과 동행하게 하였다. 맹수의 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손에는 쇠를 박은 몽둥이를 들고 길을 계속하여, 짙은 어둠을 뚫고 마침내 그토록 바라던 곳에 도착하였다.
이토록 奇異한 도착은 첩첩 산 중의 한 중심(dans le sein des montagnes)에 외따로 떨어져 있으면서(isolé) 폐허가 되어 못쓰는(perdu) 건물(édifice)에 居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어떤 연유로 그렇게 많은 손님들이 때아닌 시각에 찾아왔는지 상상할 수 없었다.
 
(卞基榮 神父 註:단어 풀이:l'édifice isolé et perdu: 외따로 동떨어져 있고, 폐허가 되어 쓰지 않는 凶家나 廢刹을 의미한다. 講學 당시 天眞菴은 鶯子山 서북쪽 한 중심 계곡에 하나밖에 없는 쓰지 않는 건물이었다는 뜻이다. 폐허가 되어 못쓰는 건물에 권철신 같은 대학자가 寓居한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鶯子山 동남쪽에는 불과 몇백 미터 간격으로 走魚寺, 樊魚寺, 鳳台庵, 日出庵, 石伊庵, 등이 있었으므로, “calme혹은 tranquille” 즉 “고요하고 적막한 절간”이라고 부를 수는 있어도, “외따로 동떨어져 있고, 폐허가 되어 못쓰는 건물”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곧 모든 것이 밝혀지자 기쁨과 환희가 두려움의 뒤를 이었으며, 그토록 즐거운 만남으로 인해 이야기꽃을 피우느라 이미 날이 새고 있는 것도 모를 지경이었다. 이 모임은 열흘이 넘게 계속되었는데, 하늘과 세상과 인간본성 등에 관한 모든 문제들이 깊이 다루어졌고, 모든 의문점들과 先賢들의 의견이 논의되었다. 그 위에 偉人들의 倫理經典들에 대한 硏究와 講學(les études et conférences)이 이루어졌고, 유럽사람이 漢文으로 쓴 철학서적과 수학서적 몇 권을 검토하기에 이르렀는데, 이 책들을 깊이 연구하매 온갖 정성을 다 기울였다. 마침내 연구와 토론은 그리스도교에 관한 몇 권의 초보적인 서적에까지(이 책들은 어디서 온 것이었을까?) 미치게 되었다. 이 서적들이 어디서 온 것인지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 당시 그들은 하느님의 존재와 攝理, 영혼의 靈性과 不滅性, 七罪宗을 그에 상대되는 일곱가지 德으로 물리치는 修行法 등을 다룬 몇 권의 槪論書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中國經典들의 막연하고 모호한 학설에 익숙해있었어도 眞理를 渴望하던 그 곧은 사람들은 우리 聖敎의 기초원리를 검토하자마자 그 敎理에 담긴 위대하고 아름답고 확실한 모든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책이 없었으므로 이 교리를 더이상 깊이 연구할 수는 없었지만 그들의 마음은 즉시 감동되었고 신앙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이렇듯 眞理는 언제나 그 標識를 同伴하는 것이 사실이다. 언제나 진리의 빛은 이를 찾는 모든 이들의 눈에 빛나고, 곧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진리가 행복의 싹처럼 심어주는 느낌에 무감각할 수 없는 법이다. (자기 나라에서 학문에 가장 앞서가는 사람들이 진리를 알게된 것을 보자니 얼마나 아름답고 흐뭇한가!) 이리하여 지혜를 추구하던 우리 주인공들은 聖敎에 젖어들게 되었고, 그 명확한 원리에 매료되었다. 그들은 聖敎의 모든 戒律을 즉시 실천에 옮기기를 바랐겠지만, 당시 가지고 있던 책들이 그들을 지도하기에는 충분하지 못하였으므로, 매일 아침 저녁 엎드려 黙想에 잠기는 것으로 만족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7일마다 하루씩 天主께 바쳐진 날이 있다는 것을 어디선가 보아 알게 되자, 매달 7일, 14일, 21일, 28일 모든 세상일을 중단하고, 영혼 수련에 대해 생각하면서 小齋를 지켰다. 그들이 이러한 수련을 얼마동안이나 지속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다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극비리에 이를 행하였다. 그런데 뒤이은 사실들에 비추어볼 때 적어도 그들중 대부분은 이를 오래 지키지는 못한 듯하다.
 
檗의 열렬한 마음에 풍요로운 씨앗이 심어졌다. 이러한 시작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그는 느끼고 있었고, 그의 모든 생각과 시선은 시작된 과업을 완수하는 데 필요한 책들을 구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던 中國을 향해 있었다. 이러한 조바심 가운데 몇 년이 흘렀고, 그가 목표에 다다르기 위해 바친 노력에 관해서는 우리에게 알려진 바가 없다. 1783년 초여름, 4월 보름날, 누이의 忌日을 맞아 마재 丁씨네에 갔다가 한양으로 돌아오는 길에, 檗은 丁氏 두 형제 若銓, 若鏞과 함께 배에 올랐다. 한양까지 오는 동안 그들의 주된 관심은 여전히 철학적 대화와 연구였다. 조선의 책 몇 권을 검토한 다음, 그들의 정신은 서양인들의 學說에 이르렀다. 그들은 天地와 인간의 창조, 영혼의 靈性과 不滅性, 그리고 來世에 천당과 지옥에서 받는 賞罰 등의 道理에 대해 차례로 자세히 토론하였다. 모든 사람이 이 道理의 참됨을 인정하고 믿게 되었으며, 그토록 아름답고 기분좋은 진리를 처음 듣는 여행객들도 모두 놀라고 기뻐하였다. 그 무렵에 이런 토론모임이 되풀이 있었으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고, 또 檗의 끓는 열정이 휴식을 취하지 않았을 터이지만, 상세한 내용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확실한 사실은, 당시 조선에 들어와 있던 西學 서적들에 대해서, 그리고 또한 천주교에 관한 몇 권의 서적들에 대해서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보았거나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그런 책들에 관심을 갖는 것이 유행이었는데, 문헌들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조선인들은 北京에 연례적으로 가던 사절단을 통해 중국과 교류를 하면서 새로운 학문에 접할 기회가 자주 있었던 것이다. 이로 미루어 천주교 敎理의 초보적 개념들이 널리 유포되어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당시의 서적들은 聖敎를 자세히 소개하는 것은 아니었다.)
 
진지한 마음으로 天主를 찾는 사람들을 결코 저버리지 않는 天主께서는 그해를 곧은 영혼들의 소원이 이루어지도록 허락하는 해로 삼으셨다. 그해 1783년 겨울 李東郁이 北京 朝廷에 가는 書狀官으로 임명되었고, 아들 李承薰도 따라가게 되었다. 장차 여러 해에 걸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될 이 대단한 인물에 대해 소개할 시점이 지금이다. 李承薰은 字가 子述이고, 平昌 李氏 양반 가문 출신으로, 조상들은 文官의 要職을 자주 맡았었으며, 그의 家門은 높은 평판을 얻고 있었다. 1756년(丙子年)에 태어난 李承薰은 열 살때부터 문장에 재능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고, 열아홉, 스무 살에는 벌써 온 나라에 뛰어난 학자로서 명성을 떨쳤다. 옛 聖賢들의 뒤를 따르고자 했던 李承薰은 학문과 品行이 더 나은 사람들과 교제하였으며, 學識을 높이는 일 뿐 아니라 品性을 가다듬는 데에도 애를 썼다. 李檗과도 아는 사이였지만 취향이나 성품이나 공부의 차이로 인해 아주 가까운 사이로 지내지는 못하였다. 25세 되던 1780년(庚子年)에 進士가 되었고, 모든 사람들이 그를 주목하는 바가 되었다. 李檗은 承薰이 北京使節團에 아버지를 따라가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매우 기뻐하며 즉시 承薰을 찾아갔다.
 
당시의 자료에 의하면 그는 李承薰에게 이런 주목할 만한 말을 하였다고 한다. “자네가 北京에 다녀오게 된 것은 참된 道理를 알도록 하늘이 우리에게 주시는 절호의 기회일세. 萬物의 創造主이신 上帝를 恭敬하는 데 대한, 그리고 여러 聖人들에 대한 道理는 西歐人들이 가장 높은 경지에 이르러 있네. 이 道理 없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네. 心性을 바로잡을 수도 없고, 事物의 원리를 깊이 알 수도 없네. 그것이 아니면 임금과 백성의 여러 가지 의무를 어찌 알겠는가? 그것 없이 생활의 원칙도 없고, 天地의 창조, 天體의 물리적 질서와 규칙적 運行, 兩極의 질서 등을 우리가 알지 못하네. 天使와 惡靈의 구별, 세상의 始初와 終末, 靈肉의 결합, 善惡의 理致, 죄를 赦하기 위한 天主聖子의 降生, 善人에 대한 천당 報償과 惡人에 대한 地獄罰 등 이러한 모든 것을 우리가 전혀 알 수 없다네.” 천주교 서적을 아직 보지 못했던 李承薰은 이러한 말에 크게 놀라고 감탄하면서 그런 책을 몇 권 보자고 하였다. 그는 천주의 존재와 標徵에 대한 초보서적들과 <七克>을 훑어보고 난 뒤, 행복감에 사로잡혀 기쁨을 억누르지 못하면서 檗에게 무엇을 해야 할 지 물었다. 檗은 承薰에게 이렇게 말을 계속하였다. “자네가 北京에 가게 되었음은 天主께서 우리나라를 불쌍히 여기시면서 구원하고자 하심을 나타내는 표시일세. 도착하거든 바로 天主堂을 찾아가 서양 선비들과 상의하여, 모든 것에 대해 물어보고, 그들과 함께 교리를 깊이 연구하여 천주교 실천에 대한 모든 것을 상세히 알아오며, 필요한 책들을 가지고 오게. 生死에 관한, 즉 來世에 관한 莫重之事가 자네 손에 달려있으니, 가서도 가벼이 행동해서는 아니 되네.” 承薰은 가슴 깊이 파고드는 이러한 말을 열심히 새겨들었고, 이를 大道師, 스승의 말씀(la parole du Maître)처럼 받아들였으며, 공동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 할 것을 약속하였다. 檗이 한 말을 살펴보면, 檗은 서양학문과 천주교에 똑같이 목말라하고 있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많지 않은 말 속에서도, 그의 智力은 이미 천주교를 세계와 사회의 토대로 이해했음을 엿볼 수 있으며, 이번 일이 그에게는 오직 唯一無二하게 긴요한 일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것은, 그가 곧 시작하게 될 大業, 즉 처음으로 천주교의 씨앗을 전파하는 大業을 위하여 天主의 恩寵이 이 사람을 이미 준비시키신 것이다.계속<번역:김형래 교수
 
(卞基榮 神父 註:단어 풀이:프랑스어 원문에 나오는 “Maître”라는 말은 영어(master), 프랑스어(maître), 이태리어(maestro), 등에서, “스승”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원문의 la parole du Maître 와 같이, 첫 글자를 大文字로 쓰게 되면 일반적 의미의 “스승”이라는 뜻이 아니라, 孔子, 孟子, 예수, 釋迦牟尼, 소크라테스, 같은 인류의 위대한 大聖賢君子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승훈 선생이 이벽선생의 말씀을 大聖賢의 권위있는 말씀으로 받아들였다는 뜻이다. )
Daveluy 주교의 朝鮮殉敎史 備忘錄 序文의 위 우리말 번역문(김형래 교수 번역문)의 原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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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ée
vol 4 (pp. 5 - 29)
(Les documents dans lesquels nous avons puisé la plupart des faits relatifs aux origines de la religion en Corée ont été réunis par Tieng Jak iong dont il est parlé souvent. Il fut nommé Jean au baptême. Il eut part à presque toutes les affaires de la religion ab initio et était parent ou ami de presque tous les principaux chefs. Homme distingué dans les lettres et les charges publiques, il eut la faiblesse d'abandonner la Religion, ce qui ne lui évita pas l'exil en 1801. Gracié plusieurs années après, il pratiqua avec ferveur, se livra longtemps à tous les exercices de la piété et d'une grande mortification exemplaire et mourut fort chrétiennement. Il a laissé en outre quelques écrits religieux. Nous n'avons fait que copier et relier ces notes malheureusement trop brièves, mais fort bien écrites.)
L'instrument dont Dieu se servit pour donner le premier branle à la Religion dans le royaume de Corée fut Ni Pieki appelé Tektso et surnommé par lui-même Koang am. Pieki descendait de la famille des Ni des Kieng Tsiou et parmi ses ancêtres qui étaient déjà dans les dignités sous la dynastie Korie on comptait plusieurs membres distingués dans les lettres et par les dignités civiles qu'ils avaient obtenues. Depuis trois générations cette famille s'était livré aux exercices militaires et avait occupé des charges importantes dans cette nouvelle carrière. Pieki naquit doué de mille belles qualités du corps et de l'esprit. Dès l'enfance son père voulut l'appliquer aux exercices de l'arc, de l'équitation et autres qui puissent lui faire obtenir les degrés militaires; mais celui-ci s'y refusa constamment au point de dire que dut-il mourir il ne s'y livrerait pas. De là il perdit en partie l'affection de son père qui l'appela Pieki voulant par là désigner son caractère trop attaché à ses idées. En grandissant Pieki devint d'une force et d'une stature énorme. Il avait une taille de huit pieds et d'une seule main pouvait enlever cent livres. Large et bien fait, son extérieur était imposant et attirait naturellement tous les regards. Ses talents ne le cédaient pas à un extérieur si avantageux. Sa facilité de parole pouvait se comparer à l'écoulement majestueux d'un fleuve et doué d'une intelligence supérieure en tout il ne cherchait que la raison des choses et les vrais fondements de la doctrine. Partout il s'occupait à pénétrer le fond des choses et dans l'études des livres sacrés du pays, dès sa jeunesse, il s'efforçait d'en saisir les sens profonds.
De si heureuses dispositions lui permettaient personnellement un avenir brillant. Il se livra de bonne heure à l'étude des livres des plus fameux docteurs de ce temps et pour assurer le succès de ses travaux il chercha à se lier avec tous les gens instruits qui voulaient l'aider et le diriger dans la science. Se souciant peu des usages et de l'étiquette, il avait quelque chose de grand et élevé, mais aimait les paroles plaisantes, il n'eut jamais la noble dignité qui distingue les docteurs de profession(hak tsia). Tel nous est représenté Pieki par les documents du temps.
C'était en l'année 1777(tieng iou). Le fameux docteur Kouen T'siel sini, accompagné de Tieng Jak Tsieni et plusieurs autres nobles studieux et amateurs de la science, se rendit dans une pagode pour s'y livrer ensemble à des études profondes. Ni Pieki l'ayant appris en fut rempli de joie et heureux de pouvoir profiter des leçons de ces hommes remarquables il prend de suite son parti d'aller les trouver. C'était l'hiver. La neige couvrait partout les routes et la distance était de plus de cent lys: mais de pareils obstacles étaient loin de pouvoir arrêter ce cœur ardent et si avide de la science et de la sagesse. Il part de suite et à travers ces chemins difficiles et ardus il ne sent pas la fatigue. Le jour tombant ne peut le déterminer à retarder la réalisation de ses désirs et continuant sa route de nuit il parvient enfin à une pagode vers minuit. Quel n'est pas son désappointement en apprenant qu'il s'est trompé de pagode et qu'il fallait aller de l'autre côté de la montagne. Sans se décourager il pousse sa pointe. C'est une énorme montagne qu'il faut franchir de nuit. Elle est couverte de monceaux de neige et des tigres nombreux en défendent les abords. N'importe! Pieki fait lever tous les bonzes et se fait accompagner par eux. A la main il prend un bâton ferré pour se défendre des attaques des sauvages ennemis et poursuivant sa route à travers les épaisses ténèbres, il arriva enfin au lieu si désiré.
Une arrivée si étrange répandit la frayeur parmi les habitants de cet édifice isolé et perdu dans le sein des montagnes.
On ne pouvait se figurer quel motif amener à une heure si indue des hôtes si nombreux: mais bientôt tout s'étant éclairci, la joie le bonheur succédèrent à la crainte et dans les épanchements suggérés par une rencontre si heureuse on s'apperçut à peine que déjà le jour avait point. Pendant plus de dix jours que dura cette réunion, on approfondit toutes les questions sur le ciel, le monde, la nature humaine etc., tous les doutes et les opinions des anciens furent mis sur le tapis. De là on étudia les livres de morale des grands hommes; puis on en vint à examiner quelques livres philosophiques et mathématiques composés en chinois par les Européens, et on mit tout le soin possible à les approfondir. Enfin les études et conférences se portèrent sur quelques livres élémentaires (D'où venaient ces livres?) du christianisme. On ne sait au juste d'où ces livres étaient venus. Ils avaient seulement alors entre les mains quelques traités sur l'existence et la providence de Dieu, sur la spiritualité et l'immortalité de l'âme et sur la manière de régler ses mœurs en combattant les sept vices capitaux par les vertus contraires. Accoutumés aux doctrines obscures et confuses des livres chinois, ces hommes droits désireux de la vérité n'eurent pas plutôt examiné les fondements de notre Sainte Religion qu'ils entrevirent tout ce qu'il y a de grand, de beau et de palpable dans cette doctrine; et sans pouvoir l'approfondir davantage, faute de livres, leurs cœurs furent aussitôt émus et leurs yeux s'ouvrirent à la Foi. Tant il est vrai que la vérité porte toujours avec soi son cachet. Sa lumière brille toujours aux yeux de tous ceux qui la cherchent et tout cœur droit ne peut rester insensible aux impressions qu'elle dépose comme un germe de bonheur. (Qu'il est beau et consolant de voir ces hommes qui dans leur pays marchaient à la tête de la science, parvenus à la connaissance de la vérité) Voilà donc nos amateurs de la sagesse imbus de la Religion et subjugués par l'évidence de ses fondements. Ils eussent désiré se mettre de suite à la pratique de toutes ses règles: mais les livres qu'ils avaient entre les mains ne suffisant pas pour les diriger, ils durent se contenter de se prosterner tous les jours matin et soir pour se livrer à la méditation. Puis ayant vu quelque part qu'il y avait de sept en sept jours un jour consacré au Seigneur, tous les 7, 14, 21, 28 du mois ils cessaient toute affaire du monde pour penser aux exercices de l'âme et y faisaient abstinence. On ignore combien de temps ils continuèrent ces exercices, mais ils les faisaient dans le plus grand secret sans en parler à aucun autre et il est probable par la suite des faits que la plupart du moins n'y furent longtemps exacts.
Le cœur ardent de Pieki avait reçu un germe fécond. Il sentait combien ce commencement était peu de chose, et toutes ses pensées et toutes ses vues se portaient vers la Chine où il espérait trouver les livres nécessaires pour compléter l'œuvre commencée. Plusieurs années se passèrent dans cette anxiété et les efforts qu'il fit pour parvenir à son but ne nous sont pas parvenus. Au commencement de l'été 1783, 15 de la 4ème lune trici mio, après avoir été à Matsai dans la famille Tieng, pour l'anniversaire de la mort de sa sœur, il monta sur un bateau avec les deux frères Tieng, Jak tsion et Jak iong pour se rendre à la capitale. Pendant le trajet les conversations et études philosophiques furent encore leur occupation. Après avoir étudié quelques livres du pays, les esprits se portèrent sur la doctrine des Européens. Ils discutèrent au long et en détail des dogmes de la création du ciel, de la terre et de l'homme, puis de la spiritualité et de l'immortalité de l'âme et des peines et récompenses dans le ciel et l'enfer au siècle futur. Tous convinrent de la vérité de ces dogmes et y ajoutaient foi, et tous les passagers qui entendaient pour la première fois ces vérités si belles et si consolantes en étaient tout hors d'eux-mêmes et saisis de joie. Il n'est pas douteux que de pareilles conférences ne se soient renouvelées souvent vers ces époques, et l'ardeur bouillante de Pieki ne sera pas restée dans le repos, mais les détails ne nous en sont pas parvenus. (Ce qui est certain, c'est qu'alors la plupart des gens instruits avaient vu ou entendu parler des livres de science des Européens, et souvent aussi des quelques livres de Religion qui étaient dans le royaume. C'était à la mode de s'en occuper et on remarque que dans les compositions littéraires que chaque année lors de l'ambassade à Péking les Coréens échangeant avec les Chinois on faisait souvent allusion à ces nouvelles sciences. On peut juger par là de la publicité qu'eurent ces premières notions du christianisme, mais les livres alors existant ne donnaient pas la religion en détails.)
Dieu qui n'abandonne jamais ceux qui le cherchent dans la sincérité de leur cœur avait fixé cette année pour permettre la réalisation des vœux de quelques âmes droites. Ce même hiver 1783 Ni Tong ouki fut nommé troisième ambassadeur à la cour de Péking, et son fils Sieng houni devait l'y suivre. C'est ici le lieu de faire connaître cet homme remarquable qui pendant quelques années va jouer un rôle si important dans cette histoire. Ni Sieng houni appelé aussi Tsa siouri était de la noble famille des Ni de Pieng t'sang. Ses ancêtres remplirent souvent des charges assez importantes parmi les mandarins civils et sa maison jouissait d'une haute réputation. Il naquit en 1756(année Pieng tsa). Dès l'âge de dix ans il passait pour capable dans les lettres et à peine fut-il arrivé à 19 ou 20 qu'il avait dans tout le royaume la réputation de lettré distingué. Voulant marcher sur les traces des saints de ce pays, il se lia avec ce qu'il y avait de plus distingué par la science et la conduite et s'appliquait autant à régler ses mœurs qu'à se perfectionner dans les lettres. Il fit aussi connaissance avec Ni Pieki, et toutefois la diversité de leurs goûts, caractères et études ne leur permit pas de vivre dans l'intimité. A l'âge de 25 ans en l'année 1780(kieng tsa) il obtint le premier degré de bachelier appelé Tsin sa, et de toute part les regards se portaient sur lui. Ni Pieki ayant appris que Sieng houni devait suivre son père à l'ambassade de Péking fut comblé de joie et alla de suite le trouver.
Voici d'après les monuments de l'époque le discours remarquable qu'il lui tint: "Ton voyage à Péking est une occasion admirable que le Ciel nous fournit de connaître la vraie doctrine. La doctrine des saints, du service de l'Empereur Suprême Créateur de toutes choses est au plus haut degré chez les Européens. Sans cette doctrine nous ne pouvons rien. Sans elle on ne peut se régler le cœur et le caractère. Sans elle nous ne pouvons approfondir les principes des choses. Sans elle comment connaître les différents devoirs des rois et du peuple? Sans elle point de règle fondamentale de la vie; sans elle la création du ciel et de la terre, l'ordre physique des astres, leurs cours et révolutions régulières, l'ordre des pôles, etc. ne nous sont pas connus. La distinction des bons et mauvais esprits, l'origine et la fin de ce monde, l'union de l'esprit et du corps, la raison du bien et du mal, l'Incarnation du fils de Dieu pour la rémission des péchés, la récompense des bons dans le ciel et la punition des méchants dans l'enfer, etc. etc. etc. Sans la doctrine des Européens tout cela nous reste entièrement inconnu." A ces mots Seng houni qui n'avait pas encore vu les livres de religion fut ému de surprise et d'admiration. Il demande à voir quelqu'un de ces livres et ayant parcouru les traités de l'existence et des attributs de Dieu et le livre des sept vices capitaux combattus par sept vertus contraires, il fut ravi de bonheur et ne possédant pas de joie il demande à Pieki ce qu'il y avait à faire. Pieki continue en lui disant: "Puisque tu vas à Péking, c'est une marque que le Dieu Suprême a pitié de notre pays et veut le sauver. En descendant de voiture va de suite au temple du maître du Ciel, confère avec les docteurs européens, interroge-les sur tout, approfondis avec eux la doctrine, informe-toi en détails de toute la pratique de la Religion et apporte-nous les livres nécessaires. Va, la grande affaire de la vie et de la mort, la grande affaire de l'Eternité est entre tes mains. Va et surtout n'agis pas légèrement." Seng houni écouta d'un air soumis ces paroles de Pieki qui le pénétraient profondément et les recevant comme la parole du Maître, il promit de faire tous ses efforts pour réaliser leurs communs désirs. En considérant le discours de Pieki il est facile de voir qu'il était également altéré de la soif des sciences et de la Religion, et le peu de mots qu'il prononça montrent que son intelligence avait déjà compris la Religion comme la base du monde et des sociétés. On voit que cette grande affaire était devenue pour lui la seule, l'unique nécessaire. C'est aussi que la grâce préparait déjà cet homme à la grande œuvre qu'il allait bientôt commencer en propageant le premier la semence de la Religion.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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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09.30 오후 8:4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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