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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천주교회 창립사

Church history in Korea

천학당, 모교,始聞西敎,,DISCORSO DEL SANTO PADRE FRANCESCO AGLI ECC.MI PRESULI DELLA CONFERENZA EPISCOPALE DI COREA IN VISITA "AD LIMINA APOSTOLORUM"

& 천진암은 천학당으로 한국천주교회 창립성조들의 모교 !, 始聞西敎 見一卷書의 의미

글 : Msgr. By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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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기영 몬시뇰이 [사랑방]을 열었습니다.  
사랑방 윗묵 구석 구석에 쳐박아두었던 보따리들을 이것저것 내다가 풀어서  
교회와 사회에 혹시라도 도움이 될 것들은 죽기 전 알리려 합니다. [사랑방 출입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2012. 5. 16.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 야외 제단에서, 변기영 몬시뇰이 교황 베네딕도 16세를 알현! 교황께서는 80여세 고령에도 13일간의 남미 순방을 마치시고, 로마까지 14시간에 걸친 비행기 직행하여 돌아오신 바로 다음날, 여독으로 몹시 피로하신데도 불고하시고, 대주교 시절부터 이미 모르지 않으신 변기영 몬시뇰의 손을 잡고 무척 기뻐하시며 환대하셨다.
  ***********************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사도좌를 방문한(Ad Limina) 한국 주교들에게 하신 연설문
<2015. 03. 12. 바티칸에서>.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께서 사도좌를 방문한 한국 주교들에게 하신 연설에서, 최초의 한국 천주교 신자들, 즉 이벽, 이승훈, 권철신, 권일신, 정약종, 등 신앙의 1세대 신앙공동체가 세례, 견진, 성체, 등의 성사를 받기 전부터, 마치 사도시대에서처럼, 이미 얼마나 거룩한 신앙생활과 신앙활동을 하였으며, 마침내는 목숨까지 바쳤는지를 강조하셨습니다. -Msgr. Byon- 
 
<이하는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께서 사도좌를 방문한(Ad Limina) 한국 주교들에게 하신 연설문의 한국어,이태리어,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전문입니다> 
 
<한국어> 
 
사랑하는 형제주교 여러분,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의 묘소를 참배하고 우리를 일치시키는 우의와 친교의 결속을 강화하고자 사도좌를 방문하신 여러분을 맞이하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이 날들이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한 여러분의 봉사에 은총과 쇄신의 기회가 되기를 빕니다. 
 
저는 여러분과 한국과 몽골 교회 전체를 대표하여 따뜻한 인사 말씀을 해 주신 김희중 대주교님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여러분을 뵙게 되니 지난번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의 좋은 기억들이 떠오릅니다. 저는 그때 저를 매우 따뜻하게 맞이하고 자신의 삶의 기쁨과 슬픔을 저와 함께 나눈 한국인들의 선함을 직접 느낄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나라를 방문한 일은 보편 교회를 위한 저의 직무에 언제나 힘이 되어줄 것입니다. 
 
한국방문 기간에 우리는 한국의 교회생활, 특히 하느님의 백성과 사회에 봉사하는 우리의 주교직무에 관하여 성찰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저의 한국 방문의 세 측면을 강조하면서 오늘 그 성찰을 여러분과 함께 이어나가고자 합니다. 그 세측면은 기억과 젊은이, 그리고 우리 형제자매들의 믿음을 굳건하게 해주는 사명입니다. 저는 이 성찰을 몽골 교회와도 나누고 싶습니다. 비록 광활한 지역 안에 있는 작은 공동체이지만 이는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약속하는 작은 겨자씨와 같습니다(마태 13,31-32 참조). 이러한 성찰이 그 씨앗을 계속 키우고 몽골사람들의 신앙의 비옥한 토양에 자양분이 되기를 빕니다.
 
저의 한국 방문 때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들 가운데 하나는 윤지충과 동료 순교자들의 시복이었습니다. 그분들을 복자품에 올리면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한국 교회의 태동기에 내려 주신 셀 수 없는 은총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며, 그러한 하느님의 은사에 대한 충실한 응답에도 감사하였습니다. 한국의 첫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신앙을 교회의 성사생활로 온전히 나타내기 전부터 이미 예수님과 인격적 관계를 이루어 나아갔을 뿐만 아니라, 계급과 사회적 지위를 막론하고, 예수님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며 주님의 첫 제자들처럼 신앙과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습니다(사도 4,32 참조). “그들은 엄청난 희생을 치를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에게서 그들을 멀어지게 할 수 있는 그 어떤것도 …… 포기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 한 분만이 그들의 진정한 보화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 미사 강론, 2014.8.16.).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그들의 사랑은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바치는 궁극적인 행동으로 완성되어 그들의 피가 교회 못자리의 물이 되었습니다.
 
그 첫 공동체는 여러분과 교회 전체에 그리스도인 삶의 아름다운 증언을 남겼습니다. 그것은 바로 “진리를 찾는 올곧은 마음, 그들이 신봉하고자 선택한 종교의 고귀한 원칙들에 대한 충실성, 그리고 그들이 증언한 애덕과 모든이를 향한 연대성”(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 미사 강론, 2014.8.16.)입니다. 그들의 모범은 우리를 만남과 자선과 희생으로 초대하여 더욱 충실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만들 수 있는 학교입니다. 그들이 가르쳐 준 교훈은, 기술과 통신에서 이루어진 많은 발전에도 개인들이 더욱 고립되고 공동체가 무기력해지는 우리 시대에 특별히 적용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교구의 신부와 수도자와 평신도들과 함께 여러분이 본당과 학교와 사도직 시설들을 참다운 만남의 자리로 만드는 노력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이는 우리에게 사랑하는 법을 가르치시고 모든 인간의 존엄에 눈을 뜨도록 해 주시는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서로 만나게 해주십니다. 또한 이는 다른 이들과 만남, 특히 가난한 이, 노인, 우리 가운데 잊힌 이들과 만남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고 우리에 대한 그분의 자비를 체험하면 우리는 그분의 구원의 힘을 더욱 더 확신하는 증인이 됩니다. 곧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우리가 받은 은사를 더욱 잘 나누게 됩니다. 우리는 사랑안에서 하느님과 서로에게 바치는 산 제물이 될 것입니다(로마12,1.9-10 참조)
. 
저는 이제 여러분 조상들의 유산을 계속 이어가려는 위대한 열정을 지닌 젊은이들을 생각합니다. 젊은이들은 삶을 시작하는 단계에 있으면서 희망과 기대와 가능성으로 충만합니다. 아시아 청년 대회를 위하여 한국과 아시아 전역에서 모인 젊은이들과 함께하고 그들이 하느님과 서로에게 열려 있음을 경험한 것은 제게 큰 기쁨이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증언이 우리가 서로를 돌볼 것을 촉구하듯이 바로 우리 젊은이들도 우리가 서로에게 귀를 기울일 것을 요청합니다. 저는 주교님들이 자기 교구와 본당과 단체에 젊은이들을 참여시킬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는 교회안의 우리 신앙과 삶의 부요를 나누려고 젊은이들이 목소리를 내고 그들의 의견이 반영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젊은이들과 이야기할 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분명하고도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나누어 주기를 요청합니다. 또한 젊은이들은 우리 자신의 신앙과 충성의 진실성을 시험합니다. 우리가 우리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려고 하느님 백성의 모범이 되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1베드 5,3 참조). 우리의 삶이 우리의 신앙을 반영하지 못하는 경우에 젊은이들은 곧바로 우리와 교회를 비난할 것입니다. 이러한 젊은이들의 솔직함은 신자들이 일상생활에서 자신의 신앙을 나타내도록 돕고자 노력하는 우리에게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자기 교구의 생활을 돌이켜 보고, 사목 계획을 수립하고 수정할 때에 여러분이 섬기는 젊은이들을 앞세우도록 하십시오. “더 거룩하고 더 선교적이고 겸손한 교회, 또한 가난한 이들, 외로운 이들, 아픈 이들, 소외된 이들을 찾아 섬기는가운데 하느님을 경배하고 사랑하는 하나인 교회를 일으켜 세우는”(제6회 아시아 청년 대회 폐막 미사 강론, 2014.8.17.) 데에 젊은이들을 동반자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젊은이들에게 가까이 다가가 여러분이 그들에게 관심이 있고 그들의 필요를 이해한다는 것을 보여 주십시오. 이러한 친근함이 교회 단체와 공동체를 강화시켜 줄 뿐 아니라 그들과 그들 가족이 사회의 일상생활에서 겪는 어려움을 여러분이 이해하시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복음이 가톨릭 공동체와 사회 전체의 삶에 더욱 깊숙이 스며들게 될 것입니다. 젊은이들을 위한 여러분의 봉사를 통하여 교회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청하신 대로 세상의 누룩이 될 것입니다(마태 13,33 참조). 
이제 여러분이 지역 교회로 돌아가실 준비를 하시는 데에, 여러분의직무를 격려하고 여러분의 사명을 굳건히 하면서 저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께서 섬김을 받으시려고가 아니라 섬기러 오신 것처럼 여러분도종이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마태 20,28 참조). 우리의 삶은 우리에게 맡겨진 모든 영혼에게 예외없이 거저 주는 봉사의 삶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백성을 위하여 여러분이 실천하시는 관대하고 헌신적인 직무에서 이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는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며 날마다 새롭게 하는 자기 증여에서 특별히 드러납니다. “그리스도를선포한다는것은,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것이 단순히 마땅하고 옳은 일일 뿐아니라 아름다운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는 의미입니다. 시련 속에서도 삶을 새로운 빛과 깊은 기쁨으로 채울 수 있기에 아름다운 것입니다”(「복음의 기쁨」, 167항). 
이러한 봉사의 정신으로 여러분이 서로를 돌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협력과 형제적 지원으로 여러분은 한국과 몽골의 교회를 강화하고 그리스도를 더욱 효과적으로 선포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부들과도 가까이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들을 훈계하고 바로잡아 줄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 그들의 어려움과 기쁨에 함께 하는 참다운 아버지가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많은 수도자들과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이들의 봉헌은 나날이 교회생활을 부요하게 해 주고 도움이 됩니다. 이들이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의 가시적인 표징을 사회에 보여주기 때문입니다(묵시 21,1-2참조). 주님의 포도밭에서 실천하는 이러한 헌신적인 노력을 통하여 여러분이 모든 평신도와 함께 여러분 선조의 유산을 바탕으로 삼고 한국과 몽골에서 교회의 친교와 사명을 깊이하기 위한 주님께 맞갖은 제물을 바치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몽골의 가톨릭 공동체가 하느님 나라 건설에 노력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특별한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들이 신앙의 열정을 계속 간직하며 성령의 성화하는 힘이 선교하는 제자인 그들의 활동에 함께 한다는 것을 늘 확신하기 바랍니다(「복음의 기쁨」, 119항 참조).
사랑하는 형제 주교 여러분, 한국과 몽골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지속적인 증언에 다시 한 번 감사 드리며 제가 여러분을 위하여 계속 기도하고 영적으로 가까이 있을 것을 약속드립니다. 여러분 모두를 교회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의 전구에 맡겨 드리며 여러분과 여러분의 보호에 맡겨진 모든 이에게 저의 진심 어린 교황 강복을 보내 드립니다.
 
 
 
DISCORSO DEL SANTO PADRE FRANCESCO
AGLI ECC.MI PRESULI DELLA CONFERENZA EPISCOPALE DI COREA,
IN VISITA "AD LIMINA APOSTOLORUM"
Sala del Concistoro
Giovedì, 12 marzo 2015
[Multimedia]
Cari Fratelli Vescovi,
È una grande gioia per me darvi il benvenuto mentre realizzate la vostra visita ad Limina Apostolorum per pregare sulle tombe dei Santi Pietro e Paolo e per rafforzare i vincoli di amicizia e di comunione che ci uniscono. Prego perché questi giorni siano un’occasione di grazia e di rinnovamento nel vostro servizio a Cristo e alla sua Chiesa.
Ringrazio l’Arcivescovo Kim per le calorose parole di saluto che ha pronunciato a nome vostro e di tutta la Chiesa in Corea e in Mongolia. La vostra presenza, oggi, riporta alla mente i lieti ricordi della mia recente visita in Corea, dove ho sperimentato di persona la bontà del popolo coreano, che mi ha accolto con tanta generosità e ha condiviso con me le gioie e le tristezze della sua vita. La visita nel vostro Paese continuerà a essere per me un incoraggiamento duraturo nel mio ministero per la Chiesa Universale.
Nel corso della mia visita abbiamo avuto l’opportunità di riflettere sulla vita della Chiesa in Corea e, in particolare, sul nostro ministero episcopale al servizio del popolo di Dio e della società. Desidero continuare quella riflessione con voi oggi, evidenziando tre aspetti della mia visita: la memoria, i giovani e la missione di confermare i nostri fratelli e le nostre sorelle nella fede. Vorrei anche condividere queste riflessioni con la Chiesa in Mongolia. Pur essendo una piccola comunità in un territorio vasto, essa è come il granello di senape che è la promessa della pienezza del Regno di Dio (cfr. Mt 13, 31-32). Possano queste riflessioni incoraggiare la crescita costante di quel granello e nutrire il ricco suolo della fede del popolo della Mongolia.
Per me, uno dei momenti più belli della visita in Corea è stata la beatificazione dei martiri Paul Yun Ji-chung e compagni. Annoverandoli tra i beati, abbiamo lodato Dio per le innumerevoli grazie che ha riversato sulla Chiesa in Corea nella sua infanzia, e anche reso grazie per la risposta fedele data a questi doni di Dio. Già prima che la loro fede trovasse piena espressione nella vita sacramentale della Chiesa, questi primi cristiani coreani non solo avevano alimentato la loro relazione personale con Gesù, ma lo avevano anche portato ad altri, a prescindere dalla classe o dalla posizione sociale, e avevano dimorato in una comunità di fede e di carità come i primi discepoli del Signore (cfr. At 4, 32). «Erano disposti a grandi sacrifici e a lasciarsi spogliare di quanto li potesse allontanare da Cristo [...]: solo Cristo era il loro vero tesoro» (Omelia a Seoul, 16 agosto 2014). Il loro amore di Dio e del prossimo si è compiuto nell’atto finale di dare la propria vita, irrigando con il loro sangue il semenzaio della Chiesa.
Quella prima comunità ha lasciato a voi e a tutta la Chiesa una bella testimonianza di vita cristiana: «la loro rettitudine nella ricerca della verità, la loro fedeltà ai sommi principi della religione che hanno scelto di abbracciare, nonché la loro testimonianza di carità e di solidarietà verso tutti» (Ibidem). Il loro esempio è una scuola che può fare di noi testimoni cristiani sempre più fedeli, chiamandoci all’incontro, alla carità e al sacrificio. Le lezioni che hanno impartito possono essere applicate in modo particolare ai nostri tempi in cui, malgrado i numerosi progressi compiuti nella tecnologia e nella comunicazione, gli individui sono sempre più isolati e le comunità indebolite. Quanto è importante, dunque, che lavoriate insieme con i sacerdoti, i religiosi e le religiose e i leader laici delle vostre diocesi per assicurare che le parrocchie, le scuole e i centri di apostolato siano autentici luoghi d’incontro: incontro con il Signore, che c’insegna come amare e che apre i nostri occhi alla dignità di ogni persona, e incontro gli uni con gli altri, specialmente con i poveri, gli anziani, le persone dimenticate in mezzo a noi. Quando incontriamo Gesù e sperimentiamo la sua compassione per noi, diventiamo testimoni sempre più convincenti del suo potere salvifico; condividiamo più facilmente il nostro amore per lui e i doni con i quali siamo stati benedetti. Diventiamo un sacrificio vivente, dediti a Dio e agli altri nell’amore (cfr. Rm 12, 1, 9-10).
Il mio pensiero va ora ai vostri giovani, che desiderano fortemente portare avanti l’eredità dei vostri antenati. Sono agli inizi della loro vita e pieni di speranza, promessa e possibilità. È stata una gioia per me stare con i giovani della Corea e di tutta l’Asia che si sono riuniti per la Giornata della Gioventù asiatica, e di sperimentare la loro apertura a Dio e agli altri. Proprio come la testimonianza dei primi cristiani ci invita a prenderci cura gli uni degli altri, così i nostri giovani ci sfidano ad ascoltarci gli uni gli altri. So che nelle vostre diocesi, parrocchie e istituzioni state cercando nuovi modi per coinvolgere i giovani, affinché possano avere una voce ed essere ascoltati, al fine di condividere la ricchezza della vostra fede e della vita nella Chiesa. Quando parliamo con i giovani, essi ci sfidano a condividere la verità di Gesù Cristo con chiarezza e in un modo che possano comprendere. Mettono anche alla prova l’autenticità della nostra fede e fedeltà. Sebbene predichiamo Cristo e non noi stessi, siamo chiamati a essere d’esempio al popolo di Dio (cfr. 1 Pt 5, 3) al fine di attirare le persone a lui. I giovani richiameranno subito noi e la Chiesa all’ordine se la nostra vita non rispecchierà la nostra fede. La loro onestà a questo riguardo può esserci di aiuto, proprio mentre cerchiamo di assistere i fedeli nel manifestare la fede nella loro vita quotidiana.
Mentre riflettete sulla vita delle vostre diocesi, mentre formulate e rivedete i vostri piani pastorali, vi esorto a tenere presenti i giovani che servite. Vedeteli come partner nell’«edificare una Chiesa più santa, più missionaria e umile [...] una Chiesa che ama e adora Dio, cercando di servire i poveri, le persone sole, i malati e gli emarginati” (Omelia al Castello di Haemi, 17 agosto 2014). Siate loro vicini e mostrate che vi preoccupate di loro e comprendete i loro bisogni. Questa vicinanza non solo rafforzerà le istituzioni e le comunità della Chiesa, ma vi aiuterà anche a comprendere le difficoltà che loro e le loro famiglie sperimentano nella vita quotidiana nella società. In questo modo, il Vangelo penetrerà sempre più profondamente nella vita sia della comunità cattolica sia della società nel suo insieme. Attraverso il vostro servizio ai giovani, la Chiesa diventerà quel lievito nel mondo che il Signore ci chiama a essere (cfr. Mt 13, 33).
Mentre vi preparate a ritornare alle vostre Chiese locali, oltre che a incoraggiarvi nel vostro ministero e a confermarvi nella vostra missione, vi chiedo, soprattutto, di essere servitori proprio come Cristo è venuto per servire e non per essere servito (cfr. Mt 20, 28). La nostra è una vita di servizio, donata liberamente, per ogni anima affidata alle nostre cure, senza eccezioni. Ho constatato ciò nel vostro servizio generoso e altruistico alla vostra gente, che trova una particolare espressione nel vostro annuncio di Gesù Cristo e nel dono di voi stessi che rinnovate ogni giorno. «Annunciare Cristo significa mostrare che credere in Lui e seguirlo non è solamente una cosa vera e giusta, ma anche bella, capace di colmare la vita di un nuovo splendore e di una gioia profonda, anche in mezzo alle prove» (Evangelii gaudium, n. 167).
In questo spirito di servizio, possiate essere solleciti gli uni verso gli altri. Attraverso la vostra collaborazione e il vostro sostegno fraterno, rafforzerete la Chiesa in Corea e in Mongolia e diventerete sempre più efficaci nel proclamare Cristo. Possiate anche essere vicini ai vostri sacerdoti: siate veri padri, che cercano non solo di esortare e di correggere, ma ancor più di accompagnarli nelle loro difficoltà e nelle loro gioie. Avvicinatevi anche ai tanti religiosi e alle religiose, la cui consacrazione arricchisce e sostiene ogni giorno la vita della Chiesa, poiché essi offrono alla società un segno visibile del nuovo cielo e della nuova terra (cfr. Ap 21, 1-2). Con questi operai impegnati nella vigna del Signore, insieme con tutti i fedeli laici, possiate edificare sull’eredità dei vostri avi e offrire al Signore un degno sacrificio per rendere più profonde la comunione e la missione della Chiesa in Corea e in Mongolia.
Desidero esprimere il mio apprezzamento in modo particolare alla comunità cattolica in Mongolia, per i suoi sforzi nell’edificare il Regno di Dio. Possa essa rimanere fervente nella fede, sempre fiduciosa che la forza santificatrice dello Spirito Santo è all’opera in lei come discepola missionaria (cfr. Evangelii gaudium, n. 119).
Cari fratelli Vescovi, con rinnovata gratitudine per la testimonianza duratura delle comunità cristiane in Corea e in Mongolia, vi assicuro delle mie costanti preghiere e della mia vicinanza spirituale. Affido tutti voi all’intercessione di Maria, Madre della Chiesa e imparto volentieri la mia Benedizione Apostolica a voi e a tutti coloro che sono affidati alle vostre c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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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眞菴은 韓國 天主敎會 發祥地이며, 

丁若鏞 등, 당시 靑少年 鮮卑들의 母校, 天學堂 !

  

-"始聞西敎 見一卷書,,,"의 誤譯을 지적하며, ! -

天眞菴은, 古朝鮮 시대 祭政一致의 관습으로, 本來 檀君影幀 天眞을 모시고 山祭祀, 堂山祭, 山神祭 등을 올리던 天眞閣 혹은 天眞堂이라는 작은 草家 堂집이 오랜 세월 있었던 자리로 추정되며, 특히 일부 先史時代의 石造 痕跡으로 추정되는 현상을 볼 때, 三國時代 그 이전부터 소박한 토속신앙의 현장으로 여겨지며, 훗날 天眞菴이 되어, 1779년을 전후하여 廢刹이 되었었으니, 丁若鏞 선생의 글에, "天眞菴은 다 허물어져 옛 모습이 하나도 없다,,,요사체는 반이나 무너져 빈 터가 되었네(寺破無舊觀,樓前僚舍半虛舊)" 하였고, 1797년 丁巳年 당시 洪敬謨의 南漢志에서는, "天眞菴은 오래된 헌 절인데, 종이를 만드는 곳으로 쓰이다가 이제는 司饔院에서 관리하고 있다(天眞菴爲古寺造紙物今屬司饔院)"고 함으로써, 사찰로서의 기능을 言及하지 않고 있으며, 聖다블뤼 主敎는 1850년 경 기록한 글에서, 李檗 聖祖께서 젊은 선비들과 함께 修道와 講學을 하던 곳은, 사람이 살지 않는 居處(廢家屋)이었다(l'edifice isole et perdu)고 하였다.

1779년 당시 李檗 聖祖 25세, 丁若鏞 17세, 丁若鍾 19세, 丁若銓 21세, 李承薰 22세, 李寵億 14세, 權哲身 44세, 등 주로 10代와 20代 젊은이들이 모여서 그 당시 아주 생소하고 이상한 天主敎 책을 읽고 토론하는 내용을 일반 儒敎 書堂에서나 正常的인 사찰에서, 또는 일반 가정에서는 실천하기 어려우므로, 다블뤼 주교의 기록대로, 폐허가 된 天眞菴에서는 여럿이 모여 함께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pour s'y livrer ensemble a des etudes profondes), 天主敎 眞理를 탐구하고 실천할 수 있었으니, 天眞菴은 바로 韓民族의 유교 선비들이 불교 암자에서 천주교를 연구하고 실천하기 시작한, 儒·佛·天이 사람과 장소와 사상을 合流한 곳이고, 朝鮮天主敎會가 태동된 韓國天主敎 發祥地이다.

그런데 丁若鏞 선생은 종종 [天眞菴]에서 [菴] 字를 빼고 그냥 "天眞"이라고만 부르기도 하였으니, "共詣天眞" 또는 "天眞之游" 등이 그 예다. 또 일반적으로 庵子는 늘 [庵]이라는 글자를 쓰는데, 유독히 정약용 선생만이, 특히 天眞菴에 대해서만 종종 [菴]이라는 "풀로 가리울 암"이라는 글자를 쓰는 것도, 南人계 자기네 젊은 선비들 학자들의 호가 모두 稷菴 권일신, 鹿菴 권철신, 曠菴 이벽, 巽菴 정약전, 俟菴 丁若鏞, 伏菴 李基讓, 順菴 安鼎福, 등에서처럼. 또한 은연 중에 이곳 天眞菴은 자기네 南人 學者들의 隱居地요, 本據地임을 암시하고 있다.

한국천주교회 창립자이신 曠菴 李檗 聖祖께서 천진암을 根據地로 활동하신 바가, 丁若鏞 선생의 글에 적잖이 보이고 있으니, "己亥年(1779년)에 天眞菴에서 講學을 할 때(己亥冬講學于天眞菴), 李檗이 밤중에 와서 여럿이 촛불들을 밝히고 經書를 談論하였으며(雪中李檗夜至張燭談經)", 그후 "丁巳年(1797) 端午날에 2분 형님들(丁若銓)과 天眞菴에 와보니, 李檗의 讀書處, 곧 이벽의 修學 道場 건물이 아직도 그저 있구나 !(端午日陪二兄游天眞庵 李檗讀書猶有處)"하고 詩를 읊어 밝히고 있다.

丁學術의 李檗傳에서는, "戊戌(1778) 己亥(1779) 년에 李檗 曠菴 선생이 廣州 鴛鴦山寺 곧 天眞菴에 隱居하시며 丁氏 李氏네들과 어진 벗들(賢友)과 학문에 열중하였으며(勉學), 그 당시, 道友가 衆徒를 이루어,학문을 연구하고 덕을 닦는 공동체가 되기에 이르니(其門下如叢林),저들에게 聖敎要旨를 下筆하시었다."고 밝히고 있다. 즉 천진암을 본거지로 [天學 叢林]이 젊은 선비들 중심으로 형성되었었다는 것이다.

1827년에 65세의 노인이 된 정약용 선생은 옛날의 동료들과 함께 마지막으로 천진암을 찾아와 현장에서 지은 시에서, "이 곳 천진암에 오르는 바윗돌 사이사이로 난 실같은 오솔길은 내가 어린 아이 적에 오르내리며 놀던 길인데(昔我童時遊), 여기서 우리는 중용, 대학, 서전, 주역, 즉 상서를 다 외운 후 불에 태워 물에 타서 마시는 소련을 하였었지(尙書此燒鍊)! 더우기 저명한 호걸들과 선비들이 모여 강학을 하고, 독서를 하던 곳이 바로 여기였지(豪士昔講讀) !" 하며, 옛 추억을 회고하였다. 한문에서,“童時”라고 하면, 10세 미만을 뜻하며, 10세가 넘어 11세 이상은 少年이라고 부르며, 당시에는 장가를 들기 시작하였다.

천주교 용어가 아직 없었던 시절, “묵상하고 기도하던 방에서 참선하던 그 옛날의 친구들(이벽, 이승훈, 권상문, 정약종, 정약전, 등)은 모두 죽어 떠났으니, 이 세상 어디가서 그 옛 벗들을 구해올 수 있으랴!(禪房無處舊人求)”, “그 때 그 시절 여기서 공부하던생활 지금 다시는 해볼수 없네그려!(前躅凄迷不可求)”, “저녁 죽 먹으라고 치던 북소리에도 해질녘에 함께 같이 놀던 어릴적 옛 동무들 생각나네! (粥鼓斜陽念舊游)” 하며, 노인 정약용 승지가 현장에 와서 지은 여러 편의 詩文을 읽어보면, 천진암은 정약용이 7세나 8세(?) 시절부터 22세(?)가 되던 1784년 봄까지, 광암 공을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하던 그의 母校하고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天眞菴 書堂(天學道場)에서 청소년 시절의 정약용 등은 이벽 성조를 따라, 天文學, 地理學, 數學, 幾何原本, 曆學, 醫學, 新敎之說(天主敎), 등을 배웠다고 자신의 글에서 밝히고 있다.

1836년에 조선에 들어온 최초의 프랑스 선교사 聖 Maubant신부는 1838년에 프랑스 파리 외방선교회 본부로 보낸 보고서에서,"李檗은 천주교에 푹빠져서, 몇몇 改宗者들과 힘을 합쳐(de concert avec quelques proselites), 1783년에 북경으로 李라는 姓을 가진 사람을 자기들 공동체의 대표자로, 자신의 대리자로, 파견하여(il envoya un autre delegue) 이듬해 즉 1784년 2월에 영세하고 돌아왔다."하였으니, 이승훈 성현을 파견하던 이벽 曠菴 公을 중심으로 한 젊은이들의 단체가 있던 본거지가 바로 天眞菴으로, 이 젊은 작은 공동체가 한국교회의 출발이 된 叢林이었다.

이 [강학회]를,[叢林],[少林],[講學],등으로 정약용 선생은 표현하였고, 영국의 Longford 교수는 1800년대 말에 그의 연구서에서, 젊은 양반 선비들의 연구모임 [同好人會]라고 하였으며(noble cotery), Daveluy 주교는,[講學會]라고 표현하였고, 김대건 신학생은, [철학자들의 모임]으로 표현하였으며, 聖 Pierre Maubant 신부는 새로운 [改宗者들의 단체]라고 보고하고 있다. “眞正한 意味의 朝鮮天主敎會의 歷史는 李檗의 저 偉大한 講學에서 시작되었다”. “조선왕국에 처음으로 천주교를 시작하기 위하여 天主께서 간택하여 쓰신 道具는 李檗이라는 사람인데, 이름을 德祖라고 부르고, 호는 曠菴이었으며, 경주이씨 가문이었다.” “이벽은 조선에 천주교회를 창립하기 위하여 주초로 삼고자 대학자 암브로시오 권철신을 선택하였다.(Mgr. A. Daveluy, Notes pour l'histoire de martyrs en Coree. Vol IV. manuscript copies, 1-2면 :“ L'histoire proprement dite commence aux conferences de Ni Pieki. Les grandes conferences de Ni Pieki”)

1925년 교황 비오11세께서는 79위 조선순교자 諡福式 강론 첫머리에서, 이벽의 업적과 이승훈의 활동을 擧名하며 조선천주교회가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가기 전에 성직자없이 조선 평신도들이 세웠음을 격찬하셨다.

1968년 교황 바오로6세께서도 한국순교자 24위 시복식 강론 첫 머리에서 같은 내용으로 한국천주교회의 기묘한 창립을 말씀하시며, 전 세계 교회사에 없는 기묘한 위업을 밝히시며 한국교회를 들어 높혀 말씀하셨다.

1984년 교황 요한바오로2세께는 103위 諡聖을 계기로 하시는 강론에서 다음과 같은 보다 구체적인 강론으로 한국천주교회의 신비롭고 자랑스러운 한민족의 자발적인 교회창립활동을 강론 첫머리에서 강조하셨다.

즉, 우리가 알고 있듯이, 사실상 진리 탐구에 충실한 한국의 저 평신도들- 즉, 한국의 "철학자"들과 학자들의 모임인 한 단체는- 중대한 위험을 무릅쓰면서, 당시 북경천주교회와의 접촉을 과감히 시도하였고, 특히 새로운 교리서적들을 읽고 그들 스스로가 알기 시작한 생소한 신앙에 관하여, 자기들을 밝혀줄 수 있을 천주교 신자들을 찾아나섰습니다.

남녀 이 평신도들은 마땅히 [한국천주교회 창립자들]이라고 해야 하며, 1779년부터 1835년까지 56년간이나 저들은 사제들의 도움이 없이-비록 2명의 중국인 사제들이 잠시 있었던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는- 자기들의 조국에 복음의 씨를 뿌렸으며, 1836년에 프랑스 선교사들이 처음으로 한국에 도착할 때까지 성직자 없이 자기들끼리 교회를 세우고 발전시켰으며,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위하여 목숨까지 바쳤습니다(L'Osservatore Romano).

1993년 동 교황 요한바오로2세께서는 韓民族100년계획천진암대성당 머릿돌에 친히 작성하셔서 친필 서명하여 주신 교황강복문에서 좀더 명확히 또 우리민족의 현재와 미래를 위한 한반도 평화통일 사목시책을 밝혀주셨습니다.

즉, "한국천주교 발상지 천진암 성지에 건립되는 새 성전 머릿돌에 교황강복을 베푸노니, 하느님이 보우하사 온 겨레가 영원히 화목하기를 비노라".

天眞菴 聖地는 韓國天主敎會 創立先祖들께서 선교사 없이 성직자없이 自發的으로 眞理를 探究하고 福音을 전파하며 교회를 세우신,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韓國天主敎 發祥地일뿐더러, 陰曆主日 제정과 실천으로 국내에서는 최초로 근로자들의 정기적인 휴식을 겸한 敬神禮節과 社會階級打破, 男女平等 實踐 등이 敎會創立과 더불어 시작되어, 훗날 民族開化와 祖國近代化 및 조선 社會改革 運動의 싹이 트기 시작한, 온 겨레의 精神文化 聖地이기도 하다.

이 聖地에 한국의 民族宗敎들과 儒敎, 佛敎, 天主敎 등의 建築美 일부씩을 참고하면서 韓民族 100年計劃 天眞菴大聖堂을 세우고 있다. 千年歲月을 두고 한겨레의 精神的 기둥이 될 이 대성당 건립에 政權을 超越하여 各界 各層에서, 온 겨레가 子子孫孫이 뜻을 같이하고 힘을 함께 모으며, 다같이 정성을 바쳐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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始聞西敎 見一卷書의 의미

1816년 정약용 선생이 55세 때 流配地 강진에서 지은 형 丁若銓 墓誌銘에,

甲辰四月之望旣祭丘嫂之忌余兄弟與李德操同舟順流舟中聞天地造化之始形神生死之理창황驚疑若河漢之無極入京又從德操見實義七極等數卷始欣然傾嚮而此時無廢祭之說.하였다.-

1784년 갑진년 4월 보름 날 큰 형수의 제사를 지내고, 나는 우리 형제들과함께 이벽과 더불어 같은 배를 타고, 물 흐르는 대로 내려오면서, 배 위에서 천지조화의 시작과 육신과 영혼(형체와 정신), 생사의 이치에 관한 이야기를 듣다보니, 아주 황홀하고 놀라우며 의아하여, 하한의 무극에 들어간듯 어느덧 벌써 서울에 들어왔고, 또 이덕조를 따라가서 천주실의와 칠극 등 여러 권의 책을 보고 이 때 바야흐로 기뻐하였으며, 아주 거기에 기울어 푹 빠지게 되었었는데, 이 때는 아직 제사를 폐지해야 한다는 말이 없을 때였다. -변기영 신부 역-

그런데 정약용 선생는 1822년 61세 회갑하던 해, 고향 마재에서 지은 鹿菴 權哲身 墓誌銘에 같은 내용을 이야기하고 있다.

甲辰夏從李檗舟下斗尾峽始聞西敎見一卷書.

*즉,1784년 갑진년 여름에 이벽을 따라 배를 타고 두미 여울을 내려가며 천주교 이야기를 듣기 시작하였고 책도 한권 보았다. -변기영 신부 역- <천주교에 관한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初聞)”는 뜻이 아니라, “듣기 시작하였다(始聞)”는 뜻이다>

같은 내용이 정약용의 自撰墓誌銘의 集中本에서도 기록하고 있다.

甲辰夏從李檗舟下斗尾峽始聞西敎見一卷書.

같은 사건을, 1816년에 쓴 先仲氏墓誌銘에서, 1821년에 쓴 鹿菴墓誌銘에서, 1822년에 쓴 自撰墓誌銘에서, 똑같이 기록하고 있는데, 유배지 강진에서 1816년에 쓴 것이 좀 가장 자세히 썼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3번씩이나 쓰고 있는 것을 보면, 1784년 당시 李檗聖祖의 船上講學이 얼마나 감격할만한 것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② 講學于天眞菴 走魚寺雪中 李檗夜至

昔在己亥冬講學于天眞菴走魚寺雪中李檗夜至張燭談經其後七年而謗生此所謂盛筵難再也-鹿菴 權哲身 墓誌銘-1822년 61세 回甲 때 丁若鏞 作-

*즉,기해년 겨울 천진암에서 강학이 있었는데 주어사가 설중인데도 이벽이 밤중에 천진암까지 와서 촛불을 밝히고 경서를 담론하였다. 는 뜻이다.

또한 정약용 선생이 1816년 55세 때,先仲氏(丁若銓)墓誌銘에서,

執贄請敎於鹿菴之門嘗於冬月寓居走魚寺講學會者金源星權相學李寵億等數人,하였는데,

*그 뜻인즉, 녹암이 잠시 주어사에 우거할 때 강학이 있었는데, 모인 사람들은 김원성 권상학 이총억 등 여러 명이었다는 등의 뜻이다. 走魚寺가 있던 같은 鶯子山에는 樊魚寺, 日出庵, 石伊庵, 天眞菴, 小庵, 鳳泰庵, 샛절, 이렇게 8개소 암자가 같은 산의 가까운 거리(300m ~ 500m, 좀 거리가 떠러진 곳은 1 km 정도 거리)에 있었다. 그래서 40대의 나이 많은 어른이오 스승 격인 권철신이 寓居 走魚寺하던 때이므로, 10대후반 20대 전후의 젊은 이들은 주변 가까운 거리의 암자에서 강학을 받을 수가 있었다. 역사적 사건 기록 문헌은 현장을 정밀답사하지 않고는 올바른 해석이 불가능하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公諱哲身字旣明自號曰鹿菴名其所居曰鑑湖安東之權也 하였는데,

*그 뜻인즉, 公은 諱가 哲身이고, 字는 旣明이며, 스스로(自) 號를 지었으니, 가로되(曰) 鹿菴이라 하였고, 이름난 그 곳(名其所)에 居하였으니, 가로되(曰) 鑑湖라는 곳이며, 安東之權씨였다(也)이다.

또한, 始李檗首宣西敎 從者旣衆曰鑑湖士流之望鑑湖從而靡不從矣遂駕至鑑湖旬而後反於是公之弟日身熱心從檗하였는데,

*여기서, 鑑湖의 士流는 楊根面 五賓里 한강가에 있던 鑑湖亭에 자주 모이던 선비들, 특히 權哲身과 權日身을 따르던 제자 선비들을 말한다. 마치,[명동 청년들],[광주 학생들], 하듯.감호정은 세종, 성종 때부터 이미 있었던 정자로서, 거울같이 물맑은 양평 앞 葛山里,楊根里, 五賓里의 漢江浦를 감호(鑑湖)라고 말하였다.

더구나, 公作虞祭義一篇以明祭祀之義出辛亥冬湖南獄起睦萬中洪樂安指告日身日身始抵死不屈 配濟州旣 上諭之誨之日身自獄中作悔悟文上之宥配禮山出獄未幾而死自玆門徒皆絶公杜門銜哀足跡不出乎山門者十年辛酉春逮入獄.하였는데,

*여기서 [杜門銜哀足跡不出乎山門者十年]은 녹암 공이 살던 마을 입구가 山門을 이루고 있는 곳, 지금의 葛山里(현재 양평 읍사무소, 양평 도서관, 양평 중고등학교 터 일대)를 말한다. 전에는 똬리처럼 동산으로 둘러 쌓인 마을 입구가 葛山津(현재도 나루터) 옆으로만 조금 열려 있어, 목책으로 山門을 이루고 있었다. - 卞基榮-

1 <天眞菴은 韓國 天主敎會 發祥地며, 정약용 등 청소년들의 母校 ! "始聞西敎 見一卷書,,,"의 誤譯을 지적하며, ! 변기영 / 2012-02-01 / 12:19 / 조회 2413 / 수정 | 삭제>

 
변기영 몬시뇰이 [사랑방]을 열었습니다.  
사랑방 윗묵 구석 구석에 쳐박아두었던 보따리들을 이것저것 내다가 풀어서  
교회와 사회에 혹시라도 도움이 될 것들은 죽기 전 알리려 합니다. [사랑방 출입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입력 : 2016.09.30 오후 8:5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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