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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소리

WIND BELL

고 양병묵 신부님의 선종 미사를 드리고...!

글 :  몬시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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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8년 금경축 후, 어제 선종하신 양병묵 신부님은 형님대신 일본軍에 자원 입대했던 한국판 聖 꼴베 신부!
 
양병묵 신부님은 본래 오산수 소우리(牛鳴洞) 출신입니다. 용인 명동 교회 묘지 입구 좌편 등너머 산골로, 길에서는 보이지 않는 산골이라서, 해가 오전 11시에 떠서, 오후 3시경에 진다는 심산궁곡입니다.

1945년 초여름, 대동아 전쟁 말기, 양병묵 신부님이 사제되기를 지망한 신학생 때, 그 형님이 결혼한 지 몇 달(2달?) 되지도 않았는데, 일본 軍에 입대하라는 징용소집 영장을 받자, 동생으로서, 15세의 양루까 소년 신학생은 체격이 이미 장정이었고, 용모와 음성이 형과 똑같아 이웃사람들도 구별하기 힘들 정도라서, 양루까 신학생은 형대신 일본군 징용에 가기로 결심을 세웠는데, 당시의 신학교는 지금처럼 질서잡히지 않아, 지금의 중국이나 월남의 천주교 신학교들처럼, 또 공산치하의 폴랜드 신학교들처럼, 왜정말기에 조선에서는 일본 형사들의 감시와 통제가 너무나 극심하여, 사제지망자 신학생 양성은 어려움이 많았읍니다.

 신학교 교장신부와 본당신부가 신학생으로 인정하여도, 학교에 빈 자리가 나야 한두명씩 입교시키기도 할정도로 신학생 교육,관리가 어렵던 때입니다. 형님대신 일본 軍 징용 소집으로 입대하기로 고집을 부려,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덴노헤이까 반사이(天皇陛下萬歲)!”를 부르면서, 등너머 아랫 마을 다른 청년들 몇명과 함께 모현면 소재지 돌자개에 집합하여, 간단한 훈련을 받으면서, 용인으로 해서 수원을 거쳐, 평택으로 가서, 배를 타고 대만이나 필리핀 행의, 총알받이로 떠나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러나 8월 15일 해방을 맞아 귀가하여 후에 신부가 되었읍니다.

사실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원자폭탄을 투하였어도, 일본은 항복은 고사하고, 연일 방송에서, "갓다서 닛뽕, 단지데 갓다서, 메이헤이 이마꼬소 돛찌우리다!(이겼다, 일본이, 또 이겼다 일본이, 미국 영국 이놈들은 지금이야말로 진이겨서 박살을 한다!")라는  노래를 조선 시골 어린 우리들에게 까지 늘 부르게 하던 때입니다. 

소우리 산골 교우들과 양루까 신학생 가족들, 특히 그 형님과 형수와 온 가정이 너무나 열심히 묵주의 기도를 바치며, 빨리 전쟁이 끝나고, 양루까가 무사히 돌아와, 우리 산골 동네 소우리에서도 신부가 나기를 밤낮으로 애타게 기도하였읍니다. 마침내 그 해 8월 15일, 성모승천 축일, 뜻밖에도 일본의 항복으로 해방이 되어, 남양군도 전쟁터로 가는  배에 오르기 직전, 양루까 신학생은 고향에 돌아와  계속되는 전란을 이겨가며  훌륭한 사제가 되었고, 엄청난 교회 일들을 아주 많이 하셨습니다.

항복하도록 일본의 소화천황 마음을 움직인 것은 2천년간 지내오는 8월 15일 대축일의 성모님이셨고, 성모님을 움직인 것은 소우리 교우들 몇 집(5세대 내외)의 진솔하고 순수하고 애절한 기도였고, 소우리 교우들을 열심히 기도하게 만든 것은 갖 결혼한 형님대신 자원하여 일본군 징용에 대신 입대하는 15 소년 신학생 양루까의 용기와 형제애였읍니다. 

1950년 6월 25일, 주일날 새벽에, 북한 공산군이 일제히 38선을 넘어,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자, 혜화동 대신학교와 명동 서울교구청과 대성당의 모든 신부들과 신학생들은 황급히 피신하기 시작하였으니, 당시 공산군들은 신부들을 잡히는 대로 거의 다 처형하였습니다(사제 82명(그 중에 김수환 추기경 동창 신부 5명 포함), 주교 5명, 수녀 35명, 신학생 수사 29명, 도합 152여명이 처형되었습니다. 아직도 대부분 무덤조차 모릅니다.)

1950년 6월 25일 당시 수원 북수동 본당 보좌신부로 있던 故 최석우 신부님은 급한 대로, 우선 오산수 소우리 양루까 신학생 동네로 피난을 하였는데, 모두들 명동 교구청과 혜화동 신학교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 하며,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최석우 신부님의 말씀을 듣고, 양병묵 신학생은 용감하게 우선 혜화동 신학교에 갔다 오기로 결심하고, 적치하에서 잡히면 죽는 처지에서, 콩밭 고랑을 누비며, 혜화동 신학교에까지 가서, 낙산 마루에 숨어서, 내려다보며, 운동장에서 훈련하던 인민군들이 사라진 틈에, 몰래 신학교 성당에까지 들어가서, 기도하고 나와서, 3일 후에 집으로 무사히 돌아왔다니…. 참 기가 막히는 일이죠!

전란으로 인하여 신학교가 밀양으로, 부산으로, 서울로, 이동될 때도, 피난길에서의 고통은 아주 심하였는데, 그래도 지금 건장한 老益壯으로서, 금경축까지 하시고, 어제 85세로 거룩히 선종하셨읍니다. 사제가 되신 후에도, 실로 째지게 가난하던 수원교구의 갈전리 미양성당, 남양성당, 철산리 성당, 안양 장래동 성당, 수원 정자동 현 주교좌대성당, 등을 교우들과함께 지으실 때, 손수 시멘트 벽돌과 흙벽돌을 만들고, 중노동하는 것을 전혀 마다하지 않으신 분입니다.

우리 후학들과 교우들의 모범이시고, 수호자이십니다. 내일 5월 22일 오전 10시, 수원 정자동 주교좌 대성당에서 장례미사가 있고, 미리내 성직자 묘역에 안장 되십니다. -Msgr. Byon 


입력 : 2014.05.21 오후 9:2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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