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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천주교회 창립사

Church history in Korea

이한택 주교님의 강론: “나는 여러분을 이리떼 가운데로 보냅니다.” -퍼온 글-

글 :  몬시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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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택 주교님의 강론: “나는 여러분을 이리떼 가운데로 보냅니다.”
 
* ‘정의구현사제단’ 타도를 외치는, ‘대한민국수호 천주교인모임’의 전국 각 교구 조직 대표 임원피정 중에, 이한택 주교님의 강론. 녹취록 정리, 김원율 교리연구소장 /2014년 10월 18일.
http://cafe.daum.net/catholicforkorea/UzMn/528 에서 퍼온 글입니다.
 
제가 이 자리에서 먼저 대수천 모임에 대한 제안을 몇 가지 하고자 합니다. 이계성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대수천은 아무 것도 없이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신감과 소신을 가지고 나아간다면 시작은 작으나 큰 결실을 맺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여러분은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내가 무엇 때문에 이 운동을 시작하였는가? 나에게 소신이 있는가? 내가 이 운동을 시작한 것이 다른 사람을 설득하기 위한 것인가? 단지 정의구현사제단을 타도하기 위한 것인가? 내 스스로 이 질문을 해야 합니다. 먼저 여러분이 이 자리에 오신 것은 하느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믿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을 찾기 위하여 내가 이 자리에 나왔다고 스스로 믿어야 합니다.
 
제가 70년대에는 정의구현사제단의 열혈당원이었습니다. 인혁당 사건으로 하루 사이에 여덟 명이나 되는 사람이 죽어나갈 때 저는 지학순 주교님과 같이 사제로서 거리로 뛰쳐나갔습니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서 저는 그들과 갈라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같은 동아리에 있던 함세웅 신부 같은 분이 복음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그들을 잘 몰랐습니다. 그들은 교구의 사제였고 저는 예수회 소속의 신부였기 때문입니다. 지금 저는 그들이 대화하자고 하면 담담히 대화합니다. 만약 그들과 감정적으로 싸우면 그들과 똑같이 되기 때문입니다. 왜냐 하면 저는 하느님 뜻을 어느 때에나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계성 선생님이나 서석구 변호사님, 김찬수 선생님 같은 분들도 하느님의 일을 한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두려움 없이 싸울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안중근 의사는 자신이 하느님의 일을 한다는 소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따르는 사람이 있건 없건 상관없이 거사를 결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거사 전 성호를 그었고 총을 쏜 후 총알이 명중되었음을 확인하고서 성호를 그었습니다. 그는 애국자이면서 열심한 천주교 신자였습니다. 이는 당시 감옥의 간수, 사형집행인이 모두 의사의 인품에 감탄하였음에도 잘 나타납니다. 감옥에서 안중근 의사를 돌보았던 사람들은 모두 그분을 존경하였습니다. 우리가 믿음이 뚜렷하다면 혼자서도 얼마든지 의로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군중집회를 전제하는 운동은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매일미사 책은 커피 값에도 못 미치는 천원짜리 책이지만 이 안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행동지침서이며 수양서라는 사실을 말씀드립니다. 어제는 안티오키아 이냐시오 성인 축일입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두 분이 있습니다. 한 분은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이고 한 분은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성인입니다. 이 분이 안티오키아에서 잡혀서 로마로 압송되어 갈 때 로마 신자들은 이분이 돌아가시면 소아시아에서 지도자가 없어지니 큰 일이라고 생각하여 구명운동을 하였습니다. 로마를 방문하면 클로세움이라는 성지가 있습니다만 이는 실제 매우 잔인한 곳입니다. 황제 앞에서 검투사들이 죽을 때까지 싸우는 것을 보고 환호하였고 순교자들이 굶주린 맹수에게 물리고 찢겨 죽었던 곳입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로마 신자들이 자신을 위하여 구명운동을 하는 것을 듣고 신자들에게 편지를 보내셨습니다. 오늘날에도 전해지는 이 편지의 내용 중 일부를 제 페이스북에 올리기도 하였지만, 성인은 신자들에게 자신이 하느님에게 가는 것을 방해하지 않도록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한 알의 밀알이요 사자의 잇발은 맷돌이며 자신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사자의 잇발에 갈리어져 희생되는 것은 하느님의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성인은 로마 황제를 욕하거나 로마 사람들을 원망하거나 하시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로마인의 법에 의하여 하느님에게 가는 것이며 오히려 로마 신자들이 이를 방해하지 않도록 타이르셨습니다.
 
1세기에 태어나 2세기 초에 순교한 이냐시오 성인은 복음대로 살고 예수님과 일치된 삶을 살다 가신 분이었습니다. 이러한 성인의 모습은 우리시대에도 필요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알고 계시는 이계성 선생님이나 서석구 변호사님도 이냐시오 성인을 닮은 분들입니다. 모두 일당천의 소신을 가지셨고 하느님의 뒷받침을 받으므로 두려워하지 않으십니다. 믿음이 있고 소신이 있으면 안 중근의사처럼 누군가가 손잡아주고 붙잡아주지 않더라도 두려움없이 싸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과 소신이 없으면 좌우를 살피고 눈치를 보게 됩니다.
 
이냐시오 성인과 같은 분으로서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를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교황님께서는 한국에 나흘 계셨지만 교황님이 가신 다음에도 우리 마음에 메아리치는 것이 있습니다. 그 분은 소신이 있으셨기 때문에 대한민국을 흔들어 놓고 가셨습니다. 북한의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이 3대에 걸쳐 권력을 장악하고 군중집회 퍼레이드를 하며 미사일을 쏘지만 그들을 마음으로 추종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종북주의자들만 그들을 따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한민국은 끄떡하지 않습니다. 하느님 믿는 사람은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대한민국은 수없이 많은 고난과 시련을 이겨내고 오늘의 번영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나라걱정은 해야 합니다.
 
4000명 신부 중에 골수 정구사는 백명도 되지 않습니다. 나머지는 다 짝퉁입니다. 그냥 동창이다 친구다 해서 이름만 빌려준 사람도 많습니다. 수녀님도 만명이 넘습니다만 광화문에 나와있는 수녀님이 몇 명이나 됩니까? 미꾸라지 몇 마리가 흙탕물을 일으키듯이 우리는 너무 겁낼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전적으로 무시해서도 안됩니다.
 
개신교의 교리는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없이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내가 내 힘을 다해 하느님의 은총에 협력해야 합니다. 부모님이 아들에게 용돈을 주시는데 어떤 아들은 술 마시느라고 탕진하고 어떤 아들은 용돈 아껴서 어머님 카네이션사서 달아드리고 제 공부할 것 열심히 한다면 누가 더 예쁜 아들이겠습니까? 하느님이 나한데 주시는 은총에 협력해야만 천주교에서는 구원이 가능하다고 가르칩니다.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님들에 대하여는 그냥 보고만 있기 보다는 우리의 힘을 다해서 설득도 하고 대화도 나누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분들과 싸우거나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성인은 순교시기가 107년 또는 111년이라고 추정되고 있으며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라고 일컬어지므로 예수님보다 100년 미만의 후세대 분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바로 예수님의 삶을 사셨습니다. 광화문에서 송전탑에서 강정마을에서 신부님들이 얼마나 예수님과 일치하는가, 그리고 신부님이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하는가 하는 것이 그분들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덮어놓고 내 귀에 거슬린다고 하여 우리가 반대하여서는 안됩니다.
 
성직자의 강론과 사목은 신자가 하느님에게 가까이 가고 일치하게 하는 가운데 세상에서 행복을 누리게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성직자는 신자들이 세상에서 행복을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행복을 느끼도록 유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직자들의 일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 불행해지는 것, 이것은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분열과 불안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 절대 아닙니다. 성령의 선물은 일치입니다. 시련가운데 행복을 주시는 것, 가난, 순교 어떤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과 가까워지는 것, 고통 속에 행복을 느끼는 것, 이것이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묵상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루카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오늘 영명축일을 맞으신 박홍 루카 신부님께 큰 박수를 보대드립시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은 72명의 제자들을 파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르십니다. ‘가십시오. 나는 여러분을 이리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보냅니다.’ 이계성 선생님 역시 일인시위를 하시면서 이리떼 가운데 있는 것처럼 느끼셨을 것입니다. ‘박근혜 한테 얼마 받았느냐?’ 그러면서 밀어제치고 동생, 조카, 아들같은 사람들로부터 별아 별 수모를 다 당했을 것입니다. 일인시위를 나가면서 피크닉 가는 기분은 갖지 못하셨을 겁니다. 외로움을 느끼고 남들이 ‘그만 쉬십시오’ 라고 권하면 쉬고 싶은 유혹도 받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이리떼 가운데로 보내셨듯이 본인도 이리떼 가운데로 향하는 기분을 느꼈을 것입니다. 저 역시 예수회의 어느 수사로부터는 인터넷에서 절교 선언도 당했고 모임에 가면 수구 꼴통이 왔구나 하는 눈으로 저를 보는가 하면, 슬금슬금 피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아니꼽게 생각하고 화를 낸다면 저는 이 자리에 설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일생도 가시밭길이었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짧은 일생 역시 온통 수난으로 가득했습니다. 하느님 뒤를 따르고 예수님 뒤를 따르는 삶은 이와 같습니다. 하느님을 따르는 길이 낙원을 걷는 것처럼 생각한다면 이는 착각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라’고 이르셨습니다. 오늘 서두에서 이계성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대수천은 가진 것 없이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모두 이곳에 아무런 조건없이 나오셨습니다. 지금 여기 오신 분 중에서 누구에게 돈받고 나오신 분이 있나요. 그런 분이 있으면 손들어 보세요. 그리고 오늘 이 자리에는 나오고 싶었지만 김찬수 대표님처럼 몸이 불편해서 참석 못하신 분도 있습니다. 이 자리에 나오는 것 역시 이리떼가 무서워 못 나오는 신부님도 있을 것입니다. 이곳에 나오시면 동창신부들이 전화해서 ’너 언제부터 수구되었어?‘하고 묻기도 하고, 하이에나처럼 덤벼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런 자리에 나오고 싶어도 나오지 못하는 신부님도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역사를 보면 이번에 복자에 오르신 정약종 순교자는 원래 넉넉하고 양반 집안이었지만 천주교를 맞이하면서 집안이 풍비박산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순교자들은 천주교를 받아들이면 어려움이 올 것을 알면서 그 길을 가셨습니다.
 
우리가 활동을 함에 있어 현세적으로 자금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빽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경제적 문제, 재정적 뒷받침이 필요하지만 어떨 때에는 부족한 것이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돈은 자체가 죄악도 아니며 은총도 아닙니다. 돈은 중립적입니다. 돈은 쓰는 사람에 따라 죄의 도구도 되고 은총의 도구도 됩니다. 오로지 내 마음이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내가 하느님의 길을 선택하면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실 것입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어떤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그 집에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고 인사하고 그들이 거절하면 먼지를 털고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평화가 되돌아 올 것입니다. 우리는 정의구현사제단의 신부님에게도 이처럼 ‘신부님, 평화를 받으세요’하고 말할 수 있어야 하며 그들을 축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그들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먼지를 터세요. 그러면 축복은 다시 나에게 되돌아 올 것입니다. 우리는 사제단에게 ‘당신, 신부 그만 두세요. 사표내세요.’ 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대신 하느님의 축복을 전하고 평화를 나누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에게 하신 말씀은 바로 대한민국수호 천주교인모임의 여러분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신자질문: 저는 교황님께서 한국에 왔다 가시면 평화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이 올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교황님께서 한국사회를 갈등이 확대재생산되는 상황으로 악화시키고 가셨습니다. 교황님은 ‘고통 앞에 중립을 지킬 수 없다’는 말씀을 하셔서 우리 사회에 분란을 오히려 키우셨습니다. 교황님께서 무언가 결과를 생각하는 지혜가 결여된 것은 아닌가요?
 
주교님: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실 때 이를 목숨을 걸고 따랐던 사람도 있었던 반면, 예수님을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하고 외쳤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형제님도 가족이 있고 자매님이 있고 자녀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형제님이 말씀하시면 모두 ‘예’ 하면서 한마음으로 따라오나요? 아마 잘 따르는 자식도 있고 그렇지 않은 자식도 있을 것입니다. 교황님께서 가르치신 내용은 갈등을 키우려고 하신 것은 아니지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자기 좋을 대로 해석하고 이를 왜곡하여 사람들에게 퍼뜨린다면 우리로서도 어쩔 수가 없겠지요. 예수님도 돌아가실 때는 실패한 것처럼 보이셨지만 지금 예수님은 실패하셨나요? 공자님이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가르치셨듯이 천주교도 내 자신을 다스리고 가정을 다스리고 그리고 비로소 나라를 다스리라고 말씀합니다. 내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고 가정을 거두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나라를 다스리겠어요. 어떤 가정에서는 공부하라고 못살게 군다고 하면서 아들이 엄마를 죽였어요. 인간의 자유의지는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이 부여받은 특권입니다. 자유의지란 것은 하느님처럼 자신의 마음대로 결정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내가 믿는 것, 생각하는 것을 나누는 것은 좋지만 반드시 이래야 한다고 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대수천의 입장이나 믿음 역시 절대적인 것이 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로 받아들이는 것은 자유이며 받아들일 것인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인지는 여러분이 결정합니다.
 
제가 오늘 이 자리에 오면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어록 ‘내이름은 프란치스코’를 가져왔습니다. 이는 바오로 딸 수녀님들께서 정리하신 것인데 여러분에게 나누어 드릴 테니 보시기 바랍니다.
 
첫 장에 보면 가난한 사람들과 관련하여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생각하면서 가난한 교회를 바란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를 사람들은 모두 자신에게 유리하게 아전인수식 해석을 합니다. 교황님 말씀을 있는 대로 보아야 합니다. 교황님께서 ‘아픔에는 중립이 없다’고 하신 말씀은 아픈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하신 말씀인데 사람들은 이를 자기들 멋대로 해석합니다.
 
두 번째 ‘걸어가십시오.’ 라는 장에는 ‘우리의 삶은 여정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요청하신 것처럼 뒤돌아보지 말고 그분의 약속을 믿고 살아가십시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날 때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지만 하느님이 말씀하신대로 길을 갔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그렇고 대수천이 가는 길이 그렇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그 길을 꾸준히 가는 것이 대수천이 가야할 길입니다.
 
‘교회를 건설합시다.’ 라는 장에서 보면 ‘주님이신 모퉁잇돌 위에 건설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 삶의 역동성입니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대수천에서 일인데모도 하고 명동성당의 집회에도 가고 하는 것 역시, 역동성입니다. 아내의 생일을 챙겨주고 퇴근하면서 동태 한 마리라도 사들고 들어오는 것 이것이 삶의 역동성입니다. 나의 삶에 있어 하느님, 예수님이 주춧돌이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에는 ‘교회는 정치성을 띤 것은 아니며 본질적으로 영적인 것입니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정의구현사제단의 신부님이 부르짖는 것이 현세적인가? 영적인 것인가? 하는 물음을 던질 수 있습니다. 교황님이 요구하시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정의구현사제단이 밀양의 고압선 밑에서 강정마을에 가서 행하는 것의 관심은 영적인 것인가?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 가는가? 하고 물을 수 있습니다.
 
‘믿음을 고백하십시오.’라는 장에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지 않으면 교회가 될 수 없으며 기껏해야 NGO밖에 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하지 않는다면 악마의 세속성을 고백하는 것입니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만약 정의구현사제단의 신부님들이 참되게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지 않으면 이들은 NGO정치집단 밖에 될 수 없으며 진정한 교회의 사제라고 할 수 없습니다.
 
‘복음을 선포하십시오’ 라는 장에는 ‘그리스도교의 진리는 매력적이며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유일한 구세주이심을 선포함으로써 인간 존재의 깊은 필요에 응답하기 때문입니다.’라는 말씀이 실려 있습니다.
 
‘다양성안의 일치’를 읽어보면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서로 다른 은사를 주시며 성령의 은사 안에서 사랑의 일치를 경험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에는 ‘십자가 없이 교회를 건설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하면 우리는 주님의 제자들이 아니라 세상에 속한 사람들입니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내 이름은 프란치스코’ 이 작은 책자가 많은 진리를 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소책자 한권의 뜻만 잘 이해하신다면 여러분은 밀양에서 강정마을에서 그리스도를 잊고 있는 신부님과 수녀님들에게 맞서서 그리스도의 길을 외칠 수 있을 것입니다. <이한택 주교님과 박홍 신부님은,  "대수천", 즉, "대한민국수호천주교인모임"(지도신부 김계춘?)의 고문(?)으로, 평신도들의 모임을 보살펴 주시고 계신 것으로 알려져 있읍니다.- Msgr. Byon-  
입력 : 2014.11.01 오후 2:4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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