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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976년 초부터 1984년 연말까지, 신장본당 주임신부로 재임한 변기영 몬시뇰께 인사차 방문온 최점옥 아니타 수녀님과 가족들. 최수녀님은 1978년 수원 빈센트수녀원에 입회.(2024.06.04)
글쓴이 Msgr. Byon   / 등록일 : 2024-06-06    (조회 : 89)

1976년 초부터 1984년 연말까지, 신장본당 주임신부로 재임한 변기영 몬시뇰께 인사차 방문온 최점옥 아니타 수녀님과 가족들. 최수녀님은 1978년 수원 빈센트수녀원에 입회.(2024.06.04)



1976년 초부터 1984년 연말까지, 신장본당 주임신부로 재임한 변기영 몬시뇰께 인사차 방문온 최점옥 아니타 수녀님과 가족들. 최수녀님은 1978년 수원 빈센트수녀원에 입회.(2024.06.04)



1976년 초부터 1984년 연말까지, 신장본당 주임신부로 재임한 변기영 몬시뇰께 인사차 방문온 최점옥 아니타 수녀님과 가족들. 최수녀님은 1978년 수원 빈센트수녀원에 입회.(2024.06.04)



1976년 초부터 1984년 연말까지, 신장본당 주임신부로 재임한 변기영 몬시뇰께 인사차 방문온 최점옥 아니타 수녀님과 가족들. 최수녀님은 1978년 수원 빈센트수녀원에 입회.(2024.06.04)



1976년 초부터 1984년 연말까지, 신장본당 주임신부로 재임한 변기영 몬시뇰께 인사차 방문온 최점옥 아니타 수녀님과 가족들. 최수녀님은 1978년 수원 빈센트수녀원에 입회.(2024.06.04)



1976년 초부터 1984년 연말까지, 신장본당 주임신부로 재임한 변기영 몬시뇰께 인사차 방문온 최점옥 아니타 수녀님과 가족들. 최수녀님은 1978년 수원 빈센트수녀원에 입회.(2024.06.04)



1976년 초부터 1984년 연말까지, 신장본당 주임신부로 재임한 변기영 몬시뇰께 인사차 방문온 최점옥 아니타 수녀님과 가족들. 최수녀님은 1978년 수원 빈센트수녀원에 입회.(2024.06.04)



1976년 초부터 1984년 연말까지, 신장본당 주임신부로 재임한 변기영 몬시뇰께 인사차 방문온 최점옥 아니타 수녀님과 가족들. 최수녀님은 1978년 수원 빈센트수녀원에 입회.(2024.06.04)



1976년 초부터 1984년 연말까지, 신장본당 주임신부로 재임한 변기영 몬시뇰께 인사차 방문온 최점옥 아니타 수녀님과 가족(언니, 형부)들. 최수녀님은 1978년 수원 빈센트수녀원에 입회.(2024.06.04)(그 당시 언니부부 혼배미사 후 기념사진)



최점옥 아니타 수녀님 필리핀에 도착, 극빈자들을 돌보는 모습(2024.06.10)



최점옥 아니타 수녀님 필리핀에 도착, 극빈자들을 돌보는 모습(2024.06.10)



최점옥 아니타 수녀님 필리핀에 도착, 극빈자들을 돌보는 모습(2024.06.10)



최점옥 아니타 수녀님 필리핀에 도착, 극빈자들을 돌보는 모습(2024.06.10)



최점옥 아니타 수녀님 필리핀에 도착, 극빈자들을 돌보는 모습(2024.06.10)



최점옥 아니타 수녀님 필리핀에 도착, 극빈자들을 돌보는 모습(2024.06.10)


사제 성소 고갈과 함께 수녀 성소역시 극감하고있는 오늘의 한국 천주교회 성소 위기에 실로 오래간 만에 성 빈센트수녀회 최점옥 아니타,수녀의 방문을 받고, 46년 전 옛 추억을 회상하며 !

 

1970년대 말, 반 세기 전보다 오늘날 우리 한국 천주교회는 신자들도 110만 여명이 600 여만명으로 많아졌고, 교회 시설과 

교회 사업도 엄청나게 늘었으며, 업종도 다양해져서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해야 할 일은 반세기 전보다 비할 수 없이 많아졌으나, 모든 교구 신학교와 모든 수도회 수련소는 지원자들이 급감하여, 박해시대 후, 최악의 위기를 맡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치 독화살을 맞고 쓰러진 위독한 부상병 중환자에게는 화살이 날아온 방향과 화살을 쏜 적병을 찾는 일도 급하지만, 화살을 맞은 부상자에게서 우선 독화살을 뽑고 환부를 제독하며 치료하는 일이 더 시급하답니다. 더욱이 요즈음은 좀 건강하고 젊은 수도자나 사제들을 만나보기가 점점 힘들어져 가는 느낌입니다. 그런데 반세기 전에 신장본당의 미사리 한강 마을 장수동과 구산, 신장, 석바대, 검단산 밑의 천현리, 등, 시골에서 신학교와 수도회에 들어가던 젊은이들을 만나보게 되면 80 고개를 넘어 중턱에 서서 어제의 추억을 오늘에 되살리며, 내 자신이 젊어지는 느낌입니다.

 

그런데 최점옥 아니타 수녀님은 난치병 환자 치료와 극빈자 아동들을 돌보며 극빈자들과 함께 극빈 상태를 극복하며 산다고 들었는데, 70 을 바라보는 젊지 않은 나이에도 아직 늙은 티가 없고, 그 옛날 주일학교 선생하던 그 모습 고대로 보이고 있어서 더더욱 반갑고 고맙습니다. 사실 1976년 3월초부터 1984년 연말까지, 신자 수도 400여 명에 불과한 가난한 시골 본당에서 생계도 그다지 넉넉지 못한 농사를 주업으로 하던 신자들과 함께, 구산 성지 순교자 김안당 순교비 건립, 구산본당 분리, 천진암 성지와 남한산성 순교 성지 개척, 서부성당 분리, 또, 주교회의에 불려가서 한국천주교회 200주년 기념사업이랑, 103위 순교복자 시성추진 업무랑, 전혀 해보지 않은 일들을 빈손으로, 맨 입으로, 도맡아 주교님들의 잔 심부름을 하며, 매일 같이 불철주야로 동분서주 하느라고, 본당 주일학교 교사들과 본당과 공소 회장님들 일은 보좌신부로 함께 살던 당시 이용훈 새 신부(현재 수원 교구장님)에게 일임하였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어린이들과 함께 지내며 주일학교 교사들의 뒷바라지도 제대로 해주지 못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도 우리 순교선조들의 발자욱을 딛으며, 순교 선조들의 땀에 젖고 피로 물든 형장과 무덤을 순례하던 참으로 순수하고 거룩한 우리 교사들 중에는, 7명이나 복자수녀회, 성가수녀회, 마리아수녀회, 성 빈센트수녀회, 성체수녀회, 등. 수도생활을 택하여, 지난 반세기 동안 오늘의 한국천주교회를 이룩한 무명의 큰 일꾼들이 되어, 늠늠한 모습으로, 늙고 낡은 옛날의 본당 신부를 찾아보러 오니, 반갑고 고맙기 그지 없습니다. 성지와 성지순례는 사제성소와 수도자 성소의 샘이오, 산실니다. - Msgr. By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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